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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지만 한낮은 햇볕이 따갑다. 초가을 날씨는 지금처럼 뙤약볕이 내리쫴야 벼가 잘 익는다고 한다. 오후 들어 해가 누그러졌다. 선선할 때 배추모를 옮겨야겠다. 아내랑 아내 후배와 함께 애를 쓰고 있는데, 옆집 아저씨와 새집 할아버지께서 우리 밭에 오셨다. 일을 도와주러 오셨나? 오자마자 아저씨는 모종삽을 찾고, 할아버지는 조루에 물을 받으신다.

 

"저희가 싸목싸목해도 되는데."

"아냐, 세 판지를 어떻게 오늘 다해?"

"오늘 못하면 내일 하죠. 아직 늦지 않았잖아요."

"내일까지 갈 거 없어. 잠깐 거들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야."

"그럼 빨리 마치고, 막걸리 파티를 벌어야겠네! 돼지고기도 굽고요."

"그거 좋지!"

 

두 분 어르신 속셈이 따로 있으셨네?

 

어르신들이 거들자 일이 한결 수월하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어르신들께서 능숙한 솜씨를 발휘한다. 오랜 세월 터득한 요령이 빛이 난다.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다. 일을 마치고 잔디밭에서 막걸리파티가 벌어졌다. 돼지고기를 굽는 아내 손길도 분주하다. 막걸리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두 분이 서로 맞장구를 치신다.

 

"전 선생, 한시름 놓았지? 내일은 시간 낼 수 있나? 마니산에 기 받으러 가야지!"

"산에 오른 지가 꽤 되었어. 아마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난 막걸리보다 산이 더 좋아. 요즘은 몸이 근질근질해!"

 

그러고 보니 어르신들께서 밭일을 도와주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 일이 빨리 끝을 내야 함께 산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니산 산행에서 내가 빠지면 재미가 없다나? 일도 함께하고, 산행도 함께하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고마운 이웃들이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을 실감한다. 고대광실에서 살아도 이웃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다. 어려울 때 함께하고, 즐거운 일은 나누는 게 이웃간의 정이 아닌가 싶다. 옆집 아저씨와 새집 할아버지에게서 돈독한 이웃의 정을 느낀다.

 

"마니산, 요번에는 정상을 정복할까요?"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마니산 오른쪽 능선인 장군봉에 오른다. 천천히 걸으면 두어 시간이 걸린다. 동네 고샅을 따라 오르면 가파르지 않아서 좋다. 운동 삼아 산행을 즐기기에 딱 알맞은 코스이다. 어르신들께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 배낭에는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를 챙겼다. 우리 산행에서 빠지지 않은 막걸리도 냉장고에서 꺼냈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가볍다. 끙끙대고 해야 할 일을 미리 끝냈으니 마음에 여유가 있다.

 

"아저씨, 할아버지! 산에 갑시다!"

 

동네 방송이라도 하듯 고샅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두 분 모두 현관문을 열고 나오신다. 날이 참 맑다. 마니산이 눈앞에 들어온다. 옆집 아저씨가 새집 할아버지께 묻는다.

 

"할아버지, 오늘은 코스를 달리해 볼까요? 마니산 참성단에는 오르지 않았죠?"

"안 올랐지. 만날 장군봉만 올랐잖아?"

"참성단까지는 좀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 자신 있으세요?"

"내 걱정은 말라구. 대신 천천히! 알았지?"

 

새집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지가 2년째이다. 부지런히 텃밭을 가꾸고 동네일에 늘 앞장서 이웃 모두 존경심을 갖고 있다. 팔순을 넘기셨지만 정정하시다. 평소 걷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다며 노익장을 과시하신다.

