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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주우라 했다고 연행? 석방해!

 

6월 30일 오후 6시, 그는 지금 시청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지난 토요일인 28일 밤 이 광화문 네거리의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 같았다. 경찰은 15만 명 가량의 촛불시위대를 향해 돌멩이, 쇠뭉치, 소화기를 마구 던졌고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은 경찰이 던진 흉기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격앙된 시민들은 경찰의 물대포와 흉기에 맞서 인근에서 끌어온 소방용 물을 뿌려대며 대항했다. 80년 5월 광주의 상황이 이러했으리라.

 

그 밤이 지나고 난 뒤 시청광장은 경찰차에 봉쇄당했다. 그런데 6월 30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시국미사를 드린다고 해서 그는 이 미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다. 지난 토요일 밤의 치떨리는 상황을 생각하면서 프레스센터에서 시청역 5번 출구 방향으로 가는데 아가씨 2명과 경찰 간에 말싸움이 한창이다.

 

듣자 하니 길을 가로 막고 있던 경찰 중 파란색 견장을 단 경찰이 담배를 피우고 나서 담배꽁초를 길에다 버리는 것을 아가씨 2명이 목격하고는 "경찰이 법을 지켜야지 왜 법을 지키지 않느냐? 지나가는 시민의 통행을 막고 그것도 모자라서 담배꽁초를 길에다 아무렇게나 버리면 되느냐? 당장 담배꽁초를 주워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 아가씨들의 말을 무시한 채  엉뚱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계속 지나는 시민들을 통제하였다. 이렇게 몇 번 옥신각신 말싸움을 하더니, 느닷없이 경찰이 아가씨 2명의 머리채를 잡아끌어서 경찰차에 집어넣어버렸다.

 

이를 목격한 그는 경찰의 그 말도 안되는 변명과 황당한 행동에 분개해 왜 죄없는 시민을 연행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이 하는 말이 저 사람들이 경찰한테 폭력을 써서 연행 한 것이라고 한다. 이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이 있는데도 경찰이 거짓말을 한다.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 2명이 경찰들을 폭행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곧바로 타고난 우렁찬 목소리로 부당한 연행에 항의하며 "석방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민들이 모여 들어 "석방해!" "석방해!"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찰들은 시민들의 요구와 정반대로 전경을 동원해 2명의 아가씨들이 갇혀 있는 차를 여러 겹으로 에워싸버렸다. 

 

시민들은 더욱 거세게 "석방해!" "당장 석방해!"를 끈질기게 외쳤고, 결국 약 40여 분 만에 그 2명의 아가씨들은 풀려나왔다. 이 날 그 자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큰 목소리로 "석방해!"를 외친 그는 바로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박계현이다.

 

 

민주노동운동 내에 유명한 놀이꾼

 

박계현은 195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75년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중부시장의 원단 가공공장을 거쳐 1977년에 청계천 주변 봉제공장의 재단사가 되었다. 바로 전태일이 일하던 그 곳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외치다 마침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산화해 간 전태일과 같은 재단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바로 그가 일하던 그 곳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박계현이 세상일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1979년 제일교회 야학인 '형제의 집'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다. 공장 구석에 처박혀 일만 하던 그는 야학에 나가면서부터 그동안 사회로부터 받아오던 냉대와 멸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그것도 서울대를 비롯해 자신으로서는 감히 접하기 어려운 대학생들이 친구처럼, 형님처럼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신기했다. 제일교회 인근 노동자들이 아무 때나 찾아와 편안히 쉬고 자유롭게 대화하고 공부하는 '형제의 집'이라는 그 공간을 그는 참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공부도 많이 하고 사회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제일교회 다니는 노동자들, 야학 교사들과 함께 틈만 나면 데모하러 다녔고, 1980년 5월 서울의 봄을 그렇게 맞이했다. 이 무렵 그는 전태일열사의 죽음의 결과로 만들어진 청계피복노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내가 박계현을 알게 된 때가 바로 이 때였다. 당시 나는 청계피복노조 사무장이었고 그는 중부시장에서 일하는 평조합원이었다. 당시 청계천 봉제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상가 중에서도 특히 중부시장 상가 공장의 근로조건이나 환경이 열악했다. 이에 조합에서는 중부시장 근로조건 개선 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근로조건 개선이 조합의 교섭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의 동력으로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소모임을 조직했다. 그 중 '정우회'라는 소모임에서 박계현은 중요한 역할을 한 회원이었다.

