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흐이구, 힘들어 죽겠네, 빨리 올라가면 누가 상이라도 주남?"

"그러게 말예요, 천천히 오르면서 두리번두리번 경치도 구경하고, 그렇게 올라야지, 누가 쫓아오나, 왜 허둥지둥 내빼는지 모르겠어?"

 

뒤처진 사람들이 따라 오르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등산길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너무 힘들다. 힘들수록 앞장서 걸어야지 한 번 뒤처지면 더욱 힘들어지는 것이 등산길이다. 더구나 앞장서서 걷는 사람들이 뒤처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으면 꽁무니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 것이다.

 

"누구 약 올리나. 쫓아 올라오면 기다려주지도 않고 다시 올라가고, 이거야 원, 쉬고 있다가 조금 더 같이 쉬어주면 좋으련만 뭔 놈의 경우가 그려?"

 

가장 고약한 것이 앞장선 사람들이 쉬고 있다가 뒤쳐졌던 사람들이 겨우 올라와 앉아 쉬려고 하면 다시 일어나 앞장서 걷는 것이다.

 

지난 9월 2일 경기도 가평과 포천 사이에 있는 운악산을 오르는 길에서 만난 산악회 사람들이 그랬다.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올라온 남녀 30여 명의 회원들은 입구에서 산행 시작만 같이했을 뿐 두 패로 완전히 나누어져 있었다. 뒤처진 남녀 몇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 둥 살 둥 산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서울 청량리역 앞에서 1330-4번 현리행 좌석버스를 이용했다. 운전기사는 두 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1시간 30분 만에 현리터미널에 도착했다. 다행히 운행차량들이 많지 않아서 길이 막히지 않고 도로사정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또 따로 하는 산악회 등산객들

 

현리 터미널에서 운악산 현등사 입구를 지나가는 상판리행 시내버스는 20분 후에 있었다. 현등사 입구 다리 앞에서 내려 개울을 건너자 관광버스 한 대가 먼저 와있었다. 지방에서 등산객 30여 명을 싣고 온 버스였다.

 

그들과 뒤섞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등사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표소를 지나자 길옆 오른편에 구한말의 충신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세 분을 모신 삼충단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치려 할 때 마치 "여길 잠깐 보고 가세요" 하듯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가 뽀르르 담장을 넘어와 재롱을 부리다가 사라진다.

 

산행은 일주문을 지나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가 삼거리에서 오른편 산길로 접어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산길로 접어들자 길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다. 전날 밤까지 상당히 많은 비가 내렸는지 길도 조금씩 파여 나간 모습이 눈에 띈다.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았다. 이 길이 현등사 뒤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30여 분을 오르다가 길가에 앉아 간식을 먹기로 했다. 아침 일찍 집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어느덧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우리가 쉬고 있는 옆으로 산악회 사람들 몇 명이 지나간다. 그들에게도 간식을 권했지만 사양하고 그냥 올라가는 그들은 앞장선 다른 사람들보다 상당히 뒤처진 상태였다.

 

날씨는 등산하기에 매우 좋았다. 햇볕이 쨍쨍 내려쪼이는 것보다 구름이 약간 낀 것이 오히려 산행에는 좋은 날씨였다.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했다. 간식을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깐 걷자 우리를 스쳐지나간 산악회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조금 앞 쪽에는 앞장서 올라간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우리와 뒤처진 산악회 사람들이 먼저 올라가 쉬고 있는 사람들 근처에 이르자 쉬고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좀 쉬었다 같이 갑시다. 그렇게 빨리 올라가면 누가 상이라도 준답니까?"

 

뒤좇아 온 사람들은 약이 오르는지 볼멘소리를 했지만 앞장선 사람들은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올라갔다. 뒤처진 사람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마와 얼굴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도 근처에 잠깐 앉아 쉬기로 했다. 아래쪽을 바라보니 골짜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좁아 보이는 도로가 구불구불 이어진 골짜기는 군데군데 자리 잡은 마을이며 논밭들이 산줄기와 아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정말 멋진 풍경이구먼."

