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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Women of Asia

- 사진 : Josef Breitenbach

- 펴낸곳 : the John day com (1968)

 

새로운 목숨을 맺는 씨는 남자 몸에만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목숨을 거두어 빚어내는 텃밭은 여자 몸에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 모든 곡식은 씨앗 하나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니, 씨앗이 더없이 대단하고 훌륭합니다만, 씨앗이 자라도록 온몸을 내맡겨 주고 오래오래 보듬어 주는 너른 땅이 없다면 씨앗은 한낱 먼지알갱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온누리 논밭과 풀숲을 가리켜 ‘어머니 땅’이라 하고, 새 목숨을 빚어서 내놓는 여성 몸을 거룩하다고 여깁니다. 비록 오늘날 이 나라 여성들이 남성들한테 억눌릴 뿐 아니라 제 권리마저 빼앗긴 채 슬픔과 괴로움을 먹고산다고 할지라도, 거룩한 여성 모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먹다짐과 돈다발로 여성 몸을 휘두르거나 못살게 군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여성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과 자연은 돈이나 힘이나 이름값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나눔으로 굴러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남성도 돈이나 힘이나 이름값으로 우쭐거리거나 여성을 깎아내리거나 사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여성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목숨붙이이자 훌륭한 씨앗 노릇을 톡톡히 하겠건만, 자기가 남성으로 태어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까닭과 바탕을 자꾸만 잊거나 잃으면서 세상이 두 동강이가 나고 세 조각이 되며 넷으로 다섯으로 찢겨 나갑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되는 흐름'을 잘 여미거나 붙잡을 수 있다면,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놓칠 일이 없습니다. 허튼 데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얄궂은 데 홀리지 않습니다. 속좁거나 비틀린 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서 있을 자리’를 놓친다면,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바탕’을 내버린다면, 우리 삶터는 엉망진창이나 뒤죽박죽이 됩니다. 갖가지 불평등과 푸대접과 따돌림이 판치게 됩니다. 온갖 다툼질과 시샘과 꿍꿍이가 넘치고 맙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 또한 이 땅에 고운 빛줄기 하나 부여잡고 태어난 아름다운 목숨’임을 깨달을 때와 깨닫지 못할 때에는 크게 다릅니다. 많이 벌어집니다. 기나긴 나란한금을 달립니다. 나부터 사랑스러운 목숨임을 느낄 때 비로소 나다운 사진이란 어디에 있고, 나다운 사진을 펼치는 자리는 어디이며, 나다운 사진을 누구하고 나누면 좋을까를 시나브로 곰삭이게 됩니다.

 

나부터 사랑스러운 목숨임을 느끼지 못하니 자꾸자꾸 내 사진기에 담기는 이웃사람을 잘못 바라보거나 엉터리로 알거나 짓궂게 괴롭히고 맙니다. 내 사진기에 담기는 사람들을 꾸밈없이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피사체가 되는 이들이 사진기 앞에서 절레절레 손을 젓’습니다. 느낌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조금도 훌륭하지 못한 사진만 쏟아집니다. ‘나와 너’가 없이 ‘빼앗는 사진’만 태어납니다.

 

내가 나를 섬기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섬겨야 할 이웃을 느끼는 가운데 사진으로 다독여야 할 텐데, 나부터 나를 섬기지 않고 마구 굴리니까, 나부터 내 몸을 가꾸는 밥이 무엇이고 내 마음을 살찌우는 책이 무엇인지를 알아채지 못하니까, 나부터 내 눈길을 틔우는 사진이란 무엇이며 내 마음결을 어루만지는 넋과 얼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붙잡지 못하니까, 현실과 동떨어진 사진만 수두룩합니다. 현실을 등진 사진, 현실을 나 몰라라 하는 사진, 현실 앞에서 팔짱만 끼는 사진이 떡을 바릅니다.

 

조제프 브라이텐바흐라는 분이 담아낸 사진책 <Women of Asia>를 헌책방 책시렁에서 찾아내어 눈물바람으로 한 장 두 장 넘겨보는 동안, 이 세상 한켠에는 ‘한 사람을 한 사람 그대로 아름다운 넋’으로 느끼면서 사진일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우리 나라) 거의 모든 자리는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도 못 보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여자 알몸 사진’에만 파묻힌 가녀린 사진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알몸이든 벗은몸이든, 맨몸뚱이를 사진으로 담는다고 하면서 맨몸을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를 엮어내지 못하는 이 나라 사진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롱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사진’이라는 이름을 내걸면서 벌이고 있는 수많은 문화창작이 어떤 알맹이와 고갱이를 먹으면서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남성 사진가들이 ‘여성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사람 사진’ 또한 있는 그대로 못 찍는다고 하면, 여성 사진가 스스로라도 ‘여성 사진’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사람 사진’을 사람내음 그대로 담아내면 좋으련만, 대학교 사진학과도 입시지옥을 뚫고 들어가는데다가, 사람 공부와 세상 공부와 삶 공부가 없이 교재와 장비 놀음에 파묻혀 있기만 한다면, 그 똑똑한 머리와 그 비싼 사진기로 들여다보는 모습이란 늘 똑같을 밖에, 판박이로 굳을 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아시아 여성’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한국 여성’을 사진감으로 삼는 책 하나 펴내지 못합니다(윤주영 님이 펴내는 <일하는 어머니>나 <석정리역의 어머니들> 같은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진책과 사진감은 얼마나 우리네 사진쟁이한테 파고들고 있을지, 또 한국 여성을 보는 눈은 얼마나 넓거나 깊은지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사진잡지 <포토넷> 2008년 10월호에 함께 싣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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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절판, #사진책, #헌책방, #여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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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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