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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1 -

 

 지난해 6월 5일, 혼인신고를 하면서 제 본적이 바뀌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인천 중구 송월동 3가 3번지’였으나, 지난해부터는 ‘인천 동구 창영동 4-1번지 4층’으로 바뀌었습니다.

 

 혼인신고를 하니 본적이 바뀌는구나 하고 새삼 느끼면서, 앞으로 태어날 아이도 먼 뒷날 좋은 옆지기를 만나서 새 살림을 차리기 앞서까지는 이 본적을 받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이한테 본적이 될 지금 우리 집 주소가 앞으로도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온 나라가 재개발(뉴타운)로 들썩들썩한 이 같은 세상에서. 더욱이, 인천처럼 다달이, 아니 거의 주마다 길그림이 바뀌고 있는 터전에서.

 

 그래도 우리 아이가 태어나고 어느 만큼(몇 해 동안)은 이 집에서 살아갈 수 있을 터이니, 아이가 자기 어릴 적을 떠올릴 수 있다면, 자기가 태어난 집과 골목과 동네와 이웃 이야기가 마음에 새겨지리라 봅니다.

 

 문득,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고 내가 자란 동네는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제 본적대로 인천 중구 송월동 3가 3번지라고 생각했는데, 형이 넌지시 말하기를, 본적이 아닌 다른 데에서 태어났을지 모른다고, 도화동이 아닐까 싶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 동사무소에 가서 ‘기본증명서’라는 서류를 떼었습니다. 이 서류에는 제가 태어난 곳이 나옵니다. 1000원을 치르고 받아든 서류를 펼칩니다. 헛. 제가 태어났다고 하는 곳은 ‘인천 남구 도화동 624번지’입니다.

 

송월동이 아닌 도화동이라고? 인천 길그림책을 펼쳐서 도화동 624번지가 어디께인가 헤아립니다. 제물포역과 수봉공원 사이 언덕받이입니다. 이곳 도화동도 이웃 숭의동과 묶어서 어마어마한 재개발 계획이 잡혀 있는 터. 624번지라고만 하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통반수가 많은 동네인데, 어디께인지 찾을 수 있으려나? 찾으면 좋고, 못 찾아도 하는 수 없고, 그래도 그곳 느낌이라도 헤아려 볼 수 있으면 될 테지, 하고 생각합니다.

 

 한낮 뜨거운 햇볕이 조금 수그러든 저녁 여섯 시, 자전거를 끌고 길을 나섭니다.

 

 - 2 -

 

 지금 사는 창영동 집에서 나와 철길을 따라 죽 올라갑니다. 학교를 마친 고등학교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들 옆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창영동, 금곡동, 숭의동, 도원동이 만나는 꼭짓점이 되는 도원역 앞 네거리에서 제물포역 쪽으로 꺾습니다.

 

옛 도심지라서 자잘한 동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 왼쪽으로 가면 송림동이고,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유동, 경동, 율목동, 선화동, 신흥동, 신생동 들이 나옵니다. 뒤로 동인천역께로 가면 인현동, 답동, 화평동, 북성동, 내동, 전동 들이 나오고, 이 뒤가 송월동과 만석동입니다.

 

 찻길을 달리며 동이름을 하나하나 읊어 봅니다. 어린 날 그토록 쏘다니던 온 동네 골목길 이름하고 짜맞추어 봅니다.

 

 

 태어난 곳 도화동에서 보낸 일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데, 가 본들 얼마나 떠올릴 수 있을는지. 부모님 심부름으로 언덕길을 다다다 뛰어내려와 구멍가게에 가서 무언가를 사들고 잠깐 골목에 섰다가 다시 다다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올라가던 일 하나만은 또렷이 떠오릅니다.

 

 숭의세거리 앞 건널목. 옛집 찾기만 하기보다는 골목길 나들이도 하면서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찻길 달리기는 그만하고, 세거리 모퉁이에 있는 ‘파도수퍼’ 옆으로 난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골목으로 접어들고 안쪽으로 5미터쯤 들어가니, 찻길을 싱싱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잦아들고 조용합니다.

 

 조용한 골목 안쪽에 아이를 업거나 한손을 잡고 거니는 아주머니들이 보이고, 아이를 보는 할머니가 보입니다. 호젓한 골목을 천천히 달리며 조금씩 비알이 지는 안쪽으로 들어가니 왼편으로는 인천남중 건물. 슬몃슬몃 비알을 타고 오르다가는 잠깐 멈춥니다.

