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칼을 받아라!" 서울 중경고 체육관에서 SFC 회원들이 펜싱 게임을 즐기고 있다

▲ "내 칼을 받아라!" 서울 중경고 체육관에서 SFC 회원들이 펜싱 게임을 즐기고 있다 ⓒ 김정욱


2008년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냐오챠오'에서 힘차게 타올랐던 성화도 이제 곧 꺼질 때가 가까워온다. 국민들은 경기 결과에 웃고 울며 선수들과 함께 탄성을 질렀다.

그 중 내 기억에 남았던 경기 중 하나는 바로 지난 11일에 열렸던 여자 펜싱 플뢰레 결승. 우리나라 남현희 선수는 154㎝의 단신에도 불구하고 펜싱 강국 이탈리아의 발렌티나 베찰리에게 맞서 접전 끝에 석패, 은메달을 땄다.

칼 하나로 서양 선수에게 당당히 맞서 자웅을 겨뤘던 남현희 선수를 보며 손에 땀이 배어나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경기 시상식 후, 남현희 선수는 키큰 서양 선수들 사이에서 은메달을 깨물며 포즈를 취했다.

지난 4년간 얼마나 훈련을 했을까. 남 선수를 보며 펜싱에 대해서는 '먼저 찌르는 선수가 1점' 정도의 초라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내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플뢰레'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경기를 보며 좋은 성적을 바랐다.

펜싱은 국내에서 찬밥 신세다. 비인기 종목으로 인지도도 낮을 뿐더러 '사회체육분야'에 속하지 않아 지원도 변변찮은 상황. 이런 환경에서 펜싱을 취미로 즐기는 이들이 궁금했다. 취재를 위해 찾은 중경고등학교에서 만난 SFC 회원들은 기자가 반가웠던지 취재 협조도 모자라 스텝을 가르치고 운동복까지 입혀 펜싱 칼을 쥐어주며 대련까지 기꺼이 해 줬다. 이들의 땀방울 하나하나는 펜싱을 향한 애정의 증거였다.

"펜싱이 좋아서 모였습니다" 서울펜싱클럽(SFC :Seoul Fencing Club) 회원들. 우측부터 회장 신승근, 이태호, 이창동, 송채근, 박상인, 성열웅 씨

▲ "펜싱이 좋아서 모였습니다" 서울펜싱클럽(SFC :Seoul Fencing Club) 회원들. 우측부터 회장 신승근, 이태호, 이창동, 송채근, 박상인, 성열웅 씨 ⓒ 김정욱


우아한 운동? 에어로빅보다 땀 나잖아

20일 저녁 8시, 어둠이 깔린 서울 중경고등학교의 체육관 2층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검은 마스크 하얀 도복의 '펜싱 검사'들의 열기가 뜨겁다. 조용한 가운데 '삐스트'라 불리는 세로 1.5m, 가로 12m의 펜싱 경기장 바닥과 운동화의 마찰 소리와 칼을 휘두를 때의 기합소리, 승·패를 알리는 종소리가 어우러져 묘한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이들은 매주 월·수·금·토요일에 모여 취미로 펜싱을 즐기는 펜싱동호회 '서울펜싱클럽(SFC, Seoul Fencing Club)'의 회원들. SFC를 포함한 전국 펜싱 동호인은 1000여 명 정도다.

"유럽 귀족들이나 부유층들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하는 운동 같아."
"왠지 럭셔리하고 섬세한 고급운동?"
"펜싱하려면 돈이 많이 들 것 같은데…."

주변인에게 '펜싱'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더니 이같은 대답이 나온다. 기자 자신도 그랬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직접 장비를 착용해 펜싱을 해본 결과, 감히 말하자면 '아니올시다'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하는 운동'이라고 하기엔 강도가 장난이 아니다.

SFC 회원 이태호씨는 "에어로빅 1시간 해서 흘릴 땀을 펜싱 3분으로 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펜싱의 기본자세인 기마 자세를 유지하면서 척추를 곧게 세우고 앞뒤로 상대방의 칼 끝을 피하며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효과로 몸매가 바로 서고 엉덩이 탄력이 좋아진다고 한다.

펜싱이 비용이 많이 드는 고급운동이라는 이미지는 펜싱이 17세기 유럽 상류사회에서 상류층들이 필히 익혀야 할 교양 중 하나로 취급됐던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됐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승근 SFC 회장은 "실제로 운동화와 체육복만 있으면 펜싱할 준비가 된 것"이라며 "장비 대여가 가능하기 때문에 교육 세번째부터 칼을 잡고, 한 달 정도 스텝을 연습하면 바로 게임까지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펜싱을 시작한 지 10개월째인 송재근(남·24)씨는 서양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기사의 검술 장면을 보고 칼을 잡게 됐다. 그는 펜싱을 "어렸을 때 친구와 했던 칼싸움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펜싱을 배우러 온 첫날 스텝 연습으로 3주 동안 다리에 알이 뱄다고 말하는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상당히 체력 소비가 많다"며 일반인들의 편견을 일축했다.

에페· 플뢰레·사브르…, 경기 보면서 헷갈리셨죠? 

 펜싱 장비들. 마스크, 칼 등을 포함해 운동복 상하의, 회색 전자감지복 등이 있다.

펜싱 장비들. 마스크, 칼 등을 포함해 운동복 상하의, 회색 전자감지복 등이 있다. ⓒ 김정욱



 우측 부터 에페, 플뢰레, 사브르 용 펜싱 칼의 모습이다. 사브르 용 칼만 잡는 방법이 다르다.

