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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카피 같은 추천의 말을 남겼다.

 

1976년 발행된 이래 2008년 4월까지 3판 159쇄를 거듭한 책이다. 가히 불교수필계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읽고 보니 굳이 불교수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무소유를 생활철학으로 산 한 인간의 진한 ‘구도의 글’이라고 함이 옳다.

 

법정이 불교계의 거승이다 보니 크리스천인 나로서는 거부적 선입견이 없지 않았다. 하긴 그래서 이제야 이 책을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일부내용을 제외하면 그것은 그저 옹졸한 종교적 알레르기였을 뿐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장 15절)

 

이 책이 관통하고 있는 ‘무소유’는 성경의 가르침과 닿아있다. 2000년전 예수나 30년전 법정이 다르지 않다. 지금을 가고 있는 목사인 내가 품고 있는 삶에의 가치와 이미 간 법정이 산 방법과도 다르지 않다. 갓 볶아낸 커피에서 숭늉의 냄새를 맡듯, 법정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에서 내가 가고 있는 길에서 맡는 삶의 채취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설명되지 않을 불가사의는 아닌 듯하다.

 

그가 간 길을 갈 수만 있다면

 

하루는 법정이 기거하는 산사에 도둑이 들어 탁상시계를 훔쳐간 사건이 있었는데, 도둑은 공교롭게도 자기가 필요로 하던 물건만 가져갔더란다. 그때를 회상한 ‘탁상시계 이야기’라는 글의 일부는 이렇다.

 

“내게 소용되는 것이 그에게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남긴 것이 더 많았다. 내게 잃어버릴 물건이 있다는 것이, 남들이 보고 탐낼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남의 것을 훔친 그 과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빚이라도 갚고 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다.”(46쪽)

 

불교의 윤회사상을 자신의 삶에 적절히 배합하고 사색하고 난 후 결론은 ‘홀가분함’이다. 이 얼마나 희망차고 행복한 일이냐. 도둑을 맞고도 이리 행복할 수 있다면 진짜 인생이요, 삶이 아니겠는가. 근데 목사인 나는 그렇지를 못하니 그게 문제다.

 

20여 년전 시골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들어오니 창문은 뜯겨있고 옷가지들로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의 황당함을 잊을 수 없다. 잃은 것이 얼마나 아까운지 경찰지소에 신고까지 했었다. 물론 도둑은 경찰도 어쩔 수 없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화가 치밀고 대한민국의 민중 지팡이 경찰은 뭐하고 있는 거냐고 생떼를 썼었으니. 그뿐인가. 데모 막으러 나가는 데는 빠르고 민생은 안중에도 없는 거냐는 식이었다. 원 이래가지고야 스님 발자국이라도 밟겠는가. 그림자라도 따르겠는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장 21절)

 

이런 무소유의 개념은 이미 성경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수라는 사나이가 그렇게 살다 갔다. 법정은 그의 스승 붓다가 그리했다고 하겠지만, 나는 나의 스승 예수가 그리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근데 문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법정은 그리 살다 간 것 같은데 난 아직 그리 살지 못하니.

 

법정은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스님에게 난초 두 분을 선물 받았는데 햇볕에 내놓았더니 시들더란다. 자꾸 난초에 신경을 쓰는 것이 물욕인 듯하여 다른 이에게 주고 나니 홀가분하더란다. 그는 집착이 다름 아닌 욕심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무엇인가 하고자 집착하는 일조차 욕심이란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그렇게 동의가 안 되는 것은 왜일까. 그가 산에서 살았고 내가 마을에서 살아서 그런가 보다. 대부분의 사회적 삶은 ‘열심, 성실, 집중’을 가르친다. 난초를 살리고자 노력하는 것이 집착인가, 아니면 생명에의 외경심인가. 그 난초를 받아간 사람도 법정 같다면 그 난초의 운명은 어찌 될까.

 

‘집착과 사랑, 집착과 집중’에의 혼돈이 낳은 ‘무개념 무소유’에의 유추란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부여된 사명이 아닐까. 특히 불교인에게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라 자위하며 글 속에서 그가 간 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따르려니, ‘잘산다는 게 무엇인가’하는 나와 같은 목표치에 이른다.

 

'잘 산다'는 말처럼 오해받는 말도 없다

 

‘아무개는 참 잘살아’라고 말할 때 당신은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풍부하게 산다는 말로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잘산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무엇인가 가지고 있으므로 누리고 사는 게 잘사는 것이라면 너무 허무하다. 법정 같은 이는 결코 잘산 이가 아닐 터이니.

