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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강의를 들으면서 두 가지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첫 번째는 그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갖는 예리함이었고, 두 번째는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다운 그의 정서였다. 그래도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고 자처하면서도 그저 막연히 알고 있던 사건과 사실을 수치와 날짜까지 정확하게 집어내며 들려줄 때는 부끄러움에 슬며시 고개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의 전공은 한국고대사지만 그는 동아시아의 판도를 꿰뚫고 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굴절된 현대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소름이 돋았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박노자의 인터넷 일기를 모아 엮은 책이다. 서두에서 그는 공개일기를 쓴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국내외의 상황이 그렇다보니 이 인터넷 일기도 비판적 냄새가 사뭇난다. 붓 즉 그때그때의 생각을 따라잡느라 절로 내면속의 슬픔 단상을 적게 되었고, 당장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 대한 마음, 무거운 본뇌, 번민들이 많이 들어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관은 절망과 다르고, 번뇌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피게 돼 있고, 번뇌가 깊어지면 갑자기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기는 개인 나를 넘어 나와 너가 모인 우리를 넘어 국가와 국가라는 경계까지 넘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가 느낀 ‘타자’로서의 타향살이의 불안은 더 이상 이방인이 느낀 불안이 아니라, 미래가 불확실한 현대인 모두가 느끼는 일상의 불안이기도 하다. 그는 일기에서 '타자'로서 갖는 불안감을 또 이렇게 적고 있다.

 

"‘타자’로서 산다는 건 그만큼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이고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비 유럽계 이민의 역사가 길지 않은 독일 같은 곳에서 사는 분들 역시 이런 문제와 아프게 맞닥트리지 않겠는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살면 그만 아니냐고 물어 볼 수도 있다. 글쎄. 그것도 답은 아닌 듯하다. 현실적으로 볼 때 적어도 앞으로 10~15년 사이엔 불가능한 일이지만 얼굴이 다르게 생긴데다 한국어를 더듬더듬하는 아이가 한국에서 더 이상 ‘타자’로 취급되지 않을 거라고 치자. 그렇게 된다 해도 극단적인 계급주의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비 강남거주자, 비 특목고 학생, 비 S.K.Y. 학생, 비영어 능통자는 ‘주류’의 영원한 ‘타자’로 남기 마련이다."

 

그가 바라 본 대한민국의 현실이 바로 현재 내가 맞닥트린 현실이기에 나 역시 ‘타자’일 수

밖에 없고 그와 다르지 않은 일상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 여부를 떠나 ‘주류’에 편승하지 못한 90% 이상의 이 땅 사람들은 10% 이내가 지향하는 삶으로 인해 일상의 행복과 평안을 저당 잡히며 산다는 이야기가 된다.

 

촛불집회가 길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작위로 잡혀 들어가는 와중에 가까이서 함께 술자리를 하거나 음식을 나눈 이들이 잡혀 들어가고 가볍지만 방패에 찍혀 상처를 입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슬픈 내면의 정서가 가득 담긴 개인의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허둥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때로는 철옹성 같은 사람들 앞에 아무리 외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절망감에 잠시 힘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박노자는 그의 일기에서 혼자만의 번뇌들은 서로 소통하게 될 경우 백척간두 위의 대안모색 즉 ‘타자’들과 함께하는 ‘고민’이 된다고 털어놓고 있다. 그의 말대로 타자를 통해 대한민국을 들여다볼 때 후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객관적 지표에 의해 좀 더 합리적인 대안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벽안의 박노자씨가 영화 <춘향전>을 보고 품은 막연한 동경 하나로 조선사를 공부하고 한국인으로 귀화를 했으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다운 몸짓과 시각으로 현대사의 페이지마다 숨겨진 비사를 읊어대며 우리의 게으름을 질책하고 있으니 좀 더 빠른 몸짓으로 이면에 숨겨진 진짜 삶의 모습들을 애정을 담아 바라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인터넷 일기를 모아서 인물과 사상사에서 펴냈습니다.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2008)


태그:#박노자, #박노자의 만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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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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