 

박계현은 성격이 활달하고 목소리가 크다. 몸동작 또한 선이 굵어서 노래, 탈춤, 사물놀이, 마당극 등 문화 활동에 탁월한 재능과 끼가 있었다. 당시 박계현의 걸쭉한 "농부가" 등의 민요 노래가락은 긴장감이 팽팽한 투쟁 현장에 신명을 불어 넣어 새 힘을 돋우는 활력소가 되었다. 집회나 공연 때 그의 선 굵은 탈춤사위와 해학 넘치는 재담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는 민주노동운동 내에 유명한 놀이꾼이었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박계현은 이때 자신이 속한 탈춤모임회원, 야학회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강제해산에 항거하는 투쟁에 앞장섰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고 나왔다.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박계현은 또 다시 강제 해산당한 청계피복노조 복구에 앞장서게 된다. 드디어 1984년 4월 8일 청계피복노조는 전두환 정권의 강제해산을 무효로 하고 원상복구되었다. 이때 내가 위원장을 맡았고 박계현은 조사통계부장에 임명되었다.

 

복구된 청계피복노조는 당국의 탄압에 맞서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 투쟁을 노-학 연대를 통해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때에도 박계현은 주도적으로 투쟁했다. 이 때의 가두시위 투쟁 경험이 2008년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유연하게 촛불시위를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여간 그는 이후 노조 사무장 부위원장을 거치는 동안 1986년에 또 구속된다. 그해 봄에 구로공단에서 박영진이라는 노동자가 노동운동 탄압에 항거하다 분신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박계현이 이 사건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싸우다가 구속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징역 10월을 살았다.

 

노동운동은 이렇듯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87년 8월 노동자 대투쟁 당시 대우조선소의 이석규 노동자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박계현은 이소선 어머니(전태일 어머니)와 나 그리고 다른 지역 노동자와 함께 대우조선소로 달려갔다.

 

이 일로 인해서 박계현 등 함께 대우조선소에 가서 싸웠던 사람들이 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바로 이 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상수 전 장관이 구속되었으나 우리는 끝까지 잡히지 않아 구속되지는 않았다.

 

 

잠시 생업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돌아와

 

이처럼 엄혹한 시대의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은 구속과 수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박계현은 이러한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주체적인 삶을 위해 스스로 굴종과 억압을 거부하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롭고 해방된 삶이라 생각하기에 고난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한 가장 큰 스승은 바로 전태일 선배였다.

 

그는 이런 생각으로 90년대 초까지 노동운동을 해오다가 개인 사정 때문에 생업에 뛰어들었다. 생업을 하면서도 그는 늘 혼자 먹고 살기 위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를 가슴 속에 품었다. 특히 노동운동을 하면선 전태일의 뜻에 따라 살고 그 뜻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해왔는데 그 다짐을 스스로 배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 그리고 함께 해 온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 등등으로 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언젠가는 전태일의 뜻을 쫓아 다시 돌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2007년 7월 드디어 전태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가 늘 열망해 오던 전태일의 집인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일을 보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박계현은 신명을 다 바쳐서 전태일기념사업회 일에 몰두해 왔다.

 

지금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재정 문제를 비롯해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은 전태일의 그 아름다운 사랑을 계승 전파한다는 사명과 보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새로운 세대한테 전태일의 그 시대를 초월한 가치, 사랑, 헌신 등을 전달하고 더 나아가 제3세계 민중한테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더 낮은 곳으로 더 외롭고 억울한 사람 곁으로 가고자 한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전태일의 마음이 촛불의 마음

 

박계현은 요즘 수많은 전태일을 보기 위해서 저녁마다 촛불집회에 나간다. 그 어린 소녀들이 촛불을 드는 마음이 곧 전태일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태일이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하면서 사랑했던 그 동심이 오늘의 촛불소녀가 아닐까 생각한다.

 

박계현이 촛불을 드는 마음은 바로 전태일의 마음이다. 어린 소녀들이 촛불을 드는데 어른으로서, 학부형으로서 미안함과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마음으로 참여한다. 박계현은 이명박 대통령이 계속해서 눈속임으로 국민을 기만한다면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한테 폭력을 가한다면 어른들이 온 몸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시위대 맨 앞자리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고시철회 명박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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