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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가 미국 쇠고기 수입, 독도 문제, 한중 정상회담 때의 푸대접 논란, 금강산 피격 사건에 이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 성명 삭제 파문까지 겪는 등 총체적 난맥이다.

 

지난 24일 나온 ARF 의장 성명에는 금강산 피살 사건과 10·4 선언이 함께 언급됐으나 25일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빠졌다. ARF에서 금강산 피살 사건을 공론화해 국제 공조로 압박하겠다고 기세등등했던 이명박 정부가 4전4패에 이어 거의 몰수패까지 당한 모습이다.

 

더 씁쓸한 것은 남북한이 국제무대에서 서로 멱살잡이를 하면서 '한민족 망신쇼'를 하던 10년 전 냉전시대식 추태가 되풀이 됐다는 점이다. 오는 8월8일 베이징 올림픽 때 남북한 공동 입장은 거의 물건너 간 상황인데 실제로 따로 입장한다면 남북한간의 반복과 대립은 더욱 더 국제사회에서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지난 24일 ARF 의장 성명이 나왔다.

 

조지 여 싱가포르 외무장관은 성명에서 "참가국 장관들은 금강산피살 사건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이 사건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기대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장관들은 회담에서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그 결과물인 10·4선언을 주목한다"며 "10·4선언에 기초한 남북대화의 지속적인 발전에 강한 지지를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 성명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은 "한국이 혹 떼려다 혹 붙였다"는 것이었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10·4 선언의 경우 이명박 정부 대북 정책의 원칙 자체를 건드리는 문제다. 더구나 "10·4 선언에 기초한 남북대화의 지속적인 발전에 강한 지지"라는 대목은 앞으로 두고두고 북한이 인용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ARF 외교전에서 남한이 북한에 패배했다는 평가가 나올 만했다.

 

남북한 모두 싱가포르 찾아가 항의?

 

25일 오후 늦게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기자실로 뛰어오더니 새 소식을 전했다.  ARF 의장성명에서 금강산 피살 사건과 10·4 선언이 모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 아침 이용준 차관보가 싱가포르 외교차관과 만나 10·4선언 관련 문구를 빼달라고 요청했다"며 "10·4 선언 관련 문구를 빼면서 금강산 피살도 빠졌다, 금강산 피살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지지하는 발언은 5~6개국 외교장관이 함께 했다, 이미 충분한 효과를 봤기 때문에 두 문구를 함께 빼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성명에 들어있던 '10·4 선언에 기초한 남북대화'란 문구도 북한도 그런 얘기를 한적이 없다"며 "그 의미를 모르고 싱가포르 외교부가 의장 성명에 넣은 것인데, 그대로 두면 앞으로 몇 년간 두고두고 인용이 될 것 같아 오늘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26일 일본의 <교도통신>은 ARF 참가국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의장 성명에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의 조기해결을 촉구하는 기술이 삭제된 것은 북한이 강력히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의장성명에서 금강산 피살 사건을 삭제했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10·4 선언 문구도 뺐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북한이 의장성명에 금강산 사건이 들어간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마침 한국 정부도 10·4 선언이 들어간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싱가포르가 의장 성명에서 2가지 모두를 삭제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는 아직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있다.

 

남북한 간 대립 더욱 격화될 듯

 

ARF 의장 성명 삭제 사건은 현재 남북 관계의 현 주소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일단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애초 금강산 피살 사건을 ARF로 끌고가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북한 간 문제를 국제 무대로 끌고가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 측면에서 봤을 때도 맞지도 않고 실질적인 효과도 별로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민주당 의원은 2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군인이 민간인을, 그것도 50대 여성을 살해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이 우선 사과하고 재발방치 조치를 해야 한다"면서도 "ARF로 가져가서 공식 거론하는 것은, 북한과 진지하게 대화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의심받고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속옷은 동네 한 가운데서 말리지 않는 법"이라는 말도 했다. 금강산 사건을 의장 성명에 넣겠다고 총력을 펼치다가 나중에는 빼는 촌극을 벌인 것은 국제적 망신거리로 충분하다.

 

이 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남북이 소모적인 외교전을 벌이는 10년 전 냉전시대식 모습이 재현됐다. 북한은 금강산 피살 사건이 들어간 것에 대해, 남한은 10·4 선언이 들어간 것에 대해 싱가포르 정부를 찾아가 항의하는 모습은 추태 그 자체다.

 

8월8일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되는 데 현재로서는 공동 입장은 거의 물건너 간 분위기다. 남북한 대표팀은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아시안게임 등 국제종합대회에서 동시 입장해왔다.

 

마지막으로 남북한 간의 대립은 한층 더 격화되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왕자씨가 피살당했다는 것을 알고 전면적인 남북대화재개를 제안했다. 그날 오후 청와대는 "이번 피격 사건과 남북관계는 별개"라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불과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꿨고 이번 ARF까지 금강산 피살 사건을 끌고 감으로써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의 진의가 무엇인지 더욱 헷갈리게 됐다. 북한은 앞으로 이명박 정부의 그 어떤 대북 제안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태그:#A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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