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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김소영 씨의 허락 하에 취재기자가 시각장애인의 시점에서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자 주>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에 가기로 한 날. 소매 깃 속으로 파고드는 신선한 아침 공기는 나를 더욱 설레게 했다. 두 명의 시각장애인과 두 명의 정안인이 함께한 남도여행은 파릇파릇한 싱그러움을 싣고 ‘녹색의 땅’으로 달음질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오느라 아침부터 분주했다는 얘기, 재료를 구입해 직접 만든 비누를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는데 반응이 좋았네, 화장품은 어떤 게 좋더라 등 여인네들의 시시콜콜한 수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낯선 곳에 간다는 것은 언제나 설렌다. 설렘이 기다림으로 바뀔 무렵, 네 여인을 태운 차는 모내기 준비에 한창인 논길을 지나 소쇄원 주차장에 당도했다.

광주 무등산 원효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산모퉁이를 휘감아 도는 곳에 오백년의 숨결을 품은 소쇄원이 있다. 이곳을 만든 이는 양산보(1503~1557)라는 사람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사약을 받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평생을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며 처사의 길을 걷게 된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음식들

 

소쇄원도 식후경. 약초음식 전문점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니 예약하지 않아서 시간이 좀 걸릴 거란다. '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나' 투덜거리며 기다린 지 30여분 만에 음식을 맛보게 되었다.

선인장전, 우엉잡채, 약초보쌈 등이 전채 요리로 나오고 다음엔 각종 채소에 인삼과 마까지 곁들여진 밀전병을 삼색소스(파인애플, 오미자, 오디)에 찍어먹는 메뉴가 나왔다. 아카시아꽃 튀김과 아카시아꽃 샐러드가 뒤를 이었다. '기다린 보람이 이런 거구나.'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에 다들 놀랐다.

 

본 메뉴로는 쑥색밥에 각종 나물, 약초 김치와 반찬들이 나왔다. 치자로 노랗게 물들인 무채 위에 빨간 딸기소스가 달콤하게 듬뿍 뿌려져 나오는가 하면 샐러리 맛이 나는 소스에 버무려진 아삭한 연근무침에 노란 강황 옷을 입은 고등어구이까지 낯선 반찬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약초 음식 덕분에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연둣빛 누룽지와 상큼한 식혜, 낯선 맛의 향연은 후식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무마다 선현들의 메시지

 

소쇄원 입구에서 소쇄원 설명과 약도를 보았다. 소쇄원 안내그림을 보며 친구가 말했다.

 

“세상 벼슬 의미 없다고 시골로 들어온 사람이 뭐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았대?”

“그러게 말야.”

 

본격적인 소쇄원 탐방에 나섰다. 입구부터 대나무들이 양 옆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어디선가 솔솔 꽃향기도 풍겨온다. ‘휴대폰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옛 광고 멘트가 떠올라 휴대폰을 정말 꺼야 하나 잠시 고민도 했다.

 

 

 대숲길을 따라 걷다가 광풍각에 이르렀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자그마한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진다. 물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근데 여기 참 희한하다. 정자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어떻게 생겼는데?”

“정자 가운데에 사각형의 방이 있는데 삼면이 다 트여있어.”

“정말?”

“앗! 문이 천정에 매달려 있다.”

 

주말마다 공연 펼쳐져

 

죽녹원에는 주말마다 공연이 펼쳐진다. 담양군청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있고 담양군청에 문의하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또한 토요일마다 버스투어를 실시하고 있으며 일요일엔 참살이(웰빙)체험도 만끽할 수 있다.(담양군 대표전화 061-380-3114, www.damyang.go.kr)

사각형의 마루 가운데에 한사람이 누우면 딱 맞을 정도 크기의 정사각형 모양의 방이 있다. 세 칸짜리 문이 벽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인데, 세로로 서 있어야 할 문들이 모두 천정과 평행하게 눕혀진 채 천정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 면이 모두 트여 있으니 마치 정자처럼 바람이 솔솔 통할 수밖에.

 

트여있지 않은 벽 쪽의 마루가 유난히 높았는데, 그 아래로 불을 때던 아궁이가 있었다. 최근까지 불을 진짜로 지폈던 것일까. 불에 탄 재 냄새가 알싸하게 코끝을 맴돈다. 저 방에 양산보라는 이가 홀로 앉아 자연을 벗 삼아 책을 읽었겠지? 이곳에 앉아 있노라니 정말 세상 벼슬 따위 없어도 좋겠다 싶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진다.

