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냄새가 짙어지는 바람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놓고 창밖으로 눈길을 주게 돼요. 잠깐 멍하니 바라보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비누방울처럼 부풀어 오르지요. 가을바람이 불면 꼭 떠오르는 추억이 있게 마련이지요. 바람에게 물어봅니다.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돈 갚아" 350만원을 당장 갚으라며 까칠하게 구는 희수(전도연 분)와 능청스러운 병운(하정우 분).

▲ "돈 갚아" 350만원을 당장 갚으라며 까칠하게 구는 희수(전도연 분)와 능청스러운 병운(하정우 분). ⓒ (주)스폰지 ENT

<멋진 하루>의 희수(전도연 분)도 그랬을 거 같네요. 스모키 화장을 한 희수는 옛 남자친구 병운(하정우 분)에게 빌려준 350만원을 받기 위해 갑자기 찾아가지요. 당장 돈을 갚으라는 요구에 병운은 희수와 함께 지인들에게 돈을 꾸러 돌아다니게 되지요.

병운은 철이 덜 들었지만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지요. 연상의 사업가, 호스티스, 대학 후배, 싱글맘인 초교 동창까지 그에게 돈을 빌려주네요. 그 천진난만함이 지인들에게는 매력이겠지만 여자 친구에게는 무책임하게 느껴지지요. 희수는 "넌 어쩜 그대로니"라고 어처구니없어 하며 영화는 전개되죠. 

표정으로 읽는 감정 변화

영화에서 인상 깊은 게 바로 희수의 표정이에요. 희수는 처음부터 잔뜩 성이 나 있지요. 이것은 돈을 떼어먹고 1년 동안 연락이 안 된 병운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에요. 결혼도 안 되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자신에게 속상한 것이죠. 돈이 없으면 욕이나 실컷 해주려고 찾아간 병운과 하루를 보내면서 변화가 찾아오죠.

앗, 소나기네! 소나기는 느닷없이 내리기에 당황스럽지요. 달라진 날씨와 소나기가 그친 뒤 변하는 풍경만큼 사람의 감정도 바뀌지요. 소나기도 맞고 병운과 하루를 같이 보내며 희수의 감정도 많이 달라지네요.

▲ 앗, 소나기네! 소나기는 느닷없이 내리기에 당황스럽지요. 달라진 날씨와 소나기가 그친 뒤 변하는 풍경만큼 사람의 감정도 바뀌지요. 소나기도 맞고 병운과 하루를 같이 보내며 희수의 감정도 많이 달라지네요. ⓒ (주)스폰지 ENT


희수는 하루 동안 예전의 흔적들과 마주치면서 점점 얼굴이 풀어지지요. 자신이 좋아했던 밝고 자상한 병운의 바뀌지 않은 모습, 자주 갔던 음식점, 한 우산 속에서 껴안고 걸었던 추억, 이어폰을 나눠 끼고 같이 듣던 음악, "미안해"라며 헤어진 기억. 마침내 희수의 웃음이 번져 나오죠.

희수는 연락이 안 되었던 1년 동안 병운이 겪은 일들을 알게 되지요. 당장 잘 곳도 없는  그가 스페인에 막걸리집을 하겠다며 능청스럽게 굴자 희수는 미묘하게 마음이 애틋해지죠. 이종격투기 선수 효도르가 꿈에서 자신을 위로해줬다는 병운의 얘기에 희수도 위안을 얻었을까요. 스모키 화장으로 곤두서 있던 눈에 물기가 배어나오고 앙다물던 입에서 급기야 흐느낌이 터지네요.

"내가 졌다" 모진 일들을 겪고도 변함없는 병운의 천진난만함에 희수도 그만 웃게 되지요. 그리고 병운을 바라보는 눈빛과 태도도 달라지지요.

▲ "내가 졌다" 모진 일들을 겪고도 변함없는 병운의 천진난만함에 희수도 그만 웃게 되지요. 그리고 병운을 바라보는 눈빛과 태도도 달라지지요. ⓒ (주)스폰지 ENT


관객을 끌어들이는 여백

영상은 많은 걸 보여주지 않아요. 희수와 병운이 어떤 사이였을지 무엇을 했을지 짐작을 하게 하죠. 잔잔하게 열어둔 여백은 관객을 영화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낳지요. 관객들은 가슴 속에 담아둔 추억들을 끄집어내지요. 그리고 영화를 보며 그 빈 공간에 자신의 추억들을 이리저리 대보게 되지요. 마치 퍼즐조각 맞추기처럼.

이 영화는 관객에게 감정 열쇠를 넘겨주어 스스로 감정을 열게 하고 몰입을 유도하지요. 하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꺼내지 않을 경우 자칫 지루할 수 있어요. 주인공들이 영화에서 겪는 감정에 취하게 되는 보통 멜로 영화들과 다르게 관객 스스로 추억과 감성을 살려내야 하는 독특한 멜로영화네요.

영화재미를 드높이는 감미로운 재즈 음악

<멋진 하루>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어요. 귀를 알록달록 물들이는 재즈 음악이에요. 음악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번쯤 퓨전재즈 밴드 푸딩(Pudding)의 음악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푸딩의 리더 김정범이 담당한 음악은 인물들 감정선을 살리는 중요한 장치지요.

희수의 꽉 닫힌 마음이 조금씩 열릴 때마다 따스하고 감미로운 재즈 음악이 나오는데 꼭 희수의 감정 변화가 귀로 느껴지는 것 같아 상당히 묘하죠. 귀를 간질이는 음악을 듣다보면 '기분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느껴지며 희수의 감정변화에 공감이 되네요.

늦더위가 식을 줄 모르더니 어느새 쌀쌀하네요. 가을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금은 쓸쓸한 색깔을 세상에 퍼뜨리지요. 이러한 가을에는 자주 창밖을 내다보며 감상에 젖어 혼잣말을 하게 되지요. 그도 지금 창밖을 보고 있을까.

요즘 딱히 특별한 재미가 없으시다면 바람 소리에 떠오르는 사람에게 연락하여 영화보자고 하시는 것은 어떤지요. 아마 충분히 기억에 남을 '멋진 하루'가 될 거예요. 헤어진 남자친구의 여자들을 만나 돈을 받으러 다니는 엉뚱한 하루였지만 영화의 제목이 '멋진 하루'듯이.

그 사람은 뭐하고 있을까 가을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가면 저 깊숙이 꽁꽁 숨겨두었던 추억들이 번져나오지요. 하나 둘 추억을 더듬다보면 그 사람이 떠오르지요.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요.

▲ 그 사람은 뭐하고 있을까 가을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가면 저 깊숙이 꽁꽁 숨겨두었던 추억들이 번져나오지요. 하나 둘 추억을 더듬다보면 그 사람이 떠오르지요.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요. ⓒ (주)스폰지 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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