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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에 대한 설렘과 은근한 흥분이 밤새 잠을 뒤척이게 했다. 그래서 깨어난 시간은 새벽 4시 40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내와 나는 거의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챙겨 놓은 여행가방과 준비물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아이들을 깨웠다. 통 호밀 식빵에 계란 프라이 하나씩을 곁들여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서 차에 오른 후 시계를 보니 6시 5분이다. 이제 출발이다.

흐릿한 날씨지만, 그러하기에 차분하고 시원한 느낌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약 2시간 남짓 달려 처음으로 도착한 서천 휴게소다. 아이들도 이번 여행에 대한 부푼 기대가 있어서 그랬는지 간밤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나 보다. 얼굴이 조금 푸석푸석한 것 같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 오도록 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서천휴게소
▲ 서천휴게소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서천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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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고속도로에 안개처럼, 어리광처럼, 난폭하지 않은 소심한 비가 내린다. 사실상 여름휴가의 절정인 이번 주말 남행길이 예상한 것보다는 덜 혼잡하고, 걱정했던 것보다는 휴가차량이 많지 않아 보인다. 한산하고 호젓하게 운행하는 느낌이 어쩐지 편안하고 부담스럽지 않다.

서천 휴게소를 출발한 지 약 1시간 반 만에 서해안 고속도로 남단의 마지막 휴게소인 함평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 광장 주차장에는 불과 4~5대 가량의 차량만 보일 뿐 한적한데, 광장의 하늘을 날고 있는 잠자리 떼는 무수히(?) 많게 광장을 지배하며 비행하고 있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쌍둥이 딸들이 코앞으로 날아오는 잠자리에 기겁을 한다.

예상보다 약 1시간 빠르게 목포에 도착했다. 육지와 도시의 냄새에 찌들고 길들여진 나의 후각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다가온다. 아내와 아이들도 짠 내가 난다며 이 곳 목포가 바다와 맞닿은 항구도시임을 중얼거리며 서로 확인한다. 유달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목포시내와 목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목포 유달산에서 관광해설 자원봉사를 하시는 할아버님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 유달산에서 만난 할아버님 목포 유달산에서 관광해설 자원봉사를 하시는 할아버님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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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노적봉’을 지나 ‘삼학도’가 바로 보이는 ‘대학루’에서 잠시 한 숨을 돌렸다. 자원봉사로 문화관광 해설을 하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님 한 분을 만났다. 임진왜란 당시 있었던 전란의 상황과, 남겨진 역사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루’를 거쳐 ‘유선각’에 올라 다시 좌우사방을 바라보니 역시 목포는 서남해안 최대의 항구도시답다. 오르는 산의 중턱에서 애절한 음색으로 흘러나오는 ‘목포의 눈물’노래를 귀로 만나고, 가수 ‘이란영 님’의 ‘노래비’를 눈으로 만났다.

“사~아공의 뱃~노~오래 가~물 거~어리면, 삼하~악 도~오 파도깊이 스며어~ 드느~은데...”
나는 노래비 옆에 서서 모처럼 구성지게 한 소절을 목청껏 따라 불렀다. 아내와 아이들은 웃음이 나는지 ‘호 호 호’ 웃는다.

목포 여객터미널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대불공단 앞을 달려 목포공항이 보이는 곳을 거침없이 지나쳤다. 해남, 진도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를 따라 국도인지, 지방도를 꽤나 달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멀리 진도대교의 높다란 교각이 흐릿한 하늘 아래로 눈에 들어온다.
섬과 육지를 잇는 진도대교가 있는 울돌목
▲ 울돌목의 진도대교 섬과 육지를 잇는 진도대교가 있는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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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보다 하늘이 개어서 조금 맑아졌다. 푸른 바다에 비취색 혹은 엷은 쪽빛의 하늘과, 하얀 구름과, 섬 초록빛이 고요함 속에 어우러져 그저 바라만 보아도 평화롭다. 바다와 섬 그리고 하늘과 바람. 이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도 어줍지 않은 건방과 자만의 어리석음에 빠진 미숙한 인간을 깨우치고 가르치는 모양이다.

우수영 전망대에 올라 울돌목(명량해협)을 말없이 한동안 침묵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고 싶었었다.

