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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꾼, 폭도, 인민재판.

참담하다. 보수신문들의 사설에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폭도 또는 인민재판을 일삼는 사람들로 비유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누구나 다 해당될 수 있다. 이미 상관조정(사실보도 차원을 넘어서 환경에 관한 정보의 의미를 해석하고 처방을 통해 변화하는 환경에 사회가 적응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기능)이라는 언론의 순기능은 마비된 지 오래다. 지금과 같은 난국에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치중하는 보수신문들의 사설을 읽기가 두렵다. 또 어떤 섬뜩한 표현들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찰 간부, 시위대에 붙잡혀 '인민재판' 당하다. (<조선일보>)
대통령은 법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가. (<중앙일보>)
'폭도가 된 시위꾼들'에게 언제까지 짓밟힐 텐가. (<동아일보>)

<조선>, <중앙>, <동아>의 28일자 사설 제목들이다. 이들 신문들의 최근 사설을 보면 제목만 봐도 설득을 넘어 선전, 선동에 가까운 표현들로 가득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신문들이다. 그 많은 지역신문들을 제쳐두고 지방에서도 단연 판매부수가 높은 신문들이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법, 입법, 행정권 모두 쥔 보수신문 사설?

"폭도가 된 시위꾼들?"
▲ <동아일보> 사설 "폭도가 된 시위꾼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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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눈과 귀가 촛불에 쏠리고 있는 요즈음 이들 신문 사설들이 올바른 상관조정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계하지 않고 무의식으로 보아 넘겼다간 금세 세뇌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법권과 입법권, 행정권을 모두 쥐고 있는 듯한 무소불위의 언론이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동아>는 28일 '폭도가 된 시위꾼들에게 언제까지 짓밟힐 텐가'란 제목의 사설에서 "정부는 폭도화한 시위꾼들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폭력시위의 주동자를 반드시 검거해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격앙된 어조로 경고했다. 한가하게 출석요구서나 보내고 있을 일이 아니라고 사법당국을 질책했다.

"동아일보 사옥 앞 게양대에서 태극기와 사기(社旗)를 끌어내리고 쓰레기봉투를 매단 뒤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광란의 작태를 연출했다"는 이 사설은 흥분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폭력시위대의 들러리를 서고 있는 사람들도 이제는 법치를 부정하고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세력과 갈라서야 한다"고까지 경고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드러나지 않은 정보의 모호성과 비약적이고 성급한 결론까지 내버렸으니 말이다. 

28일 <조선>은 더 과격한 표현을 썼다. '경찰 간부, 시위대에 붙잡혀 인민재판 당하다'란 제목의 사설에서다.

<조선>은 사설에서 "27일 새벽 공무 수행 중이던 경찰간부가 폭력 시위대에 붙들려 1시간 넘게 '인민재판'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며 "법질서가 있는 나라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전제했다.

많은 시민들이 경찰의 강경 진압에 의해 피를 흘리며 연행되는 장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한 경찰 간부를 두둔하며 비약을 통해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신문사 현관 파손했다고 폭도 취급?

경찰 간부, 시위대에 붙잡혀 '인민재판'당하다
▲ <조선일보>사설 경찰 간부, 시위대에 붙잡혀 '인민재판'당하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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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사설은  "6·25 때 인민군이 경찰관을 붙잡아 시장 바닥에서 인민재판 벌인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것도 모자라 시위참가자들을 '난동배들'로 묘사하며 "전경들은 빙초산 테러까지 당하며 시위대의 밥이 되고 있다"고 신경질까지 부렸다. 경찰을 한껏 자극하기 위한 의도가 짙게 묻어난다.

그런가 하면 <중앙>은  '대통령은 법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가'란 사설에서 대통령을 호되게 질타했다. "더 이상 촛불문화제가 아니다"라고 밝힌 이 사설은 "서울의 중심 광화문 일대가 밤마다 '촛불'이란 이름하에 사실상 무법천지"라고 규정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촛불이 평화롭게 잘만 타들어가고 있음을 모르는 듯하다.  

'폭도와 인민재판을 일삼는 난동배들이 움켜 쥔 촛불을 제발 빨리 꺼 달라'는 충고와 협박으로 가득한 세 사설을 동시에 바라본 시민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비판의식 없이 무심코 바라봤다간 금세 같이 분노하고 흥분하면서 촛불을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기 딱 알맞다. 경찰 역시 동료가 촛불 시위 참가자들에게 '인민재판'을 당했다는 대목에서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촛불은 보수언론의 사옥 주변과 서울 광화문에서만 켜지고 있는 게 아니다. 전국에서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약간의 바람만 불면 금세 꺼질 것 같은 촛불이 전국에서 꺼지지 않고 길게 불을 밝히고 있는데도 이들 신문들은 이들을 폭도와 난동배들로 묘사하고 있다.

