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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28일 목요일, H 해수욕장에서 모슬포성당까지

날씨: 오늘도 가차 없이 쨍쨍쨍쨍쨍
만난 사람들: 없음
생각할 것: 이번 여정 속에서의 재발견(再發見)에 대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산만한 기분으로 TV부터 틀었어. 닳고 닳은 브라운관 위로 사람들의 얼굴은 누렇게 뜬 잿빛에 가까웠지. 어제 발을 담갔던 용천수 자리가 마음에 남아 수건 한 장을 챙겨 숙소를 나왔어. 지난 밤의 번잡함도 모두 퐁퐁 용천수에 녹여낸 듯 몸을 씻고 상쾌하게 시작한 걸음, 오늘로 계획하였던 제주올레는 6코스를 마지막으로 다 걷게 되는 거야.

제주올레에서
▲ 용천수의 샘 제주올레에서
ⓒ 유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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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낸 파란 화살표를 따라 찾아간 H 해수욕장에는 드문드문 알록달록한 텐트가 쳐져 있었어. 식수대에는 아침밥을 짓기 위해 코펠에 물을 받는 젊은 여행자가 있었지. 어제 사 놓은 김밥 한 줄을 쏙쏙 빼먹으며 그를 지나쳐 갔어.

언뜻 보기에도 이어질 길은 만만찮은 돌무더기였어. 어젯밤 지도를 보고 앞으로 도착할 곳에 대한 방향감각을 획득했기 때문에 해수욕장을 스윽 둘러본 후 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어. 붉게 부풀어 오른 팔뚝의 산모기 상처며 풀에 쓸려 베인 자국들은 더 이상의 고행(?)을 원하지 않았어. 대신 딱딱하게 깔린 아스팔트를 따라 걸으며 발바닥의 피로와 '쌩' 하고 스쳐가는 차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모험의 값을 치르기로 했지.

제주올레에서
▲ 귀여운 산방산 제주올레에서
ⓒ 유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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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에 발갛게 물드는 산방산은 바닷물 위로 머리만 빼꼼 내놓고 있는 듯 귀여운 생김새였어. 가까이 갈수록 가파른 바위 급경사가 대단했어. 산자락 아래에는 커다란 사찰, 그리고 주위로 기념품가게 등이 있었지. 네덜란드인 하멜의 표류를 기념하기 위해 물가에 대어놓은 거대한 배는 마치 놀이동산의 바이킹처럼 보였어.

제주올레에서
▲ 하멜의 배 제주올레에서
ⓒ 유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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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변에는 관광객을 태우고 사진을 찍기 위해 기르는 말들이 줄에 묶인 채로 하염없이 입술을 움직여 가며 풀을 뜯고, 흑염소 떼는 내 움직임에 놀라 길을 가로질러 후다닥 바닷가 쪽으로 향하고 있었어. 어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어린 염소 한 마리가 갈팡질팡하며 들판에서 헤매던 것을 사진에 담아냈지. 워이, 헤매지 말고 얼른 친구들 따라가.

제주올레에서
▲ 풀밭의 어린 흑염소 제주올레에서
ⓒ 유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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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지난한 찻길을 따라 걷자 마라도 행 유람선 선착장이 나타났어. 첫 날 만나 '시간 되면 마라도에 다녀오세요. 참 좋아요' 하고 조언을 건넸던 도보여행자가 떠올랐지. 그 아저씨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오랜 시간 떠나려는 배를 바라보며 '다녀올까, 말까?' 생각을 재어 보았지. 마라도는 저 앞의 송악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하자. 이왕 시작한 길 끝까지 걸음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어.

파란 화살표는 송악산 산책로의 완만한 오르막을 비껴나 곧 붉은 자갈 오르막으로 향했어. '또 시작이구나' 벌거벗은 붉은 흙길을 따라 잡을 것도 하나 없어 아슬아슬 걸어가며 오르막 입구에서 보았던 '주의' 표지판이 자꾸만 머리 위로 떠올랐지. 말똥을 샤샤샥 피하며 정신없이 기어오르자 곧 '송악산(松岳山)' 비석이 보였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모자를 꼭 쥐고 수평선을 바라보았지.

