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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쉽게 샀던 먹거리들조차 일일이 따지고 자제해야 하는 것이 큰 스트레스다. 나를 위해 쓴 것도, 가족을 위해 쓴 것도 특별히 없는데, 너무나 쉽게 비어버리는 지갑 때문에 참 속상하다…."

 

5월 말 소비자물가 4.9%, 생산자물가 전년 대비 11.6% 급등…. 10여 년 전 외환위기 이후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물가폭탄'에 장바구니 물가의 1차 체감자인 여성들의 내상이 깊어지고 있다.

 

전년 대비 밀가루 66.1%, 자장면 14%, 돼지고기 24.7%, 파 43.0%, 콩나물 11.3% 등 전형적인 '서민용' 생필품 물가가 두 자릿수 대에 진입하며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그래프 참조). 고속 경제성장 중인 중국의 생산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대비 8.2% 상승해 최고치라고 호들갑을 떠는 상황과 비교해 봐도 우리의 물가 상승률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연초부터 본격화된 물가폭탄에 여성들은 소량 포장 선호, 대형마트 쇼핑 자제 등 생활습관부터 고치면서 의류비, 치아교정비 등 자신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이는 추세다. 또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내려가면서 은행의 저금과 적금을 제2금융권으로 갈아타는 시도도 많이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노력만으론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기자가 만나본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 번 오른 것이 내려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는 반 체념 상태. 최근 발표된 10조원 이상이 풀리는 민생대책에도 "정부에 기대하면 뭐가 달라지나?"란 시큰둥한 반응이다. 무엇보다 '살림'의 재미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소한 듯하지만 큰 상실.

 

세 살, 여섯 살, 열 살 세 아이를 키우는 일산의 30대 전업주부 이은향씨는 "장을 보면 예전엔 10만원 정도 나오던 것이 많게는 4만원까지 더 나온다"며 "특히 아이스크림, 과자, 떡볶이 등 간식거리 가격이 크게 올라 이젠 애들 간식도 못 해주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말했다. 이어 "생활비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아이들 보육비와 교육비인데 이런 것을 어떻게 줄이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옷을 사는 것은 물론 철에 맞춰 머그컵 하나 바꾸는 것조차 이제는 '사치'로 여겨진다. 무조건 절약만을 강조하는 남편도 답답하다.

 

"이젠 남편 월급만으론 기본 생활조차 하기가 힘들다. 막내가 놀이방에 적응하면 곧바로 아르바이트라도 찾아볼 생각이다."

 

시청 앞 한 빌딩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50대 여성은 "1월만 해도 2300원 하던 소면이 얼마 전 4300원으로 오른 것을 보고 국수도 더 이상 '서민의 음식'이 아니구나 생각했다"며 한숨짓는다.

 

서소문 사무실 밀집 지역에서 8년간 10평 크기의 분식점을 운영하는 50대 여성 최명숙씨는 "재료 값에 가스비 등 실제 물가 체감률은 50~100%에 이른다"며 "그래도 단골들을 위해 아직 음식 값을 올리지 않았다"고 자위했다. 2000~4000원 사이의 메뉴가 주를 이루는데, 300~500원 사이의 가격 차이도 손님들의 발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가 폭등 후 그동안 꾸준히 이어지던 단체 간식 주문이 뚝 끊긴 것도 한 현상. 그는 궁여지책으로 가격 차이가 별로 없는 물품은 재료상에서 공급받고, 멸치 등 국거리는 중부시장에서, 채소는 영천시장에서 사는 등 산발적으로 장을 본다고 전한다.

 

10여 년 전 여성가장이 된 후 광화문에서 토스트 등 간식을 파는 포장마차를 하며 세 딸을 대학에 보낸 60대 여성은 "안 쓰는 주의로, 아주 모질게 살고 있다"면서도 수도세, 가스비 등 공과금 때문에 괴롭다. 특히 최근 조금 넓은 전세로 옮겨가면서 건강보험금이 덩달아 올라 죽을 지경이라고 토로한다. 과태료가 부가된 요금 고지서를 수두룩 보여주면서 그는 "늘 암담하다"는 말을 곱씹는다.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직장여성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일하는 40대 여성 권임영씨는 "10년 전 물가도 세세히 기억하며 검소히 사시는 시어머니를 새삼 다시 보게 됐다"며 "이제껏 내가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상 대형마트 홈페이지 생활필수품 항목을 즐겨찾기에 추가해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보며 '잉여' 쇼핑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에 걸려오는 수많은 상담전화들은 소득세조차 낼 수 없는 복지 사각지대에 처한 빈곤층의 딜레마가 물가폭탄 상황에서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상담소 관계자는 장애인 부모를 둔 딸이 대학 졸업 후 취직하면서 더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경우를 소개했다.