 

우리 동네에는 마니산이 있어 참 좋다

 

우리는 마니산 단군로로 접어들었다. 옆집 아저씨가 앞장서고, 새집 할아버지가 뒤를 따른다. 나는 맨 뒤에서 두 분을 따라 간다. 느릿느릿 걷는 발걸음에 바쁠 것이 없다. 두 분께서 나누시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할아버지, 강화 마니산이 참 좋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기가 세서 그런가? 한 번 오르면 찌뿌둥한 몸도 딱 풀려."

"기만 센가요? 산세 웅장하고, 모나지 않은 바위, 능선에 펼쳐진 풍광, 다 좋죠!"

"그나저나 능선까지는 멀었어? 쪼금 힘들구먼!"

"이곳이 제일 험한 구간이죠. 조금만 힘을 내자구요. 능선에 오르면 수월합니다."

 

수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가는 느낌이다. 어느새 산 능선에 도달했다. 푸른 산줄기 아래 정겨운 시골마을이 펼쳐진다. 누런빛이 들기 시작한 가을들판이 풍요롭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개펄, 바다와 작은 섬들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다가온다. 숨을 고르고 나니 다시 힘이 생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염려가 된다.

 

"할아버지, 힘드시죠? 그냥 장군봉 쪽으로 하산할까요?"

"아냐, 내 걱정은 말어. 이제 능선 길을 따라가면 되잖아!"

"정상 가까이 계단길이 좀 힘들어요."

"힘들면 쉬고 또 쉬어가지 뭐. 처음 맘먹은 대로 가야지."

 

손사래를 치는 할아버지 표정에 힘이 실려 있다. 다시 출발이다. 능선 길이 편안하다.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발길을 재촉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계단길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이제 막바지 힘을 쏟아야 할 성싶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는데 힘이 든다. 할아버지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신 이마에 땀을 훔치신다.

 

전망이 좋은 쉼터에서 시원한 음료수로 갈증을 달래니 새 힘이 솟아는 것 같다. 한참을 쉬고 있는데,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이 맨발로 오른다. 발에 굳은살이라도 박였나? 할아버지께서 남자분한테 말을 건다.

 

"맨발이면 힘들지 않아요? 산에 오를 때마다 맨발로 다니시나?"

"마니산에 오를 때만 맨발이죠. 기가 센 산이라 온 몸으로 기를 받으려고요."

 

부부는 마니산이 좋아 일년에 몇 번씩 찾는다고 한다. 발바닥을 보여주는데 굳은살이 박혀있다. 맨발로 다니는 것은 이제 습관처럼 되었단다. 할아버지는 좀 별스럽다는 표정이시다.

 

"마니산을 정복했으니 다음 산은 어디야?"

 

계단길이 끝나고 조금 걸으니 참성단이 코앞이다. 할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돈다. 드디어 마니산 정상을 정복한 안도의 모습이시다.

 

마니산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 오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성단을 보면 안타깝다. 참성단이 쇠창살에 갇혀있는 것이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거대한 쇠 울타리가 참성단을 마니산의 품에서 가둬둔 것이 못내 씁쓸하다. 내내 기분이 좋으신 할아버지께서도 참성단을 보더니만 혀를 차신다.

 

"참성단이 뭣을 잘못했다고 가두었을까? 잘못은 사람들이 했을 텐데 말이야. 애먼 참성단만 철창신세구먼!"

 

그래도 마니산을 찾은 사람들은 발아래 펼쳐진 산하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갯벌로 떨어져 내릴 듯 탁 트인 시야가 시원스럽다.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해안 풍경, 바둑판 같은 강화의 들판도 절경이다.

 

처음으로 마니산 꼭대기까지 오른 새집할아버지는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운 모양이시다. 연세에 비해 강건해 보이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다. 자리를 털며 산행을 마감하시는 말씀에서 즐거움이 묻어있다.

 

"마니산이 강화에서 제일 높다며? 가장 높은 산에 올랐으니 강화 산은 다 자신 있어! 전 선생, 가을걷이 다 끝나면 주말마다 산에 다닐 수 있지! 다음 산은 어디야?"


태그:#마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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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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