"아저씨! 그런데 저 건너편 산은 무슨 산이래요?"

 

우리 일행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쉬고 있던 산악회 아주머니 두 사람이 건너편의 산 이름을 묻는다.

 

태산이 높다하되, 저 바위봉우리 우리도 오를 수 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높은 산은 연인산, 그리고 왼편의 봉우리가 구름에 덮인 높은 산은 명지산입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지요?"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등산할 때는 여유 있게 경치도 감상하면서 이렇게 올라야 하는 것 아녀요? 그런데 왜들 저렇게 빨리 내빼는지 모르겠어요. 힘들어 죽겠구만."

 

내가 산 이름을 가르쳐 주자 멋진 풍경이라고 맞장구를 친 아주머니는 자신들을 기다려 주지 않고 올라가버린 다른 일행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내비친다.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뒤를 따르고 있는 지방 산악회원들을 염두에 두고 천천히 걸었다.

 

"우와! 저 앞의 바위절벽과 봉우리 좀 봐? 대단하구먼 대단해. 여기가 설악산이야? 운악산이야?"

 

중간의 봉우리를 지나자 맞은편에 천야만야 아슬아슬한 바위절벽들이 펼쳐진다. 앞장섰던 일행이 기막힌 절경에 감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병풍바위 절벽이었다.

 

"우리가 저 절벽을 올라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일행은 마주 보이는 절벽을 바라보며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어. 저길 좀 봐? 저 암벽을 사람들이 오르고 있잖아?"

 

정말 사람들이 오르고 있었다. 병풍바위 옆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암봉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사람의 발길을 전혀 허용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 바위봉우리에도 오를 수 있는 길은 있었던 것이다.

 

"자, 올라가자고…. 우리들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곳이니까? 저 사람들이 오르는데 우리라고 못 오르겠어?"

 

일행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얻은 듯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 운악산 등산시설을 참 잘해 놨구먼, 어려운 곳마다 쇠줄이며 발 받침까지 이렇게 잘해 놓은 산 아직 못 보았던 것 같아."

 

약간의 고소공포증과 바위절벽에 유난히 약했던 일행이 쇠줄을 붙잡고 암벽을 거뜬히 오른 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경기오악 중에서 으뜸 산은?

 

이곳에서부터 정상까지는 대부분 비슷한 모습의 바위길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어려운 길은 없었다. 쇠줄과 발 받침이 잘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설이 없었다면 굉장히 위험하고 힘든 길이었을 것이다.

 

"저 바위 봉우리도 정말 대단하고 멋있네 그려."

 

미륵바위였다. 위쪽 능선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미륵바위는 그 아슬아슬한 모습과 특이한 모양이 그 누구라도 감탄치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왼편 골짜기의 병풍바위들과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일행들은 특이한 경치나 바위를 볼 때면 빼놓지 않고 감탄을 한다. 그동안 산행을 하면서 등산의 묘미를 충분히 깨달아 알게 된 때문이리라.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느끼는 감수성이 그만큼 예민해진 것이다. 그야말로 요산요수(樂山樂水)하는 일행들의 모습이었다.

 

정상 가까이에 있는 바위봉우리에 오르자 바위사이에서 자란 도토리나무에 열린 도토리들이 익어가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엽다. 그 도토리 열매들 너머로 저 멀리 바라보이는 산들은 한북정맥이 힘차게 뻗어 내린 국망봉과 강씨봉이었다.

 

정상인 동봉에 오르자 앞장서 올랐던 지방산악회 회원들이 점심을 먹고 일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은 자기네 일행들 중 뒤처졌던 사람들이 저만큼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기다려주지 않고 현등사 쪽 하산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너무 하는구먼. 정상에서조차 기다려주지를 않네 그려. 자기네 일행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그냥 내려가다니 쯧쯧."

 

우리 일행들이 혀를 찬다. 뒤처져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는 모습 때문이었다.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냥 기다랗게 사각형 말뚝처럼 세워져 있는 것은 가평군에서 세운 것이었고, 최근에 새로 세운 듯한 말쑥한 모습에 "운악산 동봉 937,5미터"라고 새겨진 정상표지석은 포천군에서 세운 것이었다.