물살이 거칠게 얽히고 뒤엉키며, 넓다가 갑자기 좁아지는 물목에서 마치 솟구쳐 일어나는 말의 갈기처럼 격하게 그러나 은밀하게 흐르고 있다. 12척의 보잘 것 없는 전함으로 수백 척 왜구의 전함과 맞서 싸우기 전, 저 울돌목을 바라보며 이 나라 조선을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며 고뇌하던 충무공의 깊숙한 진심이 전율처럼 내게 강렬히 다가온다.

“이 곳이 장수로써 내가 죽어야 할 곳이로구나.”

그의 무장으로서의 순결함과 의연한 결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야릇한 감흥이 신비하게 내게 다가온다. 수백 척 왜구의 전함이 거칠고 빠른 울돌목의 물결과 쇠사슬에 얽히고 뒤엉켜 뒤집히고 부서지는 임란의 환영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이 곳에서 역사의 바다를 바라보며 오붓하게 앉아 우리 가족만의 평화로운 오찬을 들었다.

해남 ‘화산’으로 가는 지방도를 따라 우항리 공룡화석지 기념관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사우르스(?)의 거대한 모형이 실감나게 서서 우리를 노려보았다. 딸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기해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우항리 공룡박물관
 우항리 공룡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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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에 들어서서 시생대, 중생대, 고생대를 비롯한 오래 전 시기에 살았던 무시무시한 공룡의 화석과 뼛조각, 그리고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들어 놓은 실물크기의 ‘티라노싸우르스’를 보았다. 쥬라기 공원의 한 장면처럼 연출해 놓은 곳에서 공룡의 울음소리와 괴성이 놀랍도록 크게 울렸다.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괴성이었다. 잠시 후 기념관 밖으로 나와 실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어 보존되고 있는 또 다른 실물 전시관을 돌아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신기하고 놀라움에 빠져 잇따라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해남 땅 끝 전망대로 향하고 있다. 스쳐 지나가는 들판에 고구마 밭이 꽤나 많이 펼쳐 보인다. 도로 옆 길가 천막 농산물 판매소에도 ‘해남 황토 고구마’라고 쓰인 글씨가 눈에 띄게 자주 보이고, 또 실제로 쌓아놓고 판매하는 고구마도 많이 보인다. 굽이굽이 해안선을 따라, 도로를 따라 오후 늦을 무렵 드디어 땅 끝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전망대에 올라 남해를 조망하니 다도해가 거기 있었다.
▲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섬 전망대에 올라 남해를 조망하니 다도해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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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레일을 타고 올라온 ‘땅 끝 전망대’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사방주위를 바라보니 온통 바다이고, 섬이고, 하늘이다. 우리 국토 육지의 최남단 땅 끝에 지금 내가 서 있다. 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벅찬 가슴으로 서로를 부둥켜 바다와 섬과 하늘을 보며 지금 내가 감격스럽게 서 있다.

끝은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 국토의 남단 육지 끝은 북쪽 강토로 향하는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점이다. 토말(土末) 땅 끝에서 또 그렇게 하나의 교훈을 가슴에 소중히 담아본다.

해남 땅 끝 마을의 작은 포구에 대한 한 폭 수채화 같은 이미지가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달리는 차 안에서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며 마음을 붙잡는다.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자동차는 달리고 있다. 창문을 모두 열어 이 곳의 바다와 바람을 마음껏 충분하게 먹고 마셔 내 영혼의 고귀한 영양제로 삼고 싶다.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 위에 올라 수채화 같은 포구를 감상했다.
▲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포구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 위에 올라 수채화 같은 포구를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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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가, 붉은 노을,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 그 밖에 주옥같은 ‘이문세’의 노래들이 해안도로가 주변에 소박하게 피어난 꽃들(루드베키아, 해바라기 등)과 몸을 섞어 예쁜 스카프처럼 바람에 날리고 있다. 나와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다 같은 또래의 사춘기 아이들처럼, 누구랄 것 없이 감상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완도대교를 건너고 또 신지대교를 건너 오늘의 첫날밤을 설레이며 맞이할 ‘신지도’ 명사십리 바닷가(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해변에서 딸들이 놀고 있다.
▲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해변에서 딸들이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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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백사장 바로 옆에 우리 가족이 하룻밤을 편안히 쉬고 갈 ‘몽골텐트’ 하나를 빌렸다. 간단히 짐을 풀고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께 물어물어 횟집 한 군데를 골라 도착하니 ‘중앙 횟집’이란다. 모래밭의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활어 도미 한 마리를 재물로  해변의 저녁 파도소리를 무드음악 삼아 허공에 틀어놓고 우아하게 저녁 만찬을 나누었다.

