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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용산 전망대에서 보면 왼 편으로 희미하게 해안선이 보인다. 칠면초가 핀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와온 마을에 닿는다.
 순천만 용산 전망대에서 보면 왼 편으로 희미하게 해안선이 보인다. 칠면초가 핀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와온 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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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와온 가는 길에서 만난 풍경
 순천만 와온 가는 길에서 만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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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에는 고향에 가지 못했습니다. 추석 연휴가 너무 짧아 멀리 경기도에 사시는 둘째 형님이 내려오기가 어려워 교통이 원활한 다른 한가한 날을 잡기로 한 것이지요. 명절이나 되어야 두 분 형님 내외분을 뵐 수 있어서 기대가 컸는데 어쩔 수 없이 그리운 마음을 잠시 접어야만 했습니다.

대신 추석 연휴가 시작된 어제 토요일, 아내와 함께 순천만에 다녀왔습니다. 배낭에 주먹밥과 김치, 고구마, 계란 등을 챙겨 넣고 순천만 입구까지는 시내버스(67번)를 타고 갔습니다. 순천에 살다보니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훌쩍 순천만을 다녀올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이태 전에는 아내랑 순천만까지 걸어서 간 적도 있습니다. 올 2월에는 저 혼자 순천만에 갔다가 내친 김에 와온 마을까지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순천만의 일몰을 제대로 보려면 용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유명한 순천만 S자 물길 위로 떨어지는 아름답고 장엄한 일몰을 구경하기 위해 용산에 올라갔다가 문득 산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와온 마을까지 해안선을 따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해안선을 따라 길이 끝까지 나 있을 것인지 그것이 확실하지 않아 조금 망설이긴 했습니다. 길을 잃으면 다시 되돌아온다고 해도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결국 길을 나서긴 했지만 말입니다. 길이란 도로와 달리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길을 걷는 그 자체가 중요하지요.  되돌아오는 길도 길은 길이니까 손해를 보고 말고가 없고요.  

저는 길눈이 아주 어둡습니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파출소 신세를 몇 번 진 적도 있지요. 그런 제가 용산에서 산길을 타고 내려와 길이 가다가 끊기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해안선을 따라 와온 마을에까지 닿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에 맡깁니다.

순천만의 유명한 S자 물길
 순천만의 유명한 S자 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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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에 길이 나 있다. 누가 만든 길일까?
 갯벌에 길이 나 있다. 누가 만든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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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내를 데려오지 않고 혼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여러 차례 헤맨 기억이 있긴 해도, 분명히 길이 나 있었다는 그런 경험에 의한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생각이나 상상의 지도만이 아닌, 직접 발로 걸어서 몸으로 확인한 길이기에 한두 번쯤 길을 잃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제가 또다시 길을 잃었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고 있는 셈이지만 말입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조각배가 그림처럼 떠 있는 순천만 대대포구에 닿은 것은 오전 11시 20분경이었습니다. 순천만은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색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역시 갈대숲은 가을이 되어야 제격이지요. 올해는 추석이 여느 해에 비해 다소 빠른 감이 있고 날씨도 꽤 더운 편이어서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어중간한 순천만을 감상한 셈인데,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갈대밭과 논 사이에 난 길이 보인다. 저 논도 옛날에는 갯벌이었다.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가 월동을 하기 위해서는 수확 후 논을 갈아 엎지 말아야한다.
 갈대밭과 논 사이에 난 길이 보인다. 저 논도 옛날에는 갯벌이었다.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가 월동을 하기 위해서는 수확 후 논을 갈아 엎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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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순천만-순천만은 봄은 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맛이 다르다.
 겨울 순천만-순천만은 봄은 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맛이 다르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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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로 알려진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 습지 중 하나로, 2654만㎡(800만평)의 광활한 갯벌과 231만㎡(70만평)의 갈대밭으로 이뤄진 자연의 보고입니다. 붉은 칠면초, 짱뚱어, 농게, 천연기념물 228호인 흑두루미를 비롯한 200여종 철새의 군무를 만날 수 있는 순천만은 우리나라 최고의 자연 생태 관광지이지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순천만 자연생태관에서 생태 환경교실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무진교를 지나 탐방로를 걷고 있는데 저만큼 앞서 걷던 아내가 호들갑을 떨며 저를 불렀습니다.

