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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청준 선생의 작품을 즐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허영심이나 의무감으로도 읽은 적이 말 그대로 거의 없다. 내가 유일하게 구입한 선생의 책은 <서편제>(열림원, 1998)다.


그것도 영화 <서편제>를 보고 원작을 읽고 싶어 산 것이니, 이청준을 읽었다고 하기에는 멋쩍다. 수능세대에게는 수험 준비를 위한 필독서였던, 그 유명한 <당신들의 천국>도 읽은 적이 없다.


이런 내가, 더구나 이청준 선생 영정 앞에 조사가 가득한 마당에, 선생에 대해 한마디 더 한다는 건 군일일뿐더러 민망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겸연쩍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선생이 바로 <눈길>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눈길>은 내 눈물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작품이다.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인 고종석은 단편 <눈길>을 두고 "선생의 문학세계 변두리에 고명처럼 덧놓인 소품"이라고 말했다. 꼭 고종석의 말이 아니더라도 <눈길>이, 이청준 문학 본류에서 비켜난 작품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선생을 애도하는 글에서 이청준 문학의 빛깔을 "윤리적 상상력"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이니 그가 쓴 것치고 어느 하나 말랑말랑한 게 없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으레 골치 아픈 질문이 던져진다. 겹겹이 꼬여 있는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은 상큼한 해답이 아니라 더 정교해진 애초의 질문이다. 작가의 성질이 고약해서가 아니다. 난제難題와 대면해 이를 의제議題로 끌어올리려는 치열한 노력 때문이다."(신형철, '이청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시사IN>48호)

 

<눈길>의 슬픔, <서편제>의 한


이청준 문학의 다운타운에 자리 잡지 못한 작품일지라도, 난 여전히, 선생을 <눈길>의 작가로 떠올릴 것 같다. 어머니가 매정한 자식을 떠나보내고 돌아오던 하얀 눈길을 떠올리며, 그만 눈이 아릿해져 당황해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백색의 길에 먹먹해진 내 마음은 회오(悔悟)로 서걱댔다. 반 지하방 창문에 덧댄 새벽하늘은 어둑했고, 흐릿한 선으로 놓인 길은 아직 눅눅했다.


<눈길>에서 선생의 문장은 명징했다기 보다는, 미적거렸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서  '눈길'이  깔끔한 이미지보다는 투박한 정서로 매만져 지는 걸 보면 말이다.

 

실상 <눈길>은 어머니에 대한, 한국인의 고전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그것은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살아왔던, 집안의 불행이나 재앙을 자신의 부덕과 박복에 돌리던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운 그리움이다. 아내·며느리가 매개가 되서 모자가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선생은 그 정서의 원형을 코가 시큰하게 그려냈다.


<눈길>의 정서는 소설집 <서편제>에서 더욱 짙어진다. <서편제>에 수록된 작품들의  발치를 흐르는 것은 두터운 슬픔이고, 작중 인물들의 삶은 그로 인해 질퍽거린다. 하지만 그들은 운명에 맞서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편 <서편제>에 등장한 소리꾼의 의붓아들은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눈길>과 <서편제>는 한(恨) 또는 슬픔과의 화해를 통해, 뭇 독자들이 오랫동안 눈에 담을 만한 눈 시린 울림을 담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아마 선생이 지나 온 삶의 빛깔과 소리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글재주만으로는, 그러니까 삶의 우물이 아니고서는, 이런 그윽한 슬픔을 길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마음이 퍼석거릴 때마다 선생의 작품에 기대왔다. 부실한 독자인 내게, 선생은 더 없이 고마운 작가였다.


지난 7월말, 선생의 부고를 접했을 때 먹먹한 눈을 들어, 처음 <눈길>을 읽은 날처럼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둑했지만, 별은 총총했다. 선생은 그 어디에 계실 터였다. 늦었지만, 선생의 영면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눈길

이청준 지음, 문학과지성사(1997)


태그:#이청준, #눈길, #서편제, #슬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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