조중동과는 다른 <한겨레>·<경향>

폭력적 왜곡보도 유감...
▲ <한겨레>사설 폭력적 왜곡보도 유감...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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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 세 신문의 좌충우돌식 상관조정 기능과 확연히 다른 신문은 없을까? 멀리 보지 않더라도 이날 아침 동시에 발행된 신문들 중에 있다. 바로 <한겨레>와 <경향신문>이다.

비록 보수신문들보다 판매시장에서 열세에 놓여 있을지라도 두 신문의 상관조정 기능은 오히려 순기능에 충실하고 있었다. 이날 <한겨레> 사설은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유감스런 폭력적 왜곡보도와 폭력적 대응'이란 제목의 사설은 보수신문의 호들갑에 일침을 놨다.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조·중·동도 이번 일을 마치 촛불의 폭력성과 정치성을 입증하는 것인 양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사회적 공기를 자처하는 언론이라면,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반성할 일이다.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자신의 보도 내용과 태도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고 반성과 성찰을 주문했다.

"<조선일보>는 광주항쟁 시민을 '총을 든 난동자' 혹은 '폭도'라고 보도하면서 신군부의 학살은 외면했다"고 지적한 <한겨레> 사설은 "28년 뒤 <조선일보>는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경찰의 폭력엔 눈을 감고, 일부 시민의 폭력을 과대 포장해 '폭력의 해방구'라고 보도했다"고 비판했다. 색깔이 비슷한 집단의 가스통 난동이나 집단 폭행엔 눈감고, 경찰에 대한 시민의 항의를 '경찰 억류'라고 보도한 행태를 같은 언론으로서 용기 있게 꼬집었다.

"떨어진 회사 로고, 깃발 대신 걸린 쓰레기봉투, 현관에 쌓인 쓰레기의 의미를 곱씹길 바란다. 어쩌면 그게 조·중·동의 오늘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이날 <한겨레>의 사설은 보수신문들의 독자들이 꼭 함께 봐야할 대목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편식증에 결려 의식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폭력' 빌미로 '쇠고기' 본질 훼손해선 안 돼

"강경 부추기는 보수언론에 정부 호응..."
▲ <경향신문> 보수언론 비판 "강경 부추기는 보수언론에 정부 호응..."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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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의심스럽다면 <경향>의 이날 1면과 사설을 촘촘히 읽기를 권한다.

'조·중·동, 강경 부추기고 정부·여당, 끌려 다니고'의 1면 기사에서 <경향>은 "촛불 민심의 수용을 다짐했던 여권이 이처럼 표변하고 있는 데는 이른바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으로 대변되는 보수신문들의 압력과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매일 아침 '조·중·동' 신문들이 촛불집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한나라당 지도부가 이를 여과없이 정치쟁점화하고, 곧이어 청와대와 정부가 대책을 내놓는 '반(反) 촛불 공조'가 형성되고 있다"고 지적한 기사는 환경감시기능에 충실했다.

그런가 하면 '비폭력만이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란 이날 사설에서 <경향>은 '쇠고기 촛불집회'가 폭력적으로 치닫고 있는데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범국민적 호응을 얻은 요인은 철저한 비폭력임을 잊지 말자고 거듭 강조한 이 사설은 그 이면을 더 크게 우려한 것이다.

<경향> 사설은 "시위가 과격화 조짐을 보이자 이명박 정권과 보수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색깔론 공세를 펴며 강경대응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정부·여당이 폭력사태를 빌미로 '뼈저린 반성'은커녕 '쇠고기 민심'을 일거에 진압하고 정국의 국면 전환을 기도하려 한다면 국민의 절망과 분노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합리적이며 윤리적으로 수용자를 설득하라

냉정을 잃지 말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마지막 결론에서 사설은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이 쇠고기 문제에 대한 왜곡보도로 국민의 분노를 샀다고 해도 회사 건물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기자의 취재 도구를 빼앗을 때, 항의의 목적은 없어지고 수단의 폭력성만 부각될 뿐이다"고 했다. 이게 제대로 된 언론의 상관조정 기능 아닌가.

이들 신문의 사설처럼 촛불시위는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던 이명박 정부를 반성케 하고, 미국을 놀라게 했다. 대통령의 사과와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계획의 사실상 폐기도 이끌어냈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보다 비폭력이다. 평화적 시위라는 전제가 없으면 다수 국민의 참여와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부와 한나라당 그리고 보수언론은 촛불시위 참가자를 폭도나 난동자들로 몰아 강경 진압하고 반미·좌파 세력이란 색깔까지 덧씌우는 조치를 쏟아내서는 안 된다. 조·중·동 역시 촛불집회에 색깔을 씌우고 강경 대응을 주문하면 정부가 이를 수용하는 양태가 반복되면서 결과적으로 권력과 시민이 거리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는 상황이 가속될 뿐이다.

설득은 언론의 정당하고 고유한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언론인이 취하는 설득 방법이다. 언론인은 솔직하고, 정직하고, 합리적이며, 윤리적으로 수용자를 설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왜곡하고, 속이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 설득하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국민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태그:#상관조정기능,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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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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