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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더도말고 덜도말고 팔월한가위 만 하여라!

 

일 년에 두 번, 설과 추석 전 날은 아버지 손잡고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기고, 저녁에는 엄마가 사 오신 새 옷과 운동화를 신고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방바닥에서 뛰어보던 추억이 있는 나에게는 정답고 친숙한 바람이다.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움이 더하다. 

 

우리집에서 선산까지는 왕복 10㎞는 족히 되었던 것 같다. 추석 날 아침, 꼬까옷에다 새 신발을 신고 아빠가 주신 용돈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문을 나서노라면 할아버지께서 “아이쿠 내 손자, 이 할애비 따라 조상님들께 성묘 다녀와야지” 내 손을 잡으시면서 하시던 말씀이다. 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귀여웠으면, 눈에다 집어넣어도 성이 차지 않으실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 분이다.

 

할아버지 따라 산을 넘고 들판을 지나고 개천을 넘어 성묘 가는 것도 그런대로 재미있다. 그러나 성묘를 다녀오면 저녁때이고 새 신발 때문에 발에 물집이 생기고 몸은 지쳐서 녹초가 된다. 그래도 애들과 놀려는 생각에 서둘러 대문을 나선다. 애들은 용돈을 다 써버리고 놀 만큼 놀았는지 모두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고샅길은 적막하기만하다.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온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나 언제나 얼른 성묘를 다녀와서 애들하고 놀아야지 하는 꿈은 못 버렸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나의 편이다. 할아버지께서 집에 계시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꾸중하시면 내가 울고, 그러노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온 집안이 뒤집어진다. 한번은 할아버지께서 나를 나무라는 자들은 밥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하시면서 부엌의 가마솥 모두를 떡메로 쳐버려 가마솥 모두가 바닥이 뚫려버렸고 한번은 잠을 잘 자격이 없다고 하시면서 방이란 방은 모두 쇠스랑으로 구들장을 파버려 일주일 정도 모두 마당에서 잠을 자야했다.

 

퇴색한 추석의 의미

 

오늘 아침에 출근길에 집사람이 같이 차를 타고나오면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모든 여자들이 올 추석 연휴는 짧아서 좋대요. 남자들은 어때요?”  “그래 나도 좋아! 차례는 시장에서 송편 한 접시 사서 지내면 되겠네! 나와 자네 그리고 아들 셋이라면 송편 한 접시도 많지 않을까?” 빈정거려보나 직성이 안 풀린다. 동생들도 제수씨들의 사주(使嗾)에 모이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고 집사람도 형제들과 가족이 모이는 것이 달갑지 않다.

 

나는 집사람을 비롯한 40~50대 주부들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이 못마땅하다. 자식들을 인성을 무시하고 출세를 위한 교육에 치우쳐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들었고, 불로소득의 온상인 부동산투기 바람을 일으켜 젊은이들의 꿈을 짓밟아버렸고, 노동을 경시하고 농사일을 안 하겠다는 풍토위에 부의 세습이라는 아주 좋지 않은 유산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녀를 구분하고 책임을 전가할 필요가 있을까마는 우리 사회는 점점 어두운 쪽으로 나아간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도 내 집을 장만하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겠다는 꿈이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희망과 꿈이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퇴직하면 폐기처분당해야 하는 가장들은 부인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보니 가장들이 점점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되어간다.

 

왕초보 농부의 잃은 것과 얻은 것

 

나는 은퇴하면 산골로 들어가서 자연과 일치되는 생활을 하기로 서원한 사람이다. 때문에 추수감사와 조상님들의 은덕을 기리는 추석에 별다른 의미가 있다. 나는 진정한 농부가 되고싶다. 무지한 욕심에 나는 직접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거의 없으면서 무 농약과 무 화학비료 농사를 고집했다. 현실을 무시한 명분만을 위한 허망한 망상이었다는 것을 올해 농사를 지으면서 알게됬다. 

 

널따란 밭의 콩과 참깨는 파종 후 성장이 너무 부진하여 박씨 아저씨가 소량이나마 복합비료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동의 했더니 콩은 잎만 무성하고 참깨는 무성한 잡초에 전멸했다. 다행히 나와 집사람이 주말에 김을 매준 2두락은 열매를 맺어 참기름 맛은 볼 것 같다. 잡초와 더불어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에 수정이 필요하다.

