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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에서 성깔 한 번 부렸다가 졸장부 된 이야기를 했다. 한 번으로는 진한 기억들이 너무 많아 한 토막의 이야기를 더하고프다. 물론 그런다 해도 1년여 알바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부드러운 이들보다 까칠한 이들이 더 많고, 다정다감한 이보다 울뚝불뚝한 이들을 더 많이 만나는 일터이긴 했다. 그러나 어여쁜 이들이 주유소를 들를 때는 드문 만큼 행복의 깊이도 컸다.

말할 수 없는 회한의 무거리들에 휩싸이기도

'26년 목회의 끝이 주유원인가. 그래도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건만.' 날마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절망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빨리 잊으라고들 한다. 맞다. 분명히 진리다. 그래야만 한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한가한 시간에는 다시 과거가 부스스 깨어 일어나 내 가슴을 들쑤셨다.

경유의 노즐이다. 노즐의 레버를 당겨 주유를 하게 된다.
▲ 주유노즐 경유의 노즐이다. 노즐의 레버를 당겨 주유를 하게 된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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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한가함과 분주함 사이, 나와 너 사이, 그리스도인과 주유원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며 하루하루를 연장해 갔다. 웃고 울고, 즐겁고 어둡고, 속 시원하고 속상하고 등을 반복하며 목사 주유원으로서 그리 인생을 써가고 있었다. 그날은 몇 명의 손님들 때문에 기분이 고왔다. 살맛이 났다. 살맛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직 모자란 사람이라 안 되었다. 환경과 사람에 따라 웃음바다와 슬픔의 골짜기를 오가는 내 속내가 너무 싫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때 내가 읽는 책도 여지없이 이 진리를 뱉어놓았다. 나도 강단에서 무지기수로 우려먹던 말이다. 그게 성경의 진리다. 근데 나는 어땠던가. 나드는 손님이 뱉은 말 한 마디에 어눌해지고, 그 한 마디에 오금을 못 펴기도 하며, 반대로 하늘을 나는 때도 있으니, 이래 가지고야 환경이나 상대의 지배에서 놓일 수 있을까. 그들이 점령하게 하지 말고 그들을 점령하자 각오하지만 내 맘은 늘 그 반대로 갔다. 그런 내가 나도 미웠다.

얼떨결에 담뱃값 받은 목사

심란함의 첨단을 헤매고 있을 때, 검은색 레저용 차량 한 대가 들어와 나의 끝 간 데 모르는 어수선한 심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른 때보다 더 잽싸게 달려 나가 외쳤다. 그런 행동으로 모든 것을 잊겠다는 각오를 하듯.

"어서 오세요.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가득 채워주세요."

조금은 풍성한 몸매의 여인이 창문을 열며 말한다.

"오늘 세차 할 수 있죠?"
"그럼요."

기름을 넣은 후 계산을 동료에게 맡기고 나는 먼저 세차장으로 가서 대기했다. 그때는 같이 일하는 동료가 넘어져 다쳐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차는 내가 도맡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유소 졸자라 내가 했지만….

내가 알바 한 지 2개월 남짓에 몇 번이나 주유원들이 바뀌었다. 이게 바로 내가 일하던 주유소라는 일터의 특징 중 하나다. 쉽게 들어오고 쉽게 나가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박봉에다가 특별한 계약도 없이 들어와 힘들면 나가는 이들이 많다 보니 그랬다.

내가 일하고자 찾아갔을 때 나를 처음 선봤던 선배도 내가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 그만뒀고, 후임으로 온 후배도 한 달을 채우고는 그만뒀다. 그때는 숙식을 주유소에서 하는 후배 한 명이 다시 왔지만 주로 세차를 하는 낮 동안은 근무 시간이 아니라 내가 세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계산을 마친 차가 세차장으로 들어왔다. 우리 세차기가 좀 낡아 차 앞 범퍼가 잘 닦이질 않았다. 앞 범퍼를 봉걸레로 닦고 세차할 수 있도록 손짓과 입짓으로 안내해 차를 세웠다. 세차기를 작동시키고 세차기에서 공기가 나오는 동안 뒷부분부터 물기를 닦았다. 이런 차종이 그렇듯 앞 유리를 닦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청하여 옆문을 잡고 매달려 앞 유리의 위쪽도 닦아 주었다. 대개는 대강 닿는 부분만 닦는데 그날은 바쁘지 않아 그렇게 했다. 세차를 마친 후 세차비를 달라고 손짓을 하니 운전자는 차창을 아래로 내리고 세차 할인권과 꼬깃꼬깃한 돈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며, 차를 잽싸게 뽑아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수고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담뱃값 하세요."