넘실거리는 청록 물결, 빼곡하게 자란 소나무 숲, 점점이 박힌 마을, 모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조심조심 길을 내려왔어. 길 위에 떡하니 서서 풀을 뜯는 기름진 말들을 보자 숨이 턱 막혔지. '발길질 한 번이면 나동그라지겠는 걸, 얘들을 어떻게 지나간다…?' 그저 조심조심 눈도 마주치지 않고 천천히 걷기로 했지. 가까이 가서 갈기를 쓰다듬거나 풀을 뜯어 입가에 대어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

제주올레에서
▲ 말의 길 제주올레에서
ⓒ 유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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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봐, 저 애. 우리가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어."
"그냥 두자. 지나가는 애잖아."

마치 말들이 나를 비웃으며(!) 비아냥대는 듯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풀쩍 달려들어 말 등에 올라타는 상상도 해 보았지만 나의 서전트 점프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잠시 화살표를 잃고 소나무 숲을 방황하다 철조망을 뛰어넘고 갈아엎은 밭 언저리로 푹푹 빠지는 발을 옮겨 도로로 나올 수 있었어.

해안도로를 타고 자전거를 질주하는 여행자들이 반가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전했지. 정말 제주도는 자전거 여행자들의 천국인 것 같아. 나도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볼까?

지금은 감자심는 중
▲ 밭일하는 아주머니들 지금은 감자심는 중
ⓒ 유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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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살을 지글지글 태우는 태양 아래서 묵묵히 길을 걸으며 이번 여행을 생각했어. 1년만의 긴 걸음, 단 4일의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어. 무엇보다 특별한 '재발견'들이 있었지. 제주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고독에 대해서, 인연에 대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것과 함께인 어떤 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떠올렸어. 멋진 여행, 멋진 올레, 멋진 사람들이었어. 비록 과도한 모험으로 나를 몰고 가는 화살표를 불신하기도 하고, 난데없는 귀곡산장에서의 공포체험도 있었지. 그렇지만 내 발을 시원하게 식혀준 맑은 물과 까미노를 가뿐히 따라잡는 절경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었어. 언제나 길 끝에 서 있었던 성당에 도착해 짧은 기도를 바치는 그 시간은 정말 달콤했어.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모래사장, 아마도 올레의 종착점 하모해수욕장일 거야. 마지막으로 발을 담글 곳, 기분 좋은 예감으로 다가갈수록 아름다운 모습 치고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 약간 이상했지.

 휴장중입니다
▲ 하모해수욕장 휴장중입니다
ⓒ 유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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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휴장'을 걸어놓은 해수욕장은 모든 것이 방치된 채로 해풍에 삭아가는 상태였어. 멋모르고 양말을 벗고 밟은 모래는 발을 지질 정도로 뜨겁게 달구어져 '세족 취소, 취소야!' 그렇게 서둘러 발을 털고 등산화 속에 집어넣었어. 잔잔한 파도를 쳐다보며 세족 대신 일주일 내내 가방에 매달고 걸었던 까미노의 상징인 호리병을 바다에 내던졌어.

"넌, 이제 진짜 안녕. 또 하나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

곧 자리를 떠나 모슬포 성당을 방문한 후 제주시의 작은 목욕탕에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때를 밀고,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잡아탔어. 비행기 창밖으로 떨어지는 서편의 와인빛 낙조는 정말로 아름다워서 눈물이 또로록 흐르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상하게 맑은 정신으로 히죽 웃고 있었지.

돌아온 서울은 참 반가웠어.
불안도, 아쉬움도 한 점 남아있지 않았어.

정리:
6시 전후 화순해수욕장 - 산방산입구 - 하멜상선전시관 - 마라도 잠수함
9시 반 마라도 유람선 - 송악산 - 하모해수욕장 - 1시 모슬포성당

오늘의 지출:
찐빵 3개, 감귤 2개 / 모슬포시장 /   2,000원
대평->제주시 / 대평버스정류장  /   3,000원
목욕비+목욕타월 /D사우나/제주시 / 4,000원
노형동->공항 이동 / 택시비         / 3,000원
해물우동 /중식당/공항                /  5,000원
선물(초코/유자차/담배)/공항상점/면세점/ 71,200원
제주->김포 /제주항공                         / 75,100원
합계  / 163,300원


태그:#제주올레, #도보여행,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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