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구>의 한 장면.

영화 <지구>의 한 장면. ⓒ BBC 월드와이드


영화관이 없다. 내가 사는 충북 괴산 읍내 얘기다. 그래서 지난 주말 천안까지 나가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를 보았다. 물론 일이 있어 나간 길이었지만. 나는 천안이 고향인 L을 불러냈다. 그는 남미여행 중에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여러 번 만나 함께 재미있게 놀았던 친구다.

"형, 가을바람 솔솔 부는 게 아주 미치겠어요."

호주며 말레이시아며 1년 가까이 떠돌고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발바닥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지난주에 8개월 동안 일 나갔던 회사를 또 그만두었단다.

녀석은 남미 파타고니아에서 빙하트래킹을 하던 중에 '필'을 받아 '올 누드'로 빙하에 누워 기념사진을 찍었던 친구다. 그 얘기를 듣고는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 이보다 더 직관적이고 멋질 수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지구>를 보다보면 영화관이 사막이 되고 스크린이 바다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영화관이 사막으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 대신 객석이 사막처럼 텅 비어있었지만, <지구>의 영상에 담긴 '지구'는 아름다웠다. 46억 년 전 어느 행성과의 충돌로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짐으로써 생명이 살아가는 최적의 조건이 되었다는 지구. <지구>는 북극에서 적도를 지나 남극까지, 경이로운 지구의 4계절을 화면 가득 담아냈다.

영화 <지구>에 인간은 없었다

 영화 <지구>의 한 장면.

영화 <지구>의 한 장면. ⓒ BBC 월드와이드

겨울 내내 암흑이었던 북극에 첫 해가 떠오르고 막 잠에서 깨어난 북극곰 가족이 눈 위에서 미끄럼을 타는 장면은 내 감성을 자극했다.

히말라야 만년설을 넘어서는 새들의 힘겨운 비행, 그리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적도에서 남극까지 대장정을 이어가는 혹등고래의 여행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또 7m가 넘는 백상아리가 수면 위로 치솟아 바다표범을 한 입에 집어삼키는 50여초 동안은 숨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많은 장면들, 이야기들, 모두 신비롭고도 아름다웠다. 아내와 함께 3년 가까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났던 경이로운 순간들이 내 가슴 속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듯했다.

40여명의 카메라맨과 4500일 간의 촬영기간이 말해주는 제작진의 수고로움이 영상 안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그런데 <지구>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 <지구>가 보여주는 지구의 아름다움에 인간은 없었다. 지구에 생명이 잉태되었을 그 날부터 인간은 변함없이 자연의 하나였을 텐데, 이제 <지구>에서 인간은 비껴나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은 북극곰이 사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얼음을 사라지게 하고, 초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코끼리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너무 많은 걸 개발하고 만들고, 너무 많은 걸 먹고 소비해온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울 수 없다는 뜻일까.

위기 맞은 북극곰 미래, 우리 미래이기도

 영화 <지구>의 한 장면. 사막화가 점점 가속화 되고 있다. 초원에서 사는 코끼리의 모습을 볼 수 없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영화 <지구>의 한 장면. 사막화가 점점 가속화 되고 있다. 초원에서 사는 코끼리의 모습을 볼 수 없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 BBC 월드와이드


아프리카 탄자니아를 여행할 때였다. 아내와 내가 방문했을 때는 1년 내내 비가 제대로 오지 않아 들판이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작물은커녕 들풀마저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당연히 소도 양도 사람도 비쩍 말라있었다.

콜란도토라는 시골마을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는 아침저녁으로 "하나님 비를 주세요"란 말로 기도를 시작해서 같은 말로 끝을 맺곤 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땅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한숨도 늘 이어졌다.   

하루는 차를 타고 인근 마을들을 돌아보았는데, 양철 양동이를 든 어린 소녀가 누런 들판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이 벌판에서 저 소녀는 어디를 가는 걸까. "물 길러 가요." 선교님이 내 마음을 읽어냈다.

"그럼 저 소녀는 얼마나 걸어가야 하죠?"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어쩌면 하루 종일 걸어갔다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죠."

영화가 끝나자 그날 그 소녀의 목마름이 다시 살아났다. 영화 <지구>는 점점 빨리 녹아버리는 얼음판에서 허우적대다 결국에는 먹이를 구하지 못해서 몸무게가 절반이나 빠져버린 북극곰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북극곰은 유연하게 조각 얼음들이 띄엄띄엄 떠있는 바다를 수영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와 하얀 북극곰, 무척 아름다웠다. 그 때 카메라가 조금씩 물러났다. 북극곰은 점점 왜소해지더니 마침내는 발 딛고 설 얼음 땅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 외로운 점으로 떠 있었다. 그때서야 북극곰의 쓸쓸한 미래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지구>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구가 더워지면 북극곰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북극곰의 미래는 탄자니아 목마른 소녀의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진짜 지구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영화 <지구>의 한 장면. 온난화와 마구잡이 개발 등으로 인해 북극 빙하가 점점 더 빨리 녹고 있다. 북극의 상징인 북극곰은 삶의 터전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지구>의 한 장면. 온난화와 마구잡이 개발 등으로 인해 북극 빙하가 점점 더 빨리 녹고 있다. 북극의 상징인 북극곰은 삶의 터전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 BBC 월드와이드


영화관을 나서는데 L이 영화 평을 내놓았다.

"내 돈 내고 보기에는 좀 아깝네요."

짜식. 평이 건조하기 짝이 없다. 내가 보여줘서 자기는 돈을 내지도 않았으면서. 물론 영상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여행하며 직접 마주했던 그 경이로움에 비할 수 있겠냐는 의미임을 잘 안다. 그런데 나는 (L의 평에 의하면) '동물의 왕국 극장판'이라는 이 영화를 사람들이 돈 내고 많이 봤으면 좋겠다.

거기에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고, 지금의 속도로 지구온난화가 진행된다면 2020년이면 북극곰이 사라질 거라는 우리 인간에게 던져진 메시지가 널리널리 공감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화 <지구>에 담긴 아름다운 '지구' 때문이다. <지구>는 도시와 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지구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선물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양학용 기자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아내 김향미님과 함께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길 위에서 만난 세상 사람들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후, 여행에세이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를 출간했습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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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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