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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하는 필자의 모습
 주유하는 필자의 모습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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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넣을까요?" 정중하게 인사한 후 내가 물었다.

"5만원요." 운전자가 보지도 않고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펴 보이며 대답했다. 일단 안심해도 된다.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니 넘칠 염려는 없다.

노즐을 차량의 주유구에 꽂고 카드 전표를 끊어가지고 차량 쪽으로 가는데 베테랑 동료가 놀란 눈으로 주유기의 LCD판을 보며 묻는다. "얼마치 넣는데?"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5만원요!"

그 때까지만 해도 동료가 왜 그러는지 몰랐다. 대답을 하고 난 후에야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주유기의 LCD판을  보니 이게 웬일인가? 글씨도 선명하게 이렇게 찍혀있었다. '92100원'

초보 주유원 시절 첫번째 저지른 대단한 실수다. 세팅을 안 하고 노즐을 주유구에 꽂았거나 세팅을 잘못한 것이다. '원'이란 글자를 누르고 나서 '5' 그리고 '00'을 두 번 눌러야 하는 것을, '원'이란 글자를 안 눌렀거나 잘못 눌렀기 때문이다.

머리 위에서 타오르는 태양을 그 해 여름만 경험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해 여름 태양은 더욱 지글거렸다. 이태 전 나는 한여름 껄떡거리는 태양을 정수리로 받으며 주유소의 마당을 헤집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르바이트란 거였다.

주유원이 돼야만 했던 목사

오해로 시작된 배반과 미움의 한계령을 넘으면서 난 내가 근무했던 교회에 사직서를 냈다. '그래도 다른 교회로 옮겨 목회하게 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이한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26년간 목회라는 것밖에 모르던 내가 사회라는 적막강산에 내던져진 것이다.

당장 끼니가 걱정이니 무엇인가 해야 되었다. 정보지들을 아무리 뒤져도 할 만한 일이 없었다.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라 죄를 짓는 게 아니라면 아무 거라도 해야 했다.

독자들은 많은 목사들이 호화찬란한 최고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이 실제로 있고 그런 이들만 언론에 보도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사례를 받으며 생활한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의 70% 이상 교회가 미자립교회다.

나는 교회에서 나왔을 때 빈털터리였다. 아직 비워주지 못한 교회 주택에 살림살이가 남아있었고, 이사할 곳도 없어 비워달라는 성화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네 식구가 잤다. 그때 어렵사리 50대인 내가 구할 수 있었던 일이 바로 주유원이다. 그것도 몇몇 주유소에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은 뒤였다. '1년 남짓 주유소 알바를 하면서 인생 50년을 다시 썼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실수, 실수, 또 실수... '좀 봐주는' 세상은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분명히 5만원 세팅을 한 것 같은데, 세팅이 안 돼서 9만원이 넘게 들어갔습니다. 이왕에 손님 차에 들어간 것이니 봐주시고 들어간 가격만큼 끊으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한 목소리가 차에서 흘러나온다.

"아저씨,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안 되죠. 내가 잘못한 것 아니니 난 몰라요. 정 그러시면 5만원 어치 남기고 빼든지."

일당보다 많은 돈을 물어내고 나면 안 되기에 무조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여러 번 통사정을 한 후에 가까스로 2만원을 더 결제할 수 있었다. 그래도 2만2100원은 내가 물어내야 했다. 실수를 하긴 했지만 2만2100원은 그 차에 들어갔으니 좀 봐주면 좋을 텐데, 세상은 그게 아니었다.

몇번 이런 실수를 했었다. 이런 주유 실수는 그래도 약과다. 사업에 실패하고 주유소로 오 게 된 한 동료는 어느 날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대형 실수를. 휘발유 차에 경유를 주유한 것이다.

휘발유 차량은 대개 주유구가 좁아서 노즐이 굵은 경유 노즐이 안 맞는다. 그러나 몇몇 휘발유 차량은 주유구가 넓다. 항상 예외의 법칙은 있다고 하지 않나. 서툰 동료가 하필이면 그 차에 달려가 주유를 했는데 경유 노즐을 꽂은 것이다. 경유가 콸콸콸…. 어쩌겠는가. 일당은 고사하고 한 달 벌이의 절반을 뚝 잘라 차를 정비하고 기름을 채워주는 데 사용했다. 난 그런 실수가 없었던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한순간의 발칙한 '성깔', 어리석은 나를 돌아보다

실수로 2만2100원을 물어내고 속상해 하는데 저쪽 세차장에 차가 들어와 서 있다. 달려가 보니 아까 그 차였다. '승용차 1000원, 지프차 2000원' 이게 우리 주유소의 할인된 세차요금이다. 그러나 그는 지프차임에도 1000원을 내밀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2000원인데요." 운전자는 조금 전의 억울함이 안 풀렸는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1000원 주고 세차했어요. 아저씨만 왜 더 달라고 해?"

이제 막말이다. 그러나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말했다. "여기 보세요. 지프 형태의 차는 2000원이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1000원을 더 주셔야 하는데요."

운전자는 1000원을 마지못해 차창 밖으로 집어 던지며 계속 무어라고 투덜댔다. 그 소리에 아까의 사건이 생각나서 난 하지 말아야 할 소릴 하고 말았다.

"제가 하루 일당이 얼마라고 그걸 제가 물어내라고 하십니까? 어차피 댁의 차에 들어간 기름인데. 보니까 꽤 가지신 분 같은데."

결국 1000원을 더 받고 세차를 해서 보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난 나 자신과 싸워야 했다. 내가 나를 용납할 수가 없어서다. 2000원이니 1000원이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운전자에게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한순간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뱉어놓고 하루 종일 가슴을 쥐어짜야 하는 이 옹졸함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졸장부 같으니라고.

단 몇 시간도 못 가 후회할 말을 왜 했던가. 한순간의 발칙한 '성깔'이 결국 일을 그르쳤다. 써걱거리는 마음을 틀어잡고 일을 하려니 답답했다. 다윗은 대장부가 되라고, 대장부로 살라고 그렇게 아들에게 가르쳤는데,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면서, 목사라면서 대장부는커녕 졸장부도 그런 졸장부가 없었다. 하루 종일 이런 생각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글입니다. 필자는 지금 자그마한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주유원, #실수,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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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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