 

표지석을 중심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간식을 들려고 할 때 뒤처졌던 산악회 회원들이 올라왔다. 우리가 복분자술로 정상주를 한 잔씩 들고 간식을 먹을 때, 그들은 도시락을 꺼내 놓았다. 우리 간식과 그들의 음식을 조금씩 함께 나누어 먹으며 바라본 조망은 기막힌 절경이었다.

 

"저기 저쪽 좀 봐? 저 구름 아래 뾰족하게 솟은 산 말이야. 저 산 혹시 서울의 북한산 아닐까? 그 앞쪽의 조금 낮은 산은 도봉산이고."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아스라하게 바라보이는 산은 정말 북한산과 도봉산이었다. 그 북한산 위에는 멍석을 말아놓은 듯한 모양의 구름이 떠 있어서 더욱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동서남북 어느 쪽을 바라보아도 줄줄이 이어진 산맥과 골짜기들은 하나같이 곱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산하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 북쪽 멀리 화악산이 가물가물하고, 서쪽으로는 관모봉, 그리고 가까이 바라보이는 산은 축령산이었다.

 

"과연 경기오악 중의 으뜸이야, 으뜸!"

"맞아, 정말 경기오악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산인 것 같아."

"설악산에 오른 듯 착각할 정도의 병풍바위며 미륵바위, 이 멋진 조망까지, 경기오악 중에서 으뜸이라 해도 손색없는 멋진 산이야."

 

누군가 다시 한 번 감탄사를 터뜨리자 다른 사람들이 동조를 하고 나선다. 경기오악이라면 개성의 송악산과 저 북쪽 멀리 바라보이는 화악산, 파주의 감악산과 서울의 관악산, 그리고 바로 이 운악산을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송악산은 가볼 수 없었지만 다른 산들은 이미 한 번씩은 모두 올라봤으니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하산길은 현등사를 들러 내려가는 코스를 택했다. 조금 내려가다가 바라본 남근바위가 웃음을 자아낸다. 골짜기 길은 상당히 위험했다. 전날 밤에 비가 내려 물이 흐르는 곳이 많은데다가 물에 젖은 바위들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조심조심 내려가는 길에서는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비 때문에 수량이 풍부해진 골짜기는 곳곳에 작은 폭포가 만들어져 바위절벽을 타고 뛰어내리거나 미끄러져 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즈넉한 산사풍경과 가을남자

 

신라 법흥왕 때 인도의 승려 마라하미를 위하여 창건했다는 현등사는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절터가 비좁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운악산 자락에 안긴 절집은 극락전 뒤쪽의 노송들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고려 희종 때 폐허가 된 절터에서 석등의 불빛만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여 현등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절이다. 축대 아래 삼층탑에는 사람들이 던져 놓은 100원짜리와 10원짜리 동전 수십 개가 묘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극락전에 들어 삼배를 올리는 일행을 기다리며 경내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는 목재로 지어 기와를 올린 운악산방의 향긋한 차향이 나그네를 유혹한다. 산방에서는 젊은 여성 한 사람과 수녀 한 사람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108계단을 내려서자 골짜기 매끄러운 바위 위를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물살이 숲 사이로 흘러든 햇살에 비단자락을 펼쳐놓은 듯하다.

 

일주문 근처에 이르자 먼저 내려온 몇 명의 지방산악회 회원들이 서성인다. 뒤처진 일행들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기다릴 것을 왜 그렇게 빨리 내려와야 했을까? 그러나 뒤처진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주차장 근처에 이르자 서울로 직접 운행하는 좌석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길옆 개울가에는 곱게 핀 코스모스들이 초가을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예쁘고 애처로운 모습이다.

 

"이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을까?"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자세를 잡은 일행의 눈길이 골짜기 저쪽의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가을꽃 코스모스 때문이었을까?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어디선가 노래 한 소절이 들려올 것 같은 모습. 초로의 일행 모습 속에서 '가을남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운악산, #현등사, #미륵바위, #이승철, #가을남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