육질이 부드러운 살코기 한 점을 큼지막한 깻잎과 상추에 싸서 입안에 넣어 씹으며 소주 한 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으니 오늘 하루 동안 장거리 운행으로 인한 강행군의 피로가 멀찌감치 도망가 버린다. 아~ 행복하다. 많이 행복하다.

우리 네 식구는 오붓하고 행복하게 서로의 몸을 따뜻한 이불처럼 삼아 다리도 얹고, 팔 베게도 해주었다. 우리는 밤새 바닷가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하룻밤 영양분을 넉넉히 보충했다. 촌뜨기처럼 순수한 신지도 명사십리의 맑은 하룻밤이 십전대보탕처럼 몸과 마음을 든든한 기운으로 채워주었던 모양이다.

간밤에는 젊고 싱싱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한여름 밤의 바다를 즐기려는 청춘들의 폭죽소리와 노랫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런 것들이 깊은 잠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것마저도 여름날 한 조각의 추억이려니 생각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와 함께 코펠에 밥을 했다. 우리 네 식구는 속 풀이용 라면을 얼큰하게 끓여 그럭저럭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다. 흐릿한 어제 저녁에 도착해서 바라본 남해의 바다와, 발목과 무릅을 적셔 반겨주었던 물결과 파도가 오늘 아침 그 느낌이 더 친근했다.

아침나절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햇살이 맑디맑은 명사십리를 거닐었다. 파도가 거칠지 않게 착한 물결로 발가락과 발목, 무릅과 허벅지를 마치 싱싱한 산낙지처럼 차례대로 감싸 적셔준다. 아내와 아이들은 즐거움에, 순간의 놀라움에 괴성을 지르며 호~호~거렸다.

저~ 멀리 이름모를 섬들이 보인다. 내가 지금 서있는 모래밭의 한 점을 기준으로 좌에서 우로 커다란 부챗살처럼 바다가 있고, 그 바다 곳곳에 크고 작은 섬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그림처럼 앉아 있다. 조개껍질을 주워서 모래밭에 우리 네 식구 각자의 얼굴모습을 그려보고 장식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바라보며 깔깔거리고, ‘큭큭’거리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면들을 가슴 속에 영상으로 담았다.

모래밭에 조개껍질을 주워 아빠와 딸을 그렸다.
▲ 아빠와 딸 모래밭에 조개껍질을 주워 아빠와 딸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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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우리는 아쉬움을 명사십리 곱디고운 모래사장에 내려놓고 다시 출발했다. 신지대교를 지나서 완도의 청해진유적 조각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서 바로 앞에 바라다 보이는 ‘장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때마침 완도에서 장도로 가는 낮은 물목에 물이 빠져있었다. 우리는 조그만 게들이 빠르고 앙증맞게 꼼지락거리며 재빠르게 움직이다 숨는 거친 갯벌 사이를 걸어서 장도에 들어섰다. 오래 전 서남해안의 바다를 제압하고, 상권을 장악했던 ‘장보고’의 숨결이 넌지시 느껴지는 듯 했다.

작은 섬 ‘장도’의 둘레를 태뫼식 토성으로 축성하고, 그 성안에 상단과 군영을 구축하여 이끌었던 천혜의 요새 바로 그런 섬이다. 토성의 문루(누각)를 따라 오르니 사람의 흔적이 다행히도 아직 많지 않았다. 오르는 길 중간쯤에 펼쳐진 아직 여물지 않은 초록의 억새밭이 마치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청산도의 아름다운 길, 그곳의 한 장면처럼 겹쳐져 눈과 마음을 멍하게 멈추게 했다.

