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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기차는 일찍 오거나 늦게 오기 일쑤라기에 일찍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나오기 전에 깰라(힌두어로 바나나)라시 한 잔으로 가볍게 아침을 때운 다음 뉴델리역으로 갔다. 역시나 여기저기서 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전광판을 보는데 타야할 기차번호가 안 나와 있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묻고 물어 간신히 타야 할 곳으로 갔다. 뉴델리 역은 엄청나게 크기에 조금 헤맸다.

 

아직 1시간이 남아 여유롭게 앉아 있는데 한 인도인이 말을 건다. 몸이 통통한 그는 '극진가라데'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리얼파이트(real fight)'라고 얘기하며 태권도도 좋은 무술이지만 실전에서는 극진가라데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K1같은 이종격투기에 나온 극진가라데 선수를 얘기하며 펀치 한 방으로 상대를 쓰러뜨렸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극진가라데는 최배달이라 불리는 최영의가 일본에 건너가서 만든 무술이라고 설명해줬다. 놀란 그는 오오야마(최영의 일본이름)와 황소 뿔을 손으로 깬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델리에서 태권도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해줬다. 기차가 올 시간이 되었고 그가 기다리는 삼촌이 올 시간이 되어 작별을 했다.

 

그런데 어느 여성 세 분이 우리 쪽으로 오더니 "한국인이시냐"고 묻더니 이상한 사람이 자꾸만 따라온다고 도와달라고 '한국말'로 요청했다. 의협심 강한 장(친구)은 바로 누구냐고 나섰고 주위를 둘러보니 따라오는 이상한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역에서부터 쫓아왔다고 한다. 인도는 차장이 이동 중에 표를 검사하기에 누구나 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따라서 복잡하고 어수선한 기차역은 소매치기들이 노리는 목이다.

 

'우연하게도' 그 세 분은 우리 자리 바로 앞자리였다. 그래서 같이 자리로 갔는데 인도인 부부 2쌍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미 앉아 있었다. 확인한 결과 그 표도 이상이 없었다. 한 기차에 같은 자리로 표가 2장 발매된 것이었다. 워낙 긴 노선에 잠깐 탔다 내리는 사람들도 많기에 그럴 수 있으려니 하고 껴앉았다. 다행히 다른 쪽에 자리가 나서 인도인들은 거기로 이동하였고 조금 넉넉하게 앉을 수 있었다.

 

그 세 분과 약간 어색하면서도 반갑게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들은 대학교 4학년이고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 인도를 왔고 아그라에서 바라나시를 갔다가 다시 고아로 간다고 한다. 취업 얘기가 나오면서 다들 한숨 반, 웃음 반을 섞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어학연수를 갔다 왔다고 했고 인턴경험도 있다고 한다. 마지막 방학에 취업준비로 불안할 텐데도 이렇게 인도 여행 선택한 걸 칭찬해줬다. 그러면서 짐이 왜 이리 많은지 물어봤더니 고아는 너무 비싸서 델리에서 한국에 가져갈 선물들을 많이 샀다고 했다. '여행자의 짐은 자신의 업'이라는 얘기를 하며 웃었다.

 

기차 창문으로 펼쳐지는 인도 농촌 풍경은 고적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작물들은 무럭무럭 푸른색으로 자라고 있었다. 잠깐 선 중간 역에서 라시를 팔기에 5잔을 사서 돌렸다. 그 친구들은 라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옆에서 혼자 헤드폰을 끼고 있는 백인 것도 사줄까 했으나 '오버'하는 거 같아 말았다. 혼자 묵묵히 음악을 듣는 백인이 왠지 외로워 보여 말을 걸었다. 그는 이탈리아인이고 이 기차를 타고 고아까지 간다고 했다. 하루가 더 걸린 거라고 한다. 수줍게 얘기하는 그는 로마에서 살았고 고아에 요리를 배우러 간다고 한다. 'AS로마' 얘기를 꺼냈더니 역시나 토티가 잘한다고 살짝 웃는다.

 

즐거운 여행되길 바란다고 인사를 나누고 아그라역에 내렸다. 기차가 늦게 왔기에 이미 2시, 배가 고팠다. 우리는 아그라에 오기 전에 추천을 받은 '조르바 더 부다' 식당에 간다고 얘기했고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어봤다. 그 세 친구는 밥을 먹자고 했다. 같이 택시를 타고 조르바 더 부다로 갔다. 조르바 더 부다는 라즈니쉬 신도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깔끔하고 고급인 채식 식당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명작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삶을 사는 조르바도 깨달은 부다로 여기기에 '조르바 더 부다'라고 식당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배고픈 나머지 이것저것 많이 시켜서 나눠먹고 후식까지 먹었다. 그 친구들은 자기들이 신세졌다고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베풀기 좋아하고 의리 있는 장은 안 된다고 했으나 뻔뻔하고 낯이 두꺼운 나는 그럼 잘 얻어먹겠다고, 대신 내일 타지마할에서 만나면 밥 사겠다고 했다.