"여보, 저 꼬물거리는 게 뭐야?"

가만 보니 그것은 순천만의 상징이기도 한 ‘짱뚱어’였습니다. 그런데 알을 까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꼬물거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씨알이 아주 작았습니다.  

짱뚱어는 못생겼다. 하지만 맛은 일품이다.
▲ 짱뚱어 짱뚱어는 못생겼다. 하지만 맛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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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순천 사람이 짱뚱어도 몰라?"
"저게 짱뚱어란 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작아?"
"새끼니까 작지. 하긴 나도 저렇게 작은 것은 처음 보네."

"짱뚱어가 망둥어지?"
"뭐? 망둥어는 망둥어고 짱뚱어는 짱뚱어지."
"그럼 문절구가 짱뚱어야?"
"문절구가 망둥어야. 경기도에서는 문절구를 망둥어라고 해."

거기까지는 저도 아내 앞에서 잘난 체를 할 수 있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여보, 저기 다리가 빨간 게 있잖아. 그건 이름이 뭐야?"
"저거? 글쎄…."

마을 사람들은 '도둑 게'라 부른단다.
▲ 농게 마을 사람들은 '도둑 게'라 부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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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손끝이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닌 '농게'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 뒤의 일이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호흡조절을 하며 용산 전망대에 올랐다가 드디어 해안선을 따라 와온 마을을 향해가던 길이었습니다. 새우양식장 바로 곁에서 국내 최초로 짱뚱어 양식을 하고 있다는 한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양식이라기보다는 그냥 가두어 키우는 거지. 사료를 주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결국은 바닷물로 키우는 거니까."
"그럼 어르신이 여기서 주로 하시는 일은요?"
"미생물을 알맞게 조절해서 넣어주어야 하거든. 저것들도 똥을 쌀 거 아니야. 그것을 미생물들이 분해해주지 않으면 썩게 되니까."

그런 대화가 한참 오고가는데 아내가 갑자기 어르신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참, 다리가 빨간 게가 있던데 그 게 이름이 뭔지 아세요?"
"그 거 농게야. 도둑 게라고도 하지."
"도둑 게요?"
"여기 게들이 저기 저 마을 집 부뚜막까지 기어 올라가거든."

순천만에서 그 어르신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가령, 일년에 일곱 번 색이 변한다는 칠면초가 빨간 색으로 물드는 시기가 8월 말에서 9월 초순경이라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그 무렵에 비가 오지 않으면 절정의 색깔을 볼 수 없다는 얘기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 끝에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칠면초
 칠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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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여기 사진을 찍으러 많이들 오는데 칠면초는 멀리서 찍어야 제격이거든.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고 막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러다보면 자연이 훼손될 수밖에 없잖아.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그러면 못 쓰지."

그 말에 뜨끔해서는 저도 모르게 어르신께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미리 듣지 않았다면 저도 혹시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잠시 길을 잃었다가 어렵사리 다시 제 길로 들어서자 갯벌은 온통 빨간색 일색이었습니다. 황홀하면서도 가슴을 저미게 하는 붉은 색감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모성의 하혈을 연상케 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한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극치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욕망으로 넘어서지 않도록.

순천만 와온 바다. 이곳에서 순천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다.
 순천만 와온 바다. 이곳에서 순천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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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남도의 대표적 축제인 갈대축제가 환경 올림픽으로 불리는 람사르 총회와 같은 기간인 오는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8일 동안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일원에서 개최된다. '생명의 강 순천만을 날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에는 첫날 시민과 관광객이 참여하는 순천만 사랑 걷기대회와 람사르 길 준공식이 열리는 것을 비롯해 갈대와 흑두루미의 사랑콘서트, 순천만 사진전과 영상전, 세계주요 습지 포스터 전 등 다양한 전시와 공연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세계 자연유산 등록 추진 심포지움이 열리며, 특산물 전시와 판매전, 남도 음식 맛을 볼 수 있는 먹을 거리 마당도 준비된다.



태그:#순천만 , #짱뚱어, #농게, #칠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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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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