마치 청산도의 푸른 보리밭을 연상케하는 장도의 풀밭길
▲ 장도 마치 청산도의 푸른 보리밭을 연상케하는 장도의 풀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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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정상에 있는 누각에 올라 좌우사방을 고즈넉하게 바라보았다. 어제와 다른 햇빛 쨍쨍한 날임에도 상쾌하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가슴속에 쌓인 생활의 먼지를 털어주니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장거리 원행으로 자동차의 발굽(타이어)이 지친 듯하여 강진으로 향하는 해남의 이름 모르는  마을 네거리 자동차 공업사에 들렀다. 탱탱하게 에어를 충전하고서 잠시 만난 인연이지만 공업사 사장님과 짧은 정담을 나누었다. 그리곤 약 30여분 만에 다산기념관 주차장에 도착하여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호젓한 나무 숲길을 따라 걸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이 의외로 가파르고 힘겨웠는지 아내는 거푸 “어이구~ 어이구~” 소리를 내며 내 꽁무니를 따라 간신히 도착하여 초당의 ‘서암’ 툇마루에 털썩 쓰러진다. 단청 없이 소박하게 지어져 깊숙한 나무그늘 속에 묻혀 남향으로 앉아있는 고고한 초당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약용 선생의 기품과 인격의 향기가 초당 마룻방 안에서 한 점 다완에 담겨진 녹차의 향속에 녹아들어 계곡을 취하게 하는 듯 했다.

다산초당 툇마루에 딸들과 앉아 휴식을 취했다.
 다산초당 툇마루에 딸들과 앉아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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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에서 약수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초당의 마루에 걸터앉아서 산을 오르느라 목과 등에 벤 끈적끈적한 땀을 식히고 말렸다. 그러면서 다산 선생의 18년간의 유배생활과 10년 동안 이곳 초당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며 생각을 더듬거려 보았다.

큰딸과 아내를 초당의 ‘서암’ 툇마루에 쉬게 한 채, 막내딸 아이와 나는 초당의 동암인 ‘보정산방’도 둘러보고 마루에 누워보기도 했다. 보정산방을 조금 지난 동쪽에 자리 잡은 ‘천일각’에도 올라 멀리 내다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곳이 다산 선생께서 평소 명상과 관조를 즐기셨던 혼자만의 고독한 유희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영락없는 그런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점심때가 가까이 다가오니 배도 고프고 아이들과 아내가 많이 지친 듯 했다. 아이들은 차 안에서 누워 곯아떨어지고, 아내는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자동차를 서둘러 몰아 보성의 녹차 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성 봇재다원 차밭을 배경으로 가족사진 한 장을 남겼다.
▲ 보성 녹차밭을 배경으로 보성 봇재다원 차밭을 배경으로 가족사진 한 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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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에서(여름향기) 소개되어 아름다운 영상의 그림으로 기억되고 있는 낭만적인 녹차 밭의 풍경이 혹시 실망스럽진 않을까, 지레 걱정을 해보기도 했다. 왜냐하면, 연출된 영상의 프레임 속의 풍경과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차밭(차밭은 거의가 산이다.)의 풍경은 사뭇 다른 느낌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봇재 고개’에 도착했다. 그 곳에 있는 ‘봇재 다원’의 절벽 앞에서 뒤 편 차밭을 배경삼아 한 장의 뻘쭘한(?) 가족사진을 남겼다.(자다 일어나 느닷없이 사진을 찍게 되었다)

“더위와 피곤과 허기에 지친 세 여인네를 어서 빨리 달래주어야 할 텐데...”

녹차냉면, 녹차 비빔밥으로 우선 점심을 해결하고, 녹차찐빵,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후식을 마무리 했다. 그제 서야 세 여인네는 기운을 차렸는지 표정도 목소리도 맹랑해졌다.

이제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를 향해 자동차는 달린다. 벌교 홍교, 소화다리, 이정표를 보니 소설속의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아른거리며 등장하여 가슴속에 품어왔던 감동의 기억을 더듬어 주고 있다. 무당의 딸 소화, 그의 남자 정하섭, 김범우, 염상진 대장, 염상구, 하대치와 강동기, 외서 댁, 기타 등등...

얼마쯤 가다보니 ‘조정래 길’이라고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우리나라 대하 역사소설의 큰 거인 조정래 선생님이 푯말에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시는 듯 했다. 벌교를 스쳐지나 순천의 ‘낙안읍성’에 도착했다. 용인 민속촌과는 달리 108세대의 가구가 실제로 거주하여 생활하고 있는 어찌 보면 ‘낙원읍성’이라 이름을 바꿔 불러야 할 정도로 마치 낙원 같은 느낌의 아늑한 분지평원 마을이었다.

낙안읍성에서 수문장으로 근무하는 공익근무요원과 딸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 낙안읍성 수문장 낙안읍성에서 수문장으로 근무하는 공익근무요원과 딸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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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의 남문(정문) 입구에서 마침 수문장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쌍둥이 딸이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읍성으로 들어서니 오른쪽에 ‘낙안읍성 작은 도서관’이란 나무 푯말이 보여 아이들과 함께 들어가 보았다.

