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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의 '일호'는 평범하다. 소설의 주인공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다. 딱히 반항적인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시대 열일곱 살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아이다. 그런 일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학생들에게 눈에 띈다. 머리 때문이다.

 

일호가 들어간 오광고등학교는 '오삼삼'을 강조한다. 앞머리 5cm, 옆머리, 뒷머리 3cm를 강요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오광두 선생의 바리캉이 가만 있지를 않는다. 체육선생 '매독'의 매질도 견뎌야 한다. 완전한 규율 강조, 그것이 오광고를 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일호는 그런 것에 크게 쓸 필요가 없었다. 신경 쓰고 싶어도 그럴 처지가 못됐다. 아버지가 해외 어디론가 나가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살펴주는, 이발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일호의 의사와 상관없이 무조건 짧게 잘라주기 때문이다. 욕망을 없애주기 위해서란다.

 

"할아버지는 다부지게 가위를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이제 겨우 세상 구경을 한 내 가여운 머리카락을 모조리 쳐낸 뒤, 목덜미에 숨죽이고 있는 잔털까지 남김없이 밀어 버릴 것이다. 할아버지는 일곱살 살의 머릿카락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욕망이 뒤엉켜 자라고 있어 그것들이 세상 밖을 기웃거리기 전에 무질러야 한다고 믿었다." - 책 속에서

 

이렇게 '모범'적인 머리를 한 일호가 주목받게 된 이유는 뭘까? 오광두가 그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자르라고 선전하기 때문이다. 교문에 세워서 이렇게 잘라야 한다고 말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한 달 내내 조회 시간마다 방송실 카메라 앞에 세워서 또 강조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비꼬듯이 '모범생 일호'라고 부른다. 일호는 아주 죽을 맛이다. 이러다가 왕따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그 마음이 오죽할까?

 

제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열일곱 살의 털>은 '털'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중심에는 머리카락이 있다. 일호는 그 머리카락 때문에 얼떨결에 모범생 일호가 됐는데 다시 그것 때문에 입장이 바뀐다. 매독이 어느 학생의 머리카락이 길다는 이유로 머리에 라이터를 들이대는 걸 보고 흥분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학교가 놀라고 일호는 모범생이라는 딱지를 떼고 요주인물이 된다.

 

일호는 왜 그런 것일까?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발사인 할아버지는 "머리칼은 네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머리칼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네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었다. 두발 규정이 있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이발소에 가서 자르라고 시키도록 한다. 하지만 라이터로 위협하는 건 달랐다. 일호는 그것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학교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학교는 오히려 두발규정을 강화해간다.

 

일호는 두발규정 폐지를 외치기 위해 친구들을 모은다. 평소에 일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일호가 그런 일 한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일호와는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호는 추진한다. '억지로' 머리를 자르게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신념이었다. 일호는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 일로 정학을 당하지만 일호의 신념은 꺾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해질 뿐이다.

 

신념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열일곱 살의 털>은 외로운 싸움을 하는 일호를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해야 했지만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다들 필요하다고 말만 했을 뿐, 정작 때가 되면 꽁지를 보이며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호가 보여주는 외로운 싸움은 신념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열일곱 살의 털>은 그것만으로도 그만의 가치를 지니지만, 그 과정에 일호의 가족사와 우리의 어느 역사를 담아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해외를 떠돌던 아버지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할아버지 등 주변사람들이 사건에 끼어들면서 벌이는 에피소드는 소설을 유쾌하게 만들면서도 더 진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덕분에 이 소설은 그 시선을 일호의 학교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를 향하고 더 큰 이야기를 하게 된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건에서 이야기를 확장해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열일곱 살의 욕망을 생생하게 그린 것도 일품이고 신념을 이야기하는 자세도 일품이다. 그렇기에 <열일곱 살의 털>은 열일곱은 물론 그 이상의 또래가 읽어도 무방한 좋은 소설이다.


열일곱 살의 털

김해원 지음, 사계절(2008)


태그:#사계절문학상, #김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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