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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2003년부터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혹사를 당하면서도 병원에 서너 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던 나의 분신 같은 카메라님, 이제 좀 쉴 만하신지요? 아직도 쨍쨍한데 멀뚱멀뚱 이틀 동안 전시품이 되셨으니 답답하지는 않으신지요?

 

300만 화소 '똑딱이' 카메라를 가지고도 잘 놀았는데, 어느 날 지름신이 강림하고 며칠 인터넷을 뒤져 156만 원짜리 당신을 선택했지요. 당신이 오던 날, 거짓말 같이 300만 화소 똑딱이 카메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후 당신은 똑같은 기능을 가진 '새뺑이' 당신이 30만 원대로 가치가 하락했는데도 여전히 내 체취를 품고 내 곁에서 동고동락했습니다.

 

당신이 있어 참 행복했고, 당신이 있어 내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몇 권의 책도 내고, 개인전과 초청전을 갖기도 했지요. 최근 히트작은 당신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달력이 나온 것이었고, 당신이 만든 사진은 여전히 살아서 내년에도 달력으로 제작될 예정이군요.

 

당신과 동고동락한 지 4년쯤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당신의 속내를 알게 되었습니다. 조리개니 셔터 속도니 완전 수동 기능이니 벌브니 그 많은 기능들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했어야 하는데 4년쯤 되니 당신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더군요. 그런데 이미 그때는 당신도 많이 지쳐 있을 때였습니다. 셔터박스가 떨꺽거리고, 아이컵도 다 떨어져 나가고, 센서도 오물이 많이 묻어 결국 병원 신세를 졌지요. A/S란 이런 것이구나, 돈 한 푼 안들이고 당신은 다시 건강한 몸이 되어 제 곁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사람 욕심이 뭔지 당신보다 좀더 상위 기종으로 알려진 놈을 만질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손맛이 떠나질 않더군요. 엄연히 살아 있는 당신을 배신할 수 없어서 스스로 돌아가시라고 대충 다뤘지만 당신은 끈질겼습니다.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의 일몰을 담으려고 서해로 달려갔던 날, 해변가에서 파도를 찍는다고 바짝 엎드렸을 때를 기억하실 겁니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파도가 밀려오면서 당신과 나는 바닷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죠. 나는 그때 당신이 죽었을 것이라고 직감을 했는데, 당신은 여전히 쌩쌩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조금은 야속했지만, 그때는 돈이 없는지라 죽지 않고 살아주신 당신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워낙 많이 찍어대서 그런지 당신은 셔터박스가 약하더군요. 다시 한번 병원 신세를 지고 나온 후, 센서까지 말끔하게 청소를 했는데 제가 찍고 싶은 사진을 담아내질 못하더군요. 물론 당신 탓은 아니에요. 적절한 렌즈를 찾이 못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적절한 렌즈를 찾긴 찾았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렌즈를 먼저 사야 하나 렌즈를 사는 길에 아예 당신도 바꿔치기를 해야 하나 하는, 당신이 들으면 기절할 만한 고민이었죠. 그렇게 몇 달 고민을 했습니다. 아마 당신이 번 돈, 당신을 위해 썼다면 최고급 기종의 카메라와 렌즈를 사고도 남았을 터인데 시절이 워낙 어려워서 소시민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당신보다 두어 단계 높은 기종과 렌즈로 장만하기로….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신은 이미 단종됐지만 진열품이나 팔리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30만 원대, 내가 구하는 것은 50만 원대였습니다.

 

요리조리 가격을 따져보고 매장에 가보니 단종된 제품을 찾는 나를 촌놈 취급하더라구요.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산다고 더 사진을 잘 담을 것 같지도 않아서 또 타협을 했습니다. 렌즈를 중고로 장만하는 대신 당신을 닮은 친구를 위해 조금 더 돈을 쓰기로 했죠. 그래도 옛날 당신의 몸값보다는 훨씬 싸던걸요?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날 이후 당신은 다행히 이전 300만화소 카메라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난 이틀 전까지의 여행길에도 함께 했죠.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열심히 새 카메라를 익혀야 할 터인데 정이가질 않아요. 당신은 만지면 손에 감기는 느낌이 좋고, 이렇게 담아야지 하면 당신은 알아서 척척 응해 주는 것 같았는데 새로온 친구는 아직 뻣뻣하고, 당신에게는 없던 기능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하네요. 그래서 당신도, 그 친구도 다 놓고 다닙니다. 조금 덜 서운하신가요?

 

당신과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 당신을 통해서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카메라가 아깝지 않았다고. 카메라값 이상을 했다고. 어쩌면 혹사를 당했을런지도 모르지만 그게 당신의 행복일 수도 있겠죠.

 

참 많은 곳을 당신과 다녔습니다. 제주도는 거의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녔고, 육지는 물론이요 해외까지 당신은 함께 했으니 그동안 아내보다도 더 나와 가까이 했던 당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당신과 이별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서운해 하진 마세요. 예쁜 둘째딸이 당신의 동반자가 되고 싶어하니까요. 셔터박스가 나갈 때까지 우리 딸내미에게 카메라의 맛을 알려주세요. 너무 과한 부탁인가요?

 

나의 카메라 역사에 길이 남을 당신, 카메라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준 당신, 지난 세월 동안 아내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나와 동행해 준 당신, 이제 당신을 보냅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고마웠습니다.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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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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