조그만 초가집 안에 아이들만의 즐겁고 행복한 공간인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처마 밑에는 제비집도 있고, 아직 어린 새끼 제비들도 몇 마리가 있었다. 해설사 선생님의 말로는 정확히 5분 간격으로 한 번씩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준다고 한단다. 우리는 읍성 안쪽을 두루두루 걸어서 돌아보았다. 옛 동헌 건물도, 임경업 장군의 사당도, 그네 타는 터와 북을 치는 누각, 그리고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장승과 돌조각이 서있는 마을을 돌아 나오니 시계는 어느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순천 송광사로 넘어가는 고개는 제법 굽이굽이 경사진 언덕이었다. 잡초같이 질긴 삶을 산 어머니, 며느리, 그리고 여자로서의 고달프지만, 끈질긴 삶을 보여준 소설 태백산맥의 ‘외서댁’이 연상되는 외서면의 산길을 자동차는 겨우겨우 용을 써 넘어갔다. 얼마를 지나니 왼편에 푸른 물빛으로 ‘주암호’가 나타났다. 그런 다음 얼마 후에 우리나라 3보 사찰의 하나인 대찰 ‘송광사’ 앞에 도착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늘 사용할 양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한 것인지,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시원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송광사 입구 계곡에 세 여인네를 내려놓고 나는 홀로이 매표소를 지나고, 고색으로 물든 일주문을 지나 여러 개의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누각(?)을 지나 금강문에 도착하였다.

금강문에는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잡귀를 밟아 죽일 듯한 무시무시한 표정의 금강역사가 잡귀의 범접을 막으며 보초를 서고 계셨다. 금강문을 지나 ‘종고루’의 아래를 슬그머니 지나쳐 ‘대웅보전’이 있는 대법당의 마당에 들어서니, 순간적으로 아~~ 나도 몰래 소리 없는 탄성이 절로 목구멍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의 자태
▲ 송광사 대웅보전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의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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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겹 팔작지붕의 웅장하고 자비로운 자태가 그 모습만으로도 건방지고 미숙한 중생의 머리를 꼼짝없이 겸손히 조아리게 만들었다. 귀퉁이 추녀 끝의 날개선이 엄청난 공포와 부재로 웅장하다 못해 경외스러웠다.

송광사 절간의 화장실 ‘해우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해우소로 들어가는 곳에 발을 디뎌 오르니 난간 아래에는 연꽃과 올챙이 밥, 부레옥잠 등이 가득했다. 나무계단 한 칸을 올라서니 중앙에 경계를 이루는 하나의 기둥이 서 있었고, 얼핏 보니 정중앙에 ‘묵언’이라는 글씨가 엄숙한 느낌으로 써 있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남자들이 볼일 보는 곳이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여자들이 볼일을 보는 곳으로, 그야말로 육신의 찌꺼기와 마음의 근심을 해소하는 엄숙하고 경건한 규율이 있는 '해우소' 도량의 공간이었다.

해우소는 모든 욕망의 찌꺼기를 겸허하게 버리는 도량의 공간이었다.
▲ 송광사 해우소 해우소는 모든 욕망의 찌꺼기를 겸허하게 버리는 도량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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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찌꺼기를 겸허하게 버리는 곳 ‘해우소’에서 그간의 모든 허울과 욕심을 버리고 싶었다.  볼 일을 보고 해우소 문밖으로 나서는데 몸과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참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송광사 경내를 두루두루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 길가 옆으로 흐르는 맑은 물빛과 소리의 흐름이 내 피곤한 육체를 물리치료사처럼 다독여 치료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아내와 딸들을 자동차에 싣고 집으로 출발하기 위해 송광사 경내를 천천히 나섰다. 그리고는 이번 가족여행의 여정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짧았던 1박2일 간의 이 번 남도여행이 나와 내 가족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해맑은 하늘, 새파란 바다, 작은 섬, 하얀 모래밭, 초록의 녹차 밭, 그늘진 초당의 숲, 발밑에 밟히는 흙, 대사찰의 엄숙함과 경외함, 문학에 대한 상상, 역사에 대한 배움, 가족의 사랑 등 그 밖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약재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매우 귀중한 보약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9일~10일 다녀온 가족여행기 입니다.



태그:#남도, #신지도, #명사십리, #땅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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