 

작년에 특급 밤 1㎏의 수매가격은 1800원이었다. 금년 초 시랑헌은 크게 토목공사를 하면서 밤나무를 많이 훼손했다. 또, 벌채하면서 밤나무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줬는지 우리 밤나무는 열매가 시원치 않다. 할 수 없어 박 씨에게 사돈댁에 선물할 특급 밤 10㎏를 주문하였다. 올해는 특급 밤 1㎏의 수매가격이 1560원이다. 시장에서 제수용품으로 사려면 1㎏에 1만원 이상을 줘야한다는 집사람 설명이다. 뭔가 너무 잘못된 세상이다.

 

 

밤나무 농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밤을 사서 선물을 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작년에 비해 가격이 떨어진 것이 있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금년 초 1포에 1만2000원하던 복합비료는 2만6000원으로 올랐다. 밤을 줍는 철이 되니 줍지 않고 방치하는 것도 아깝다. 나와 집사람이 2차례 주말 4일간 고생을 하여 밤나무 단지의 잡초와 칡넝쿨을 치웠다. 경사가 심한 지역은 미끄러워 밧줄을 잡고 다니면서 일을 해야했다. 이곳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밤의 양은 좋은 밤 나쁜 밤 선별하지 않더라도 20㎏이 넘지 못할 것이다. 

 

토마토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 와보면 너무 익어 썩어버린 것이 대부분이고 호박도 때를 못 맞춰 늙은 호박만 3덩이 수확했다. 오이와 가지는 변변한 것 하나도 못 따 먹고 말았다.

 

산술적인 계산에 의하면 밤농사를 비롯하여 달걀만한 배 2개와 밤보다 약간 크거나 작을지도 모르는 참외 1개가 수확물의 전부인 농사의 대차대조표의 성적은 낙제점이다. 더구나 차나무 묘목을 비롯하여 전멸한 과수도 부지기수이고 종자도 못 건진 산마 밭을 갈아엎고 가을에 김장할 배추를 심겠다고 일하는 나와 집사람의 모습을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릴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집사람은 매우 감사한 마음으로 밤알만한 참외를 깎아 공평하게 나눠먹었고 달걀만한 배도 만족한 웃음과 함께 맛보았다.

 

시랑헌에는 촌스런 맨드라미와 봉선화가 피어있고 가을 색인 코스모스가 바람이 부는 대로 살랑거리는 여유를 부린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호랑나비도 꽃뱀의 꼬리 꽃이 시들기 전에 거두어야 할 꿀을 찾고 황색나비들도 벌개미취 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을 하고 있노라면 지친 육신의 피로가 가신다.

 

 

 

 

 

요즈음 TV나 일간지에 자주 거론 되는 중국음식물의 피해에 관한 얘기를 듣고 읽다보면 ‘하나를 얻으려고 너무 많은 것을 잃는구나!’ 라는 느낌이 절실하다. 쉼 없이 펼쳐지는 지리산 주능선을 배경으로한 광대한 스케일의 운무 산수화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내가 걷는길도 틀린 길이 아니구나!' 라는 확신이 든다. 고구마와 들깨 수확을 한 후에 다시 한 번 올해 농사의 손익계산서를 만들어 봐야겠다. 산수화 구경은 덤으로 셈하고 말이다.

 

지금까지는 왕 초보 농부라 그렇다고 치부하더라도 내년에도 계속 할 농사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얼마나 양질의 친환경 숙성비료를 만들 수 있는가에 좌우될 것이다. 화학비료는 토질을 버리는 악순환 고리를 만들고 농협에서 판매하는 퇴비는 질이 낮아 화학비료의 보조가 필요하다.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사용하시던 퇴비는 동물의 배설물이 식물의 성장에너지 공급원으로 연결되는 순환과정의 대 전제가 성립되었으나 그동안 사람들이 수세식 변기를 통해 자연의 순리를 인위적으로 끊어 버렸다.

 

집사람은 일오가 실례한 배설물이 포치위에 아무리 심난하게 어질러졌어도 아무런 불만 없이 깨끗하게 청소하지만 윗집 개가 실례한 배설물은 옆에 가지도 못한다. 이 배설물과 저 배설물이 똑같이 농작물의 정화과정을 거치면 다시 우리들을 살리는 먹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집사람이 새롭게 인식하는 그 날, 나는 병충해를 이겨낼 수 있는 양질의 숙성비료를 생산 할 수 있는 열쇠를 쥘 것이다.


태그:#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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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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