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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님이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운문선사가 말했다.

“마른 똥 막대기니라.”

기독교인인 나, 불교의 세계에 매료되다

이 말은 간화선(看話禪) 수행자들에겐 중요한 화두 중 하나라고 하지만, 도서관에서 내가 불교서적에 빠져 살게 만든 결정적인 한마디기도 하다. 사업체를 문 닫고 잠시 쉬고 있는 요즘, 뭔가 정신적으로 재충전하려던 바람은 있었지만, 생각보다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이다.

하느님께 기도생활을 하지만 그저 범부에 지나지 않는 내가 그동안 불교를 알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불교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것조차 죄악시 했는지도 모른다. 도서관 종교코너로 내 발길이 옮겨진 이유야 어쨌든, 아무생각 없이 펼쳐든 책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내용은 이어졌다.

단하(丹霞, 天然 738~823) 스님이 추운겨울에 낙양 혜림사에 갔을 때, 불도 때지 않은 추운 방으로 안내 되었다. 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법당에 모신 목불상을 꺼내다가 불을 지폈다. 그러자 절의 한 스님이 깜짝 놀라 달려오며 외쳤다.

"어쩌자고 우리 부처님을 태우고 야단이오?"

단하스님이 지팡이로 잿더미를 헤치면서 태연히 말했다.

"내가 부처님을 화장해서 사리를 찾으려는 걸세."
"아니, 목불에 무슨 놈의 사리가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나무때기에 불과한 걸 추워서 불을 좀 피웠기로 왜 그리 야단인가?"

머리를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할까. 나는 이후, 도서관의 불교코너를 두 달째 애용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엔 참 어려움도 많았다. 어렵고 생소한 용어들과 기초지식 부재로 인한 이해부족 때문이었다. 다행이도 개론서 몇 권 읽고 나니 그런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소 되었지만, 12연기(緣起)니 오음(五陰)이니 하는 말의 의미는 아직도 어렵다.

더위를 피해 낮시간 동안엔 도서관에서 불교서적을 읽는다.  벌써 이 불교 서가를 두달 째 애용하고 있다
▲ 도서관의 불교코너 더위를 피해 낮시간 동안엔 도서관에서 불교서적을 읽는다. 벌써 이 불교 서가를 두달 째 애용하고 있다
ⓒ 우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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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을 한아름 안고 집까지 들고 와서 끙끙거리며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마침내 아내가 한마디 했다.

"갑자기 웬 불교에요? 일이 좀 안 풀린다고 입산수도라도 준비 하는 거예요?"

'불교' 하면 아내 말처럼 나 역시 평생 고행하는 수도자들만을 상상해왔다. 반대로 장삼과 가사를 잘 차려입고 으리으리한 절에서 생활하는 스님들은 왠지 수도가 부족한 분들이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부처님도 쾌락과 마찬가지로 고행 또한 수도자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가르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시 뭘 좀 알아야 면장을 해 먹는다.

인간 부처에 대한 감동

부처가 살아생전에 자신이 예배의 대상임을 거부함으로써 제자들을 놀라게 했다지만, 사실 그 말엔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응부경전’에 나오는 바카리라는 비구는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부처에게 예배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 찾아온 부처가 말했다.

“바카리여, 이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본다고 말이다.”

불교에도 교조인 부처에 대한 신앙고백은 있다. 부처의 제자나 신도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른바 ‘삼귀의’라는 것을 표명해야 한다.

붓다에게 귀의하나이다.
다르마(法)에 귀의하나이다.
승가(僧伽)에 귀의하나이다.

그러나 그 뜻하는 바는 그가 법을 알고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기에, 그 지혜와 인격을 마음으로부터 신뢰한다는 것일 뿐, 그 이외의 의미는 없다. 부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경전 속에 나오는 그의 열 가지 칭호를 보면 엄청나긴 하다.

응공(應供: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 정등각자(正等覺者: 샅샅이 깨달은 사람), 명행족(明行足: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 선서(善逝: 윤회를 되풀이하지 않을 사람), 세간해(世間解: 세상일을 잘 아는 사람), 무상사(無上士: 가장 높은 사람), 조어장부(調御丈夫: 마음을 잘 조종할 수 있는 사람), 불타(佛陀: 진리를 깨달은 사람), 천인사(天人師: 만인의 스승), 세존(世尊: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

이런 칭호들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 어마어마한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부처가 위대한 인간임을 찬미한 것이지, 신의 아들이나 신과 인간의 중재자, 또는 속죄자라는 표현은 아니다. 더구나 심판자이거나 신일 수는 더욱 없다.

