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식어버리는 핸드볼 경기에 대한 짧은 관심을 꼬집는 말로 '한데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를 더욱 또렷하게 각인시킨 주인공들은 상대적으로 놀라운 성적을 꾸준히 기록했던 여자핸드볼 선수들이었다.

 

이런 우리 여자 선수들 앞에는 항상 덴마크가 버티고 있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결승전부터 맺은 불편한 인연은 임순례 감독의 영화 <우생순>으로도 널리 알려진 2004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까지 이어져, 우리 팬들의 기억 속에 '지긋지긋한 맞수'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우리를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덴마크 여자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는 못 나왔다. 유럽 예선에서 미끄러지는 이변이 벌어진 것. 임영철 감독을 비롯하여 오성옥, 오영란, 허순영, 문필희 등 핵심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시원스럽게 되갚아 줄 기회를 노렸지만 허공을 쳐다보며 쓰라린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바로 그 상대들은 아니지만 남자 선수들이 두 번째 경기에서 덴마크 남자들을 만나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그 주역은 스물셋 동갑내기 새내기들(센터백 정수영, 레프트윙 고경수)이었다. 그야말로 누나들이 품고 있는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준 것이라고 하겠다.

 

김태훈 감독이 이끌고 있는 우리 남자핸드볼대표팀은 12일 밤 베이징 올림픽스포츠센터 체육관에서 벌어진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핸드볼 B그룹 두 번째 경기에서 덴마크를 맞아 31-30(전반 13-14)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귀중한 승점을 얻어냈다. 종료 14초를 남기고 감동의 드라마가 또 한 번 만들어졌다.

 

종료 3초 전 터진 새내기 정수영의 슛

 

 남자 핸드볼 새내기 정수영.

남자 핸드볼 새내기 정수영. ⓒ 베이징올림픽공식홈페이지

우리 선수들은 독일과의 첫 경기와 마찬가지로 상대 문지기 운이 따르지 않았다.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개최지 독일) 3위와 2008년 유럽선수권대회(개최지 노르웨이) 챔피언의 위용을 자랑하는 덴마크에는 서른 두 살 먹은 노련한 문지기 비트 카스퍼가 있었다. 이틀 전 열린 첫 경기에서도 204cm의 거구 요하네스 비터가 지키고 있는 독일의 골문이 너무나 좁아 보였지만 덴마크와의 이 경기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독일 문지기 비터와 이름도 비슷한 덴마크 문지기 비트는 윤경신, 조치효, 정수영, 백원철 등 우리 선수들이 던진 44개의 슛 중에서 스무 개나 막아내는 놀라운 방어율(45%)을 자랑하며 초반 경기의 흐름을 덴마크 쪽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우리 팀에는 동갑내기 막내들이 쌍두마차처럼 전반전과 후반전을 사이 좋게 나눠 이끌어주었다. 전반전은 왼쪽 날개 고경수(23살·하나은행)가 혼자서 다섯 골을 터뜨리며 펄펄 날았고 후반전은 센터백 정수영(23살·HC 경남코로사)이 종료 3초를 남기고 짜릿한 결승골을 떠뜨리며 감격적인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이 동갑내기 두 선수는 공교롭게도 소속팀에서 뛰는 자리와 맞바꾸어 활약을 펼쳐 팬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왼쪽 날개로 주로 활약한 고경수는 11분과 15분 두 차례에 걸쳐 유럽 선수들의 높은 벽을 허무는 스카이 슛을 두 개나 성공시키는 대담함을 자랑했다. 특히, 점수판을 9-9로 만들어놓은 언더 스핀 슛은 아무나 따라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다.

 

후반전에는 센터백으로 뛴 두 선수(백원철, 정수영)의 고른 활약이 돋보였다. 백원철은 특유의 스텝슛으로 상대 문지기의 혼을 쏙 빼놓았고 정수영은 이름과 플레이 스타일이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장점을 앞세워 과감한 중거리슛으로 승부를 걸었다.