 

  광풍각에서 제월당으로 가는 길목에 일각문이 있다. 고개를 숙여야만 지날 수 있는 작은 문이다. 고개를 살짝 들어보았더니 머리가 문 윗면에 ‘쿵’ 하고 닿는다. ‘웬 문을 이리도 작게 만들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야’라며 투덜댔으나, 친구가 ‘겸손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기 위해 문을 일부러 작게 만든 것은 것’이라 설명해준다.

 

“아까 그림에서 봤을 땐 집이 꽤 큰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매우 아담한 집이야.”

“세상 벼슬 싫어 낙향한 사람이 살았던 곳 맞구먼. 하하.”

 

  소쇄원은 정말 평안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바람소리는 바람소리대로 물소리는 물소리대로…. 그 모든 것이 댓잎 위에서 춤을 춘다. ‘세상살이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보자’ 하는 삶에 대한 여유가 피어올랐다.

비온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광풍각’과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제월당’.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살던 이들이 지은 제월당과 광풍각의 의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공이 부족해서 일까. 다만 머리가 복잡할 때 잠시 와서 쉬어가기엔 참 좋은 장소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나무 숲 피톤치드로 건강 채우기

 

  외나무 다리를 조심히 건너 소쇄원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죽녹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30분가량을 달려 도착한 죽녹원. 입장료가 1000원인데, 복지카드를 제시하니 동행인까지 모두 무료로 입장시켜 주었다.

 

죽녹원에는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철학자의 길’, ‘선비의 길’, ‘성인산 오름길’, ‘추억의 샛길’, ‘샛길’ 이렇게 여덟 가지의 길이 있다.

 

초입은 운수대통길로 시작되었다. 대나무통밥 만들 때 사용하면 좋을 만큼 두툼한 대나무들이 길 양옆으로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늘이 시원했다.

 

걷고 또 걸어도 대나무숲이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 듯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운수대통길’을 계속 걷다가 ‘철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우리를 앞서 가던 사람들이 되돌아 나오는 게 아닌가.

 

  “왜 다시 오세요? 그쪽에 나가는 길 없어요?”

  “이 길로 가면 저 멀리 돌아서 산 위로 올라가게 돼요.”

 

 우리도 그들을 따라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이번에는 ‘샛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하늘 향해 대나무들이 서 있고 바닥에는 대나무 뿌리들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은 대나무들을 만져볼 수 있겠는가.

다른 나무에 비하면 매우 가느다란 대나무인데 그 높이는 어떤 나무보다 크고, 울타리로 사용된 대나무는 매우 튼튼하기까지 했다. 대나무 그늘이 참 시원하다. 한여름에도 이 울창한 대나무 숲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겠지?

 

인솔자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기분 좋은 피곤함이 몰려온다.

 

  “참, 유럽여행 간다며? 준비 잘돼 가?”

  “응, 다음 주에 갈 거야. 같이 갈 사람도 구했어.”

 

난 다음 주에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5년 전부터 가고 싶어서 준비해왔던 여행인데 드디어 알맞은 여행코스를 정하고 함께 떠날 동행도 구했다.

 

여행정보 사이트에서 동행인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 전화를 걸어 내 상황을 설명했다.

 

난 시각장애인이고 유럽여행 동안 안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나와 동행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나의 다섯 번째 여행 계획이 잡혔다.

방송팀과 함께 갔던 히말라야와 아프리카 여행, 그리고 나 혼자 떠난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 그리고 이번엔 유럽 5개국이다.

 

여행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가 인복이 참 많다는 것이다. 호주에 갔을 때는 현지 유학생 집에서 머물며 함께 캔버라 여행을 하고 여름의 크리스마스 파티도 신나게 즐겼다. 오늘의 담양여행만 해도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올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여행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 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는 것은 꼭 시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나라를 떠도는 여행생활자의 삶을 살아보고 싶을 만큼.

         

  김소영

   동행취재 김수현

덧붙이는 글 | 시각장애인을 위한 격월간 잡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 6월호 게재


태그:#시각장애, #담양, #소쇄원, #죽녹원, #한국점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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