 

그 친구들은 타지마할 근처가 아닌 시내 쪽에 있는 숙소를 잡기 위해 릭샤를 탔고 우리는 타지마할 근처에 숙소를 잡기 전, 내일 아즈메르로 가는 차편을 예약하러 다시 아그라역으로 갔다. 신성한 땅 푸쉬카르를 가려는데 한 번에 가는 차편이 없고 꼭 아즈메르를 거쳐 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생했다. 타지마할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보름달이 뜬 밤이란다. 하지만 인도 정부와 고고학회는 야간 개장 시, 여행객 통제 불능을 이유로 지금까지 타지마할 야간 개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달에 한 번 보름이 달이 뜨는 5일만 야간 개장을 하기로 했다. 마침 이번 주는 야간개장이 있는 주였다. 금요일엔 타지마할을 열지 않기에 내일 토요일에 타지마할을 봐야 한다. 야간 개장을 보고 일요일 아침에 아즈메르로 이동하면 참 좋겠는데 일요일 아침 차편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아그라 역을 나와 버스 차편을 알아봤는데도 밤차밖에 없단다. 9시간이나 걸리기에 더운 낮에는 운행을 안 한단다. 고민 끝에 '할 수 없지 뭐'하며 내일 밤에 출발해서 아침에 아즈메르에 도착하는 버스를 예약했다.

 

타지마할 근처 '타지 간즈'(동네 이름)로 이동하여 묵을 곳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보였다. '김치 있어요.' '김치국수 있어요.' 이런 간판이 많았다. 그리고 호객하는 사람들이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자주 물어봤다.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스라엘 여행자들이 많이 와서 이스라엘어를 하고 이스라엘 음식을 준비 했다는데, 불과 몇 년 사이 한국말이 대세가 됐다. 다행히 이야기를 나눠보면 한국 사람에 대한 인식은 좋았다. 옥상에 올라가서 타지마할을 바라본다. '흠, 하얗게 잘 만들었군.' 이정도 감흥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 여유롭게 라시를 시켜놓고 인도 햇살에 비친 아그라 풍경을 구경했다. 곳곳에 연을 날리는 인도 아이들이 있었다. 이곳 하늘은 델리보다 맑았다.

 

 

잠깐 쉬겠다는 장을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오른쪽 샛길로 가면 타지마할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70%가 힌두교, 20%가 이슬람교, 10% 정도가 시크교와 다른 종교라고 한다. 서로 다른 복장을 하고 있기에 구분이 금방 간다. 걸어가는 길에 이슬람 아이들이 열매를 주면서 힌두어로 여러 말을 했다. 내가 힌두어로 몇 마디를 했더니 신기해 하며 계속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걸었다.

 

타지마할 뒤로 흐르는 아무나 강과 뉘엿뉘엿 지고 있는 석양, 그리고 들어갈 수 없는 타지마할이 묘한 풍경을 이루었다. 이것저것 마구 떠내려가는 아무나 강에 초를 띄우는 사람들도 보였다.

 

다시 돌아왔는데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혼식이 한창이었다.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춤추고 축하하고 노래 부르고 흥겨운 분위기였다. 장도 소란에 나와 있었다. 같이 어울려 춤을 추려 했으나 조금 어색했다.

 

 

이번에는 타지마할 왼쪽 길을 산책했다. 낙타가 나타났다. 이렇게 클 줄이야. 가까이서 본 낙타는 괴물 같았다. 장도 놀란 눈치다. 내일 낙타를 타자고 하고 아무나 강으로 갔다. 거기서는 나무를 모아서 태우고 있었다. 그 안에 뭔가 있었는데 확인은 못했다. 진지하고 엄중한 분위기라, 화장을 하는 건지 물어보기도 뭐해서 옆에서 타오르는 불을 지켜봤다. 뜨거운 날씨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 옆에 있는데도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재들을 바라보며 내가 돌아갈 곳을 떠올려봤다.

 

다시 돌아와 옥상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데 아까 벌였던 결혼행사가 이어졌다. 다시 신부를 태운 말이 지나가고 뒤에 긴 행렬이 노래를 부르고 폭죽을 터뜨리고 춤을 췄다. 그걸 바라보며 행복한 결혼이 되기를 기도했다. 식당에서 일을 돕는 아이는 9살인데 영어를 무척 잘했다. 아이다운 순진한 눈빛에 예의를 갖춰 행동해 사랑스러웠다. 한 달에 800루피를 받는다는 아이는 어머니를 돕는다고 한다. 학교를 안 다니는 것은 안타까웠다. 이정도 명석함에 공부가 더해진다면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앞날은 알 수 없기에 총명한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도 좌충우돌하며 보냈다.

 


태그:#타즈마할, #아그라, #인도여행, #인도결혼식, #뉴델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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