 

특히, 190cm가 훌쩍 넘는 피벗 플레이어나 센터백들이 즐비한 수비벽을 앞에 두고 정수영이 솟구쳐 던져넣는 장면은 한 마디로 예술 작품이 따로 없다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웠다. 탄력 넘치는 몸놀림에서 뿜어나오는 날카로움은 아무리 노련한 문지기 비트가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었다.

 

김태훈 감독, '14초'에 승부를 걸다!

 

 후반에 뛰어난 활약을 보인 남자 핸드볼 백원철

후반에 뛰어난 활약을 보인 남자 핸드볼 백원철 ⓒ 대한핸드볼협회

점수 30-30 상황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명승부 장면이 연출되었다. 30초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위기를 맞은 것은 우리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팀에도 유럽 팀(스위스 오트마)에서 활약하고 있는 문지기 한경태가 있었다. 한경태가 왼쪽 다리로 막아낸 공은 왼쪽 줄기를 따라 빠른 역습으로 이어지고 있었기에 극적인 결승골이 당연히 우리의 것이었다. 그 순간 심판의 휘슬이 길게 울렸다.

 

휘슬만 울린 것이 아니라 심판이 덴마크 골문 코 앞까지 다다른 우리 선수를 아예 막아서고 있었다. 이 순간을 생생하게 중계방송 하고 있던 임오경(서울시청 감독) MBC-TV 해설위원은 덴마크와의 슬픈 인연을 떠올리며 고의적인 오심이 아닌가 하는 외마디 소리까지 질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팀을 이끌고 있는 김태훈 감독이 요청한 작전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김태훈 감독은 마지막 14초를 남기고 승부수를 띄웠다. 빠른 공격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는 순간에 리듬이 끊긴 몇몇 선수들도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내려진 작전 지시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것이었다. 김태훈 감독은 가장 경험이 풍부하다고 할 수 있는 윤경신에게 "(정)수영이가 던지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며 의견을 물었다. 결국 감독의 신중한 이 한 마디는 팬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만한 명승부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했다.

 

바로 직전까지 후반전에만 여덟 골을 터뜨리며 가장 빼어난 활약을 펼친 왼손잡이 센터백 정수영은 경기 종료 3초 정도를 남겨놓고 정면에서 솟구쳐 올라 과감하게 공을 던졌고 두 명의 수비벽을 뚫고 내리꽂힌 공은 철벽같은 문지기 비트의 오른쪽 다리를 지나 그물을 흔들고 말았다.

 

아직까지 팀 전체가 세대 교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핸드볼 대표의 형편이기는 하지만 여자 대표팀의 떠오르는 센터백 김온아와 함께 남자 대표팀의 정수영, 고경수가 중심에 서서 조금씩 우리 핸드볼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기에 그 승리 소식이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글 | ※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핸드볼 B그룹 경기 결과, 12일 베이징 올림픽스포츠센터

★ 한국 31-30(전반전 13-14) 덴마크

◎ 한국 선수들 득점 / 선방 기록
정수영 9득점, 박중규 2득점, 조치효 2득점, 이태영 1득점, 이재우 3득점, 백원철 6득점, 고경수 6득점, 윤경민 2득점
문지기 한경태 슛 30개 중 선방 8개(27%), 강일구 슛 10개 중 선방 2개(20%)

2008.08.13 10:33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핸드볼 B그룹 경기 결과, 12일 베이징 올림픽스포츠센터

★ 한국 31-30(전반전 13-14) 덴마크

◎ 한국 선수들 득점 / 선방 기록
정수영 9득점, 박중규 2득점, 조치효 2득점, 이태영 1득점, 이재우 3득점, 백원철 6득점, 고경수 6득점, 윤경민 2득점
문지기 한경태 슛 30개 중 선방 8개(27%), 강일구 슛 10개 중 선방 2개(20%)
정수영 고경수 남자핸드볼 베이징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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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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