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아들이 아르바이트(알바)를 ‘또’ 시작했다. 재개발이 되어 건물을 철거하는 현장인데 아들은 거기서 PC를 이용해 하는 알바를 하고 있다.
오전 7시면 집을 나가는데 얼추 자정이 임박해서야 귀가한다. 작업시간이 원래는 오후 6시까지라는데 추가로 일을 하면 수당을 더 준다는 메리트 때문으로 그처럼 늦게까지 일을 한다고 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그처럼 고생을 하는 걸 보자면 가슴이 미어진다. 하지만 아들은 당당하고 자신만만이어서 그나마 안심이 되기는 한다. 그렇게 두 달만 알바를 하여 2학기 대학 등록금까지 내겠노라는 다부진 결심을 피력할 때면 내 아들이지만 정말이지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아들의 알바 이력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입수능을 마친 뒤부터 택배회사에 들어가 알바를 했으니 얼추 7년여의 경력을 지니고 있다. 대학에 진학한 후로도 아들은 여름과 겨울방학을 결코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반드시 알바 자리를 스스로 찾아 일을 했으니 말이다. 그 덕분에 아들에게 들어간 돈은 거의 없었다. 반면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딸에겐 지금도 여전히 돈을 보내줘야 한다.
하여 이담에 딸이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을 잡아 돈을 벌 즈음이면 그간에 바라지한 돈의 다만 일부라도 청구해야 하지 싶다. 그래야 우리부부도 노후설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딸이 오로지 공부만 하고 알바를 안 한다는 건 아니다.
녀석도 나름대로 학생을 가르치는 과외의 알바 외에도 서울대학교에서 근로봉사 장학제도라는 또 다른 알바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함에도 돈을 송금해 주는(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연유는 현재 딸이 기거하고 있는 원룸의 월세 부담 외에도 금지옥엽 내 딸이 행여 수중에 돈이 없어 굶으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과 조바심이 늘 발동하는 때문이다.
아무튼 아들과 딸은 그간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가 하는 점을 여실히 천착했을 터이다. 그러하기에 이담에 두 녀석은 반드시 돈의 소중함과 땀의 고귀함을 깨달아 잘 살리라는 기대감이 벌써부터 애드벌룬으로 두둥실 하늘에 떠 있다.
요즘은 통상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알바를 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한 알바의 목적은 우선 가정형편이 안 좋아서 스스로 학비를 벌려는 갸륵함의 심성이 근저일 것이다. 다음으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사관에 입각하여 하는 경우도 있을 터이다. 또한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벌어 용돈으로 사용하겠노라는 작심도 그 취지의 동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 했다.
알바라는 것이 내게는 단순함이 아닌, 그야말로 생계의 절박함으로 다가온 때문이었다! 너무도 일찍 여읜 어머니로 말미암아 나는 불행과 고통, 그리고 외로움과 고생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상습적인 폭음과 깊은 병까지 드신 아버지로 인해 나는 초등학교도 겨우 마쳤다. 당시에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이 나로선 사치였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에도 학교에 가지 못 하고 고향역 앞에서 구두를 닦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부자의 입에 도무지 풀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 여름 장마철이면 우산장사를 했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광주리에 담아 행상을 한 것도 내 알바의 지난 이력이다.
하지만 허구한 날 그렇게 고생을 해도 돈을 번다는 건 늘 힘겨운 것이었다. 뭔가 색다르게, 그러면서 힘은 덜 드는 돈벌이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기회가 왔다. 내게서 단골로 구두를 닦던 ‘학생’이 하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짜 고학생이었던 그 학생은 항상 깔끔한 차림의 검은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 학생이 나의 단골이 되고 보니 언제부턴가 속에 있는 말까지 스스럼 없이 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내가 그 ‘형’에게 먼저 물었던 것 같다.
“보아하니 형은 진짜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지요?”
그제야 겸연쩍은 듯 웃던 그 형은 나의 말이 맞다고 하였다. 이어진 그 형의 이실직고에 따르면 가짜 고학생으로 알바를 하면 돈벌이가 꽤 짭짤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귀가 크게 열리고 그 형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도 섬광처럼 번뜩였다.
“형, 나도 형이 하는 방법 좀 알려줘요!!”
그 형에게서 가짜 고학생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돈을 모아 교복과 교모 등을 세트로 구입했다. 변두리 중학교의 배지와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다음으로 문방구 도매점으로 갔다.
모나미 볼펜과 메모지를 사서 정사각형으로 오렸다. 그리곤 자필로 이렇게 썼다.