우측 부터 에페, 플뢰레, 사브르 용 펜싱 칼의 모습이다. 사브르 용 칼만 잡는 방법이 다르다. ⓒ 김정욱


 우측 부터 에페, 플뢰레, 사브르 용 펜싱 칼 끝의 모습. 사브르 용 칼을 제외하고 칼 끝에 버튼이 부착돼있다. 사브르 용 칼은 '찌르기'와 '베기'가 가능하다.

우측 부터 에페, 플뢰레, 사브르 용 펜싱 칼 끝의 모습. 사브르 용 칼을 제외하고 칼 끝에 버튼이 부착돼있다. 사브르 용 칼은 '찌르기'와 '베기'가 가능하다. ⓒ 김정욱


"어? 칼 잡는 방법이 다르네?" 펜싱 칼 잡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아셨는지? 위에서 첫번째, 두 번째는 에페와 플뢰레 용 칼로서 잡는 방법이 같으며, 권총을 잡듯이 움켜쥔다. 맨 아래 사브르 용 칼은 손잡이가 일자이므로 감싸쥐면 된다.

▲ "어? 칼 잡는 방법이 다르네?" 펜싱 칼 잡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아셨는지? 위에서 첫번째, 두 번째는 에페와 플뢰레 용 칼로서 잡는 방법이 같으며, 권총을 잡듯이 움켜쥔다. 맨 아래 사브르 용 칼은 손잡이가 일자이므로 감싸쥐면 된다. ⓒ 김정욱


펜싱의 기본 장비는 운동복·장갑·운동화·마스크·칼. 시중가는 칼 7~8만원, 마스크 10~12만원, 장갑 3만원 정도. 장비만 갖추면 추가비용이 들지 않는다.

마스크와 칼은 펜싱의 종목 세 가지에 따라 종류가 구분된다. 공격 범위와 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펜싱종목은 플뢰레·에페·사브르가 있다(펜싱에 사용되는 모든 용어는 불어를 사용한다).

에페와 플뢰레는 '찌르기'로만 공격할 수 있다. 지난 11일 베이징 올림픽 펜싱 은메달을 거머쥐었던 남현희 선수의 주종목이 플뢰레였다.

에페와 플뢰레용 칼 끝은 조그마한 버튼이 달려있고 500g이상 힘으로 상대방 몸을 찌르면, 이를 감지한 전기 감지기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

에페는 마스크와 장갑을 포함한 상체 전부가, 플뢰레는 얼굴·팔·다리를 제외한 몸통만이 유효 타겟이다.

사브르는 찌르기 외에 칼로 '베는' 동작까지 공격으로 인정돼, 상당히 공격적인 특성을 지닌다(칼의 모양과 잡는 방법이 플뢰레·에페와 다르다). 골반 위 상체 전부가 공격 범위에 포함된다.

"상대방 심리 읽는 것이 묘미"

신승근 SFC 회장은 "능글맞은 사람들이 '에페'를 잘한다"며 "굳이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아도 공격오는 상대방을 느긋이 기다리다 한 번 찔러주면 되니까"라며 웃음지었다.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이 커진다는 게 펜싱의 장점이라는 그는 "상대방의 심리를 읽는 게 상당한 묘미가 있다"며 펜싱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펜싱 선수 남현희의 메달 획득과 올림픽 열기로 펜싱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특히 여성들의 열기가 뜨겁다고 한다.

체육관에서 만난 여성 회원인 펜싱 2년차 김지영(24)씨는 "주변에서 펜싱한다고 하면 신기해 하지만, 살이 엄청 빠지는 운동"이라며 추천했다. 독일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녀는 동네마다 펜싱 클럽이 있었다며, 생각보다 부담 없고 장비도 간단한 운동이 펜싱이라고 밝혔다.

 SFC 회원 이태호씨. 개인펜싱연습실을 만들 정도로 펜싱에 대한 애정이 깊다

SFC 회원 이태호씨. 개인펜싱연습실을 만들 정도로 펜싱에 대한 애정이 깊다 ⓒ 김정욱


본업이 치과의사인 회원 이태호씨는 병원 한 켠에 'Dental FC'라는 전국 최초 펜싱 개인 연습실까지 마련해 펜싱을 즐기고 있다. 치과의사·위생사·기공사로 구성된 펜싱클럽을 만드는 것이 꿈인 그는 "대한펜싱협회에서 저변 확대를 위해 행정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펜싱이 엘리트 체육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이를 타파하고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회원들의 권유로 시험 삼아 마스크를 쓰고 칼을 잡으니, '이얏! 이얏!'하며 어설프게 나무 작대기를 칼처럼 휘둘렀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려울 게 하나 없었다. 생각대로 칼을 휘두르면 됐다.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내가 영화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칼이 상대방 몸에 닿으니 '땡' 하고 공격 성공 신호음이 울린다. 신기했다. 10분 정도 했을 뿐인데 온 몸에 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직접 해보니 특정 계층만 즐기는 고급 스포츠도 아니요, 많은 기술을 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에게 낯설고 잘 모른다는 이유로 펜싱에 거리를 뒀던 건 아니었을까. "어릴 적 칼싸움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 뿐"이라고 펜싱을 말하던 송씨의 말이 머리 속에 맴돈다.

괜히 멀게만 느껴졌던 펜싱. 체육복과 운동화만 있으면 된다. 한 달만 지나면 '검객'이 되어 삐스트 위를 장악할 수 있다. 자. 준비되셨습니까?

"엉 갸르드(En garde, 펜싱 시함 전에 주심이 선수에게 내리는 준비 명령)!"

덧붙이는 글 ☞ 펜싱을 배울 수 있는 곳
서울펜싱클럽 www.seoulfencing.com 아남펜싱클럽 www.anamfencing.pe.kr


김정욱 기자는 <오마이뉴스> 제 8기 인턴기자입니다.
펜싱 SFC 남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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