 

딸의 월급이 100만원이 조금 넘으면서 가족이 기초생활수급 혜택에서 빠졌고, 동시에 그동안 국가가 해결해주던 부모의 의료비와 장애수당 혜택이 줄어듦으로써 딸이 대학을 다니던 때보다 생활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 그는 상담을 하던 부모가 "'차라리 딸이 없는 게 낫다. 아니면 시집가서 독립하든지…'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더라"고 전했다.

 

물가폭등 때문에 가구당 소득 격차가 8배까지 나는 등 양극화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회 안전판인 중산층도 10년 새 10% 감소했고, 이중 7%는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적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여성들의 불안감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다. 정부와 사회가 은연중 강요하는 허리띠 졸라매기에도 한계가 있다.

 

"별 기대하지 않는다"는 여성들의 냉소적인 반응과 체념을 바꿔놓을 실효성 있고 체감도 높은 정책을 그래도 기대해 본다. 장바구니 물가야말로 민심의 바로미터 아닌가.

 

"정부 민생대책? 10조 풀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

 

정부와 여당은 연일 물가폭탄 대비 서민생활 안정대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정작 정책의 수혜자인 국민의 반응은 냉담하다. 정부는 6월 들어 '고유가 극복 민생 종합대책'을 내놓고 2009년 7월까지 10조5000억원을 지원하겠다며 곧이어 이를 골자로 한 '조세특례제한법'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핵심내용은 연 3600만원 이하 근로자와 종합소득이 2400만원 이하 자영업자들에게 대중교통 부담액의 50% 수준인 월 2만원을 환급하는 것. 하지만 과세자료가 없는 근로자 337만 명(21%)과 취업예정자, 2008년 신규취업자, 주부 등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에 대해 지원재원이 소득세가 아니라 유가 상승에 대한 세수 증가분이고, 아무 대가 없이 지원하는 만큼 세금 납부자들에게만 지원하는 것에 대해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통합민주당 이동호 전문위원은 "고유가 시대에 유류 관련 세수입의 총 규모 자체를 동결시킨다는 대원칙 하에 유류세제를 근본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경유 가격을 휘발유 가격의 85% 수준으로 지킬 수 있도록 세율을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도 정유회사의 원가 공개를 '강제'하는 법적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장창준 정책연구원은 "유가환급금의 현실화가 필요하다,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지급 방법 역시 '인별'이 아닌 '가구별'로 전환해야 한다"며 "또한 지원기준가를 리터당 1800원에서 1400원으로 인하해 실질적인 부담 경감이 되게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10조가 넘는 돈을 풀어도 지금과 같은 방식이면 민생대책 해결엔 1조를 푸는 것과 거반 마찬가지"라고 잘라 말한다. 중산층까지 적용되는 소득세 환급의 방식으론 소득세조차 낼 수 없는 비정규직이나 영세사업자 등을 소외시킨다는 주장이다.

 

그는 "기존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제도적 맹점을 보완하고 섬세히 배려해 시행하는 것이 현 경제위기에선 빈곤층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정부 예산은 세입세출에 대한 기본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며 "이런 식으로 10조나 되는 큰돈을 갑자기 지출하게 되면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강대 경제대학원 이인실 교수는 "시장의 효율성을 높여 전체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대처해야지, 국가가 주도하여 물가를 관리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특히 서민들을 위해선 '타깃팅 복지' 정책을 써야지 지금처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 정책은 정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학자로 볼 때 정부에서는 거의 모든 방법을 다 내놓았다"며 "이제 국민들도 '유류절약정책' 등을 생활화해서 정부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그:#물가폭탄, #서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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