저는 집안이 가난한 고학생입니다. 공부를 하려 해도 돈이 없어 이렇게 나섰으니 부디 이 볼펜을 한 자루씩만 팔아주신다면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실로 낯 뜨겁고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구두를 닦는 것과 행상을 하는 것보다 몇 배 나을 거라는 가짜 고학생 형의 귀엣말이 망설임을 희석하게 하였다. 껌도 넉넉히 사서 봉투에 넣은 뒤 장항선 시외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기사님께는 그 버스에 탑승하면서 넙죽 인사를 하든가 껌을 하나 드리면 그러려니 하고 버스 삯을 받지 않았다.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하여 5분여를 달릴 즈음부터 나의 가짜 고학생 행각은 시작되었다.
우선 버스의 뒷좌석부터 앞으로 나오면서 '저는 집안이 가난한 고학생입니다...'라고 쓴 메모지를 나눠주었다. 함구한 채 다만 인사를 꾸벅꾸벅 하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또 뒤로 가서 이번엔 봉투에서 꺼낸 볼펜과 껌을 넌지시 승객들께 권하는 방식이었다. 이 때 표정은 누가 봐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만치의 처량하고 애달픈 모습을 지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 또한 가짜 고학생 형으로부터 전수받은 노하우 중의 하나였다. 그럼 열이면 예닐곱 명의 승객들이 안 됐다며 100원씩을 주고 나에게서 볼펜 내지는 껌을 한 통씩 사 주셨다. 그렇게 팔면 얼추 반 이상은 남는 ‘장사’였다. 때론 너무 불쌍하다며 당시로선 거금인 1천원을, 그것도 껌과 볼펜은 아예 받으려고도 않는 분이 계셔서 더욱 돈벌이가 잘 되었다.
내 양심을 속이고 버스의 승객까지 속이는 그러한 작태에 처음엔 무척이나 망설였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도둑질도 하면 할 수록 는다고 점차 시일이 흐르자 그러한 애초의 심성에도 균열이 오는 것이었다. 그저 뭘 해서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하는 쪽으로
생각의 물꼬가 바뀌고 변질되었으니 말이다.
실상 구두닦이와 행상을 할 적보다 가짜 고학생 노릇을 하는 때가 수입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버지의 약값과 쌀 등 생활비로 충당했다. 그렇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고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게 인생사의 어떤 옳은 이치였다.
그날 따라 ‘돈벌이’가 잘 되어 충남 예산까지 갔던 날이었다. 예산터미널에 도착하였기에 시외버스에서 내리는데 중년의 남자가 표 나게 내 뒤를 저벅저벅 따라오는 것이었다. 순간 예감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역시나 그 남자는 나를 인적이 드믄 쪽으로 밀어붙였다. 자신이 모 학교의 선생이란 신분을 먼저 밝힌 그분은 그간 나를 유심히 관찰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무리 없이 살지언정 양심까지 파는 짓은 사람으로선 결코 할 짓이 아니다!”는 장광설을 설파하시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봐 주지만 다음에 또 이 짓을 하다가 내 눈에 걸리면 당장에 경찰서로 끌고 가겠다!”
나는 두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하마터면 오줌까지 지릴 뻔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 그 선생님 말씀이 맞는 거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십 대이며 그것도 전반기이거늘 벌써부터 이렇게 남을 속이는 가짜 인생으로 살아서야 이담에 과연 무엇이 될까?
이러고도 후일에 나도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으면 내 이러한 부끄러운 과거는 모두 밝은 색으로 치장을 하여 속이겠지? 그러면서 너(희들)는(은) 내가 그러했듯 나를 본받아 정직하고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한다며 일장훈시까지를 빠뜨리지 않겠지?
결국 내 비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건 앞으론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될 부도덕의 극치 알바라는 생각에 정박하게 되었다. 귀가하자마자 교복과 교모 일체를 불에 태워 없앴다. 그걸 그냥 두었다간 언제 또 내 맘이 변할지 나 자신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세월은 여류하여 대학생 자녀의 아버지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가파른 비정규직의 가시밭길을 점철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옛날 가짜 고학생 시절에 경험한 아픈 기억은 그 교훈이 만만하지 않다. 즉 지난날의 그 비애는 이후로 뭘 하든 정직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각오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얘기다.
아울러 어찌 보면 나를 인격적으로도 부쩍 성숙하게 해 준 고마운 단비였다는 생각이다. 하기야 그러한 아픔의 교훈이 있었음에 아이들이 모두 잘 자라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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