아니다 싶어 차를 멈추려고 손짓을 해보았지만 차는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팁을 받은 것이다. 목사가, 그것도 담뱃값을. 독자들도 이미 눈치 챈 분이 있겠지만 목사인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돌돌 말린 돈을 펴보니 4천원이었다. 지프 형이니 세차비는 2천 원이다. 2천원은 담뱃값인 것이다. 담배 한 갑에 얼마인지 모르지만 2천원을 담뱃값으로 받고 보니 마음이 그랬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이었다.

그녀가 전해 준 따듯한 마음이 억세게 고마웠다. 단돈 2천원에도 이렇게 마음이 실리다니. 그러나 담뱃값을 받은 내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의 고운 마음이 담긴 말에 순종하여 생전 처음 '담배 한 갑을 사 볼까?' 피우진 못하겠지만, '기념으로 책상 위에 놓아둘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결국은 동료들과 하드 한 개씩을 나누었지만.

주유소의 주유기 모습이다. 주유원은 이 주유기와 함께 씨름하며 그의 하루 하루 인생을 써간다.
▲ 주유기 주유소의 주유기 모습이다. 주유원은 이 주유기와 함께 씨름하며 그의 하루 하루 인생을 써간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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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즐거움을 아는 이들

주유소에 오는 손님들 중에는 이런저런 마음 나눔으로 우리를 따듯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주유소의 천사들인 것이다.

농사를 지었다며 감자 한 상자를 간식으로 쪄먹으라며 내려놓고 가는 오토바이 운전자, 더운데 고생이 많다며 시장 보고 가는 꾸러미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주고 가는 운전자, 큰일이 있어 떡을 했다며 모락모락 김이 이는 떡 한 뭉텅이를 떼어주고 가는 운전자, 싸서 샀다며 바나나 한 타래를 주고 가는 운전자, 음료수를 사람 수대로 사가지고 와 넌지시 건네고 가는 운전자…. 마음의 따듯함을 사랑에 담아 내놓고 가는 이들이 있다.

야발스러움으로 이내 허름한 마음까지 쥐어뜯어 놓고야 가는 운전자들도 적지 않지만, 그 반대로 넉넉한 인심을 마음에 담아 말로, 선물로 생채기 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가는 운전자들도 많았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 다르게 어울리면서 사회를 만들어 가는가 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 한 운전자는 기름을 넣으며 아름찬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나라가 고급 인력을 너무 일찍 은퇴시켜 문젭니다. 이렇게 고급인력들이 주유소에서 일해야 하는 게 안타까워요. 그러나 어르신들을 보면 항상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이런 일이라도 하심으로 만날 수 있으니 우리로선 큰 행운이죠…."

그는 아주 많은 말을 했지만 그냥 너스레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난 듣기만 했다. 동료가 그와 말을 섞었다. 그가 말만 하는 게 아니란 건 나중에 남기고 간 깍듯한 인사 짓에서 읽을 수 있었다. 40대 중반이나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그는 주유원을 사람으로 봐주는 것이 분명했다. 날씨는 더웠지만 왠지 모를 힘이 솟았다. 운전자가 사람으로만 봐줘도 주유원은 그냥 힘이 솟는다. 그가 건네고 간 껌을 씹으며 좋은 기분으로 일하자고 다짐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가. 운전자가 기름을 넣고 계산을 마치고 떠날 때, 그가 던진 한 마디에 주유원들은 웃고 울고 한다는 것을. 그 말 한마디가 고마울 때는 보통 이런 말들을 남기고 간 이들이 있을 때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이런 말들은 값을 지불해야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 돈 안 들이고 다른 이를 기운 나게 하는 말이라면 해봄직 하지 않은가. 그런 말을 남기고 가는 운전자에게는 뒷갈망은커녕,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하게 된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날도 회한으로 시작한 것과는 달리 그런 인사를 많이 했다. 요즘처럼 그날도 햇발은 지글지글 내리쬤고 땀은 비 오듯 했다. 그러나 길게 불어오는 짠한 바람으로 인하여 땀을 식힐 수 있어 행복했다. 실은 짠한 바람 때문이라기보다 주유소를 찾은 천사들이 나누고 간 진한 사랑 때문이리라. 요샌 주유소에 들르면 천사가 되고자 노력한다. 독자들도 천사가 되어보면 어떠실지.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이어진 글입니다. 필자는 지금 자그마한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아르바이트, #주유원, #목사, #알바, #주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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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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