그렇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부처 자신을 믿을 것이 아니라, 너희 안의 불성(누구라도 깨달을 수 있는 본질)을 믿으라고 가르쳤다. 그는 단지 누구보다 먼저 진리로 향한 길을 알았기에 그 길을 가르쳐 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실제로 그는 살아생전 제자들의 스승이긴 했어도 승가의 일원으로 생활했다. 이런 부처를 보고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실반 레비는 불교정신을 일컬어 ‘동양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니 중국의 임제선사 같은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죽었고, 법당에 모셔져있는 부처님은 부처의 형상일 뿐 참된 부처도 아니며, 아미타불이니 비로나자불이니 관세음보살이니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은 모두 이름뿐이며 허상일 따름이다.’ 라고 갈파한다. 그가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은 심금을 울린다.

“부처란 것은 환상과 같은 존재인데 비해 너는 어머니가 낳은 실존자(實存者)가 아니냐, 부처라는 허상에 매달리지 말고 자기 자신의 눈을 떠야 할 일이니라.”

9세기에 살았던 임제선사와 동시대 인물인 조주선사 역시 이렇게 말했다.

“쇠붙이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지나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 속을 지나지 못하며, 흙으로 빚은 부처는 물을 지나지 못하지만, 진짜 부처는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앉아있다.”

기독교의 경우 구원자인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를 따지기 위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피의 논쟁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구원(깨달음)의 주체가 자신으로 귀속 된다는 이런 가르침은 나 같은 기독교인이 보기에 특별하고 이채로울 수밖에 없다.

불교 용어에 실개성불(悉皆成佛)이라는 말이 있는데, 후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불교인의 이상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재미있게도 부처는 현실주의자였다. 한번은 목가라나 라는 수학자가 부처를 찾아와 ‘당신의 제자들은 모두 목적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라고 묻자 부처가 솔직하게 말해서 나를 빙그레 웃게 했다.

“벗이여, 내 제자 중에는 거기까지 이르는 이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이도 있다.”

부처는 어디까지나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일 뿐, 나머지는 제자들이 알아서 가야 하는 것이다. 부처는 신이 아니기에 제자들의 길을 전부 데려다 줄 수는 없다. 그런데 아무리 부처님의 제자라고 해도 꾀를 부리거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그것을 부처 스스로가 솔직하게 고백한 대목이다.

저녁시간 집에서 읽기 위해 일부는 집으로 빌려다 놨다.
 저녁시간 집에서 읽기 위해 일부는 집으로 빌려다 놨다.
ⓒ 우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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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 나도 내일 견성하게 될지"

물론 니르바나(涅槃: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에는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선종(禪宗)의 역사를 보면 별 인물이 다 나온다. 스승에게 따귀를 맞다가 깨닫는 사람, 빗자루질을 하다가 튀어나간 돌멩이를 보며 깨닫는 사람, 냇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깨닫는 사람..... 진리를 향한 그들의 노력을 보면 정말 눈물겨울 정도다.

그 중 아주 특별한 사람이 있는데, 달마대사의 6대 제자인 혜능조사의 경우다. 근근이 이어오던 달마대사의 선불교에 대한 가르침을 널리 알렸으며, 사실상 선교(禪敎)의 창시자라고 일컫지만 그는 문맹이었다. 게다가 그는 절에서 방아 찧는 일을 몇 개월 했을 뿐, 불교교육과 참선 수도는 고사하고 구족계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가 홍인화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갑자기 수제자로서 의발을 전수 받는 통에, 시기심에 눈이 먼 홍인화상의 다른 제자들로부터 목숨의 위협까지 받아 멀리 도망을 가야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가 도망을 가던 중, 어느 여인의 불경 읽는 것을 보고 그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해준 일이 있었다. 여인이 책을 내밀면서 다른 구절에 대한 글귀도 설명해달라고 간청할 때 그가 말한다.

“나는 문자를 모르니 글은 당신이 읽고 그 의미만 물어봐주시오.”

그는 무식한 사냥꾼이라도 이토록 스스로를 꿰뚫어 확철대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표본이었다. ‘누구에게도 불성은 있다’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올곧게 받아들인 순수한 마음에서 일어난 결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역시 불교서적에 빠져 있을 때, 간혹 ‘입산수도’나 ‘출가할 준비’ 운운하며 놀리는 아내에게 혜능을 거론하며 말한다.

“하느님이 나도 내일 당장 견성(見性)할 수 있게 해주실지 모르는 거야. 너무 그러지 마러.”

그럴 때마다 교회 집사인 아내는 내게 합장하면서 ‘성불하십시오.’라고 말해 놓고는 깔깔 거린다. 그래도 그 말이 기분 좋다. 어쨌든 덕분에 나도 이제 불교신자들을 보면 합장을 하면서 인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성불하십시오.”

그러면 그들도 합장하며 진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리라.

“성불하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과 오묘한 그분의 세계를 내게 소개해준 하느님께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태그:#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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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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