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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가 적힌 짙은 청색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신분증이 따로 필요 없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구릿빛 피부, 그리고 뭉툭한 손마디는 그가 적지 않은 세월동안 기름밥을 먹어온 사람이란 걸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옆에 "이랜드 노조"라 적힌 조끼를 입은 여성들이 앉아 있다. 한눈에 봐도 아줌마다. 비정규직으로 살다가 해고되기 전까지 "단결" "투쟁"이니 하는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지 않았던 이들이다. 하지만 어느새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는 목소리에는 날이 섰고, 하늘을 향하는 팔뚝질에는 각이 잡혔다. 그럴 만도 하다. 이들의 싸움은 벌써 1년을 훌쩍 넘겼다.

 

이곳은 23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일만선언 일만행동 촛불문화제' 현장. 노동자와 시민들 약 1000여 명이 참여했다.

 

촛불과 함께 몸을 흔든 노동자들

 

이들 앞에 '노찾사'도, 안치환도 아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20대 초반 남자 대학생 네 명이 섰다. 홍대 앞에서 노래 좀 하고 놀 줄 아는, 그래서 팬클럽도 갖고 있는 음악 밴드 '주'다. 기타 줄을 몇 번 튕기더니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한다. "좀 어색하지만, 그대로 재밌게 놀아보죠!"

 

목소리를 가다듬은 보컬의 입에서 노래가 나온다. "창밖을 보면 비는 오는데 괜시리 마음만 울적해~"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다. 이들의 빠르고 흥겨운 노래는 네 곡 더 이어졌다. 다소 어색해 하던 노동자들은 어느새 촛불과 함께 몸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이렇게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그리고 홍대 앞 20대 밴드는 비정규직이라는 화두 속에서 작은 소통을 시도했다. 물론 '방해' 움직임도 있었다. '주'의 노래가 한창일 때 경찰은 "여러분들은 문화제를 빙자해 불법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속히 해산하라"는 선무 방송을 했다.

 

노래를 마친 '주'의 리더 김준영(22)씨의 말은 솔직했다. 그는 "집회 무대에 처음 서는 것이라 조금 어색하고 무서웠지만 차츰 재미있어졌다"며 "나중에는 '아, 우리가 꼭 이런 곳에서도 노래를 불러야 하는구나'하는 사명감을 갖고 불렀다"고 말했다.

 

사실 노동 문제는 늘 찬밥이었다. 촛불이 활활 타오르던 지난 봄과 여름에도, 촛불은 비정규직 문제와 쉽게 결합되지 못했다.

 

공기업 민영화 반대, 대운하 반대, 그리고 미친교육 반대 구호는 광장의 단골 메뉴였다. 그리고 수많은 촛불은 "언론장악 저지!"를 외치며 KBS, MBC, YTN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 철폐" 외침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기륭전자 앞으로 달려간 촛불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죽겠다"며 90일 넘게 단식을 하고, 몸에 쇠사슬을 감고(기륭전자), 수십 미터 철탑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이는(KTX) '살벌한 투쟁'을 해야 그나마 사람들이 바라봤다.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50% 이상을 차지해 800만명을 훌쩍 넘기는, 남한 인구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는 상황이지만 현실은 늘 냉담했다.

 

촛불과 비정규직 문제의 결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작았던 것도 아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는 촛불이 한창이던 지난 7월 초 "비정규직 노동자는 촛불 현장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해야 하고, 촛불은 쇠고기 문제에 머물지 말고 비정규직 문제와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변화... 기륭전자 앞에 켜진 촛불

 

그래도 최근 작은 결실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단식이 수십일 동안 이어질 때 동조 단식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서울 광화문에서 한참 벗어난 서울 금천구 기륭전자 앞에서도 촛불은 켜졌다.

 

아직 작은 흐름이지만 "촛불이 비정규직 문제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는 진단도 나왔다. 그리고 지난 15일부터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된 '비정규직 철폐' 선언 서명운동에는 일주일 만에 약 1만여 명이 동참했다. 다른 사회 이슈와 운동에 비하면 작은 것이지만, 관계자들은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말했다.

 

23일 촛불문화제 현장에서도 그런 징후들은 보였다. 아주 작은 숫자였지만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보였고, 토익 책을 덮고 나온 대학생들은 "비정규직 반대!"를 외쳤다.

 

김남이(26)씨는 "청계천과 도심을 둘러보다가 집회가 열리는 걸 알고 지켜봤다"며 "한국과 각국 청소년들에게 우리나라 상황과 집회 취지를 설명했더니 쉽게 공감을 했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던 것일까. 행사를 주최한 쪽도 분위기를 최대한 딱딱하지 않게 이끌었다. 집회를 마무리 할 무렵 무대에서는 남미풍의 경쾌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금속노동자, 기륭전자 노동자, 그리고 대학생과 청소년들은 손을 잡고 잠시 춤을 췄다.

 

대학생들과 청소년들은 기뻐했는데, 노동자들은 다소 어색한 듯 뻣뻣했다. 그래도 싫지 않은 듯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집회가 끝날 때 참가자들은 사과를 하나씩 받았다. 사회자는 "혼자 먹지 말고 지나가는 사람과 꼭 반쪽씩 나눠 먹으라"며 "사과를 받은 사람들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고 주문했다.

 

노동운동 쪽도 그들의 방식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것일까. 23일 분위기는 확실히 그런 듯했다. 한 노동자는 "우리는 아직 이런 분위기게 익숙하지가 않아서..."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런 노동자와 손을 잡고 춤을 추던 한 여학생은 "열심히 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촛불과 비정규직 문제가 '통'한 것일까. 아직은 길이 멀어 보인다. 하지만 촛불과 비정규직 문제 사이에 소통의 다리가 조금씩 놓여지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같다.


태그:#비정규직,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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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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