 

그런데 아무리 봐도 법정은 잘살다 간 스님 같다. 그럼 여기서 우린 잘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 법정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 흙탕길을 걸으면서 문득 생각이 피어올랐다. 잘산다는 것은 결코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중략) 흙과 평면 공간, 이것을 등지고 인간이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43, 44쪽)

 

전적으로 동감한다. ‘잘산다는 것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는 말이다. 그 가치는 적어도 흔들리고 자신의 주의주장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법정은 평면과 흙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요, 흙과 함께 사는 게 잘사는 것이다.

 

“자기 목숨의 심지가 얼마쯤 남았는지는 무관심하면서, 눈에 보이는 숫자에만 매달려 살고 있다”(111쪽)는 말도 괘를 같이 하는 말이다. 흙은 우리 고향이다. 고향을 알고 사는 게 잘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법정 스님이 간 길과 지금 목사인 내가 가는 길이 이리 닮았을 수가 없다.

 

고층건물을 세우고 유비쿼터스가 세상을 지배하면 편리성은 뛰어나다. 그러나 잘사는 것은 그게 아님을 잊으면 안 된다. 흙으로 유비되는 본래의 인간성을 잃는다면 인간은 결코 잘살 수 없다.

 

좀 아쉽다면

 

<무소유>의 차례

1. 복원 불국사

2. 나의 취미는

3. 비독서지절

4. 가을은

5. 무소유

6. 너무 일찍 나왔군

7. 오해

8. 설해목

9. 아파트와 도서관

10. 종점에서 조명을

11. 흙과 평면 공간

12. 탁상 시계 이야기

13. 동서의 시력

14. 회심기

15. 조조할인

16. 나그네 길에서

17. 그 여름에 읽은 책

18. 잊을 수 없는 사람

19. 미리 쓰는 유서

20. 인형과 인간

21. 녹은 그 쇠를 먹는다

22. 영원한 산

23. 침묵의 의미

24. 순수한 모순

25. 영혼의 모음

26. 신시 서울

27. 본래무일물

28. 아직도 우리에겐

29. 상면

30. 살아남은 자

31. 아름다움

32. 진리는 하나인데

33. 소음기행

34. 나의 애송시

35. 불교의 평화관

‘무소유’란 책의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불소유’와는 다르다. ‘소유하지 않음’과 ‘소유할 수 없음’ 중 무엇이 가치일까. ‘소유할 수 없음’은 그리 대단한 가치가 아니다. 그러나 ‘소유하지 않음’은 그 가치가 높다. 아마 법정은 그를 말함일 게다.

 

먼저, 법정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신에 안 차니 사람까지 소유하려드는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간디가 말했듯, ‘소유자체가 범죄’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을 만들 수 있는 정신세계는 소유했지 않았는가. 물질의 소유가 범죄라는 말을 하려다 정신과 영혼의 세계까지 무소유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둘째로,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는 브라만교의 <리그베다>를 인용하여, 기독교 진리와 불교의 진리가 하나(목적이 같음)라고 말한다. 그러니 속 좁게 자기 것만 진리라고 하지 말고 다른 길을 인정하라고 한다.

 

<리그베다> 자체가 불교와 통하는 브라만의 진리일 뿐이다. 그걸 들어 ‘진리는 같다’는 말을 유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시 가는 목사가 이 부분에서는 간 스님의 길을 따를 수 없다. 진리라는 말만 자기식대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책 내용 모두는 따를 수 있다.

 

셋째로, 한 책에서 논리의 배치를 만나게 된다. ‘오해는 마음의 문을 열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형제가 될 수 있다’(143쪽 요약)고 하며 기독교를 초청한다. 그러면서 법정은 여전히 이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랑도 오해, 미움도 오해, 모두가 오해이니 감언이설에 속지 말라고 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는 곧 오해의 발판이다.”(31, 32쪽)

 

마지막으로, 역시 설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지긋지긋한 설교(설법)에 넋 나간 독자는 이런 설법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느 독자의 글이 마음에 밟힌다.

 

“이 책에는 아쉽게도 시대를 초월한 참신한 관점은 없고, 가르치려고 하는 설교가 있을 뿐이다.”(알라딘 ugha)

 

나도 이에 동감한다.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 이웃과 화목하라’는 메시지는 분명한데 안타깝게 그게 텍스트라는 것이다. 지독한 번민과 인간적 고뇌를 위한 콘텍스트는 독자의 몫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원론적 메시지에서 끝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덧붙이는 글 | <무소유> 법정 지음, 범우사, 159쪽, 6000원

이 기사는 http://blog.godpeople.com/kimh2, http://blog.daum.net/kimh2 에도 실렸습니다. 


소설 무소유 - 법정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열림원(2011)


태그:#무소유, #법정,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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