 

‘화장실 앞이니 주차하지 말라’는 글월을 벽에 적어 놓은 집이 보입니다. 벽에다가 이렇게 적어 놓을 만큼이라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 집에 사는 사람을 괴롭혔을까요. 옛날 집들은 뒷간이 밖에 있고, 이 집도 그런 옛집 가운데 하나입니다.

 

 

 드문드문 차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이지만, 오가는 차는 거의 없습니다. 날이 더우니, 적잖은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발을 드리웁니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 소리, 집안에 들인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는 아직 숭의동. 남구 숭의동은 무척 넓어서 1동부터 4동까지 나뉘어 있습니다. 동이름을 숫자로 나누기보다는 새로운 이름으로 나누면 한결 나을 텐데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서울도 보면, 봉천동이나 신림동 같은 데는 10동도 넘어가는 줄 아는데, 새로운 동이름을 붙일 만한 남다름이 없어서 숫자만 줄줄줄 늘어붙이는지 모르나, 오랜 세월 사람들이 터잡고 살아온 발자취를 짚어 본다면, 얼마든지 새 동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내리막을 죽 달렸다가 오르막을 다시 올랐다가 하는 동안, 골목 안 빈 집터 자리를 바지런히 일구어 놓은 텃밭을 보고, 꽤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봅니다. 이 동네를 재개발한다고 할 때에는 저 우람한 나무도 송두리째 잘라 버리려나. 아마, 옮겨심을 생각은 않을 테지. 옮겨심는 돈은 많이 들지만, 새로 사서 심는 돈은 적게 들 테니까.

 

 

 숭의4동 골목길을 걷는 빠르기로 자전거를 달립니다.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이어진 이곳 골목에도 빈자리 텃밭이 있기는 하지만, 집집마다 울타리에 주루룩 내어놓는 꽃그릇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래도 골목치고는 조금 넓어서 자동차가 많이 오가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찻길과 견주면 거의 안 지나가는 셈이지만, 이만한 넓이(차 두 대가 드나들 만한 넓이)가 되니, 섣불리 꽃그릇을 밖에 내놓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살림집 앞을 지나가며 ‘열린 대문 안쪽’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면, 집안은 하나같이 꽃잔치입니다. 어느 집이고 안쪽에는 꽃그릇을 잔뜩 벌여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꽃그릇을 바깥으로는 좀처럼 내놓지 못합니다. 차에 밟힐 수 있고, 주정뱅이가 걷어찰 수 있으며, 누군가 슬쩍할 걱정이 있으리라 봅니다. 널찍한 골목은 어쩐지 쓸쓸하고 썰렁합니다.

 

 이렇게 한참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언덕마루에 접어듭니다. 언덕마루까지 작디작은 집이 줄줄줄 이어져 있습니다. 앞쪽으로는 옛 ‘선인재단’ 건물이 보입니다. 둘레에 시내가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비가 오락가락한 덕분에 조금은 파래진 하늘이 보입니다. 굴뚝에 빨래줄을 묶어서 빨래를 촘촘히 널어 놓은 살림집이 보이고, 너른 마당에 심은 나무가 큼직하게 자란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도화동은 찾아갈 수 있으려나.

 

 - 3 -

 

용정초등학교 앞을 지납니다. ‘용정’이라고 하면, 누구보다도 시인 윤동주 님이 떠오르는데. 그러나, 인천에도 ‘용현동’이 있고, 용우물거리가 있으니 초등학교 이름으로도 ‘용정’이 있을 테지요. 초등학교 앞 ‘또와문구’를 지납니다.

 

오른쪽 가파른 비알을 올라가면 수봉공원. 어느새 이렇게 이어지는 길이 되었네. 초등학교 울타리를 끼고 왼쪽 내리막으로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난 샛골목을 봅니다. 샛골목 앞에 멈추어 앞을 내다봅니다. 큰길 하나 건너로 꽤 가파른 언덕골목이 보입니다.

 

 

 시간이 되면 저기까지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샛골목을 따라서 걷습니다(나중에 집에 와서 길그림책으로 보니, 길이 없다고 나와 있는 곳입니다). 오른쪽으로 수봉공원을 끼고 있는 숭의4동 19번지. 갑자기 모든 소리가 잠들고, 뻐꾸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니 다른 새소리도 여럿 들립니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립니다.

 

공원 높은 벽을 한쪽에 끼고 있는 지붕 아주 낮은 집들 앞으로는 잘 일구어 놓은 밭이 있습니다. 시멘트가 아닌 흙으로 된 길을 걷습니다. 고작 이십 미터밖에 안 될 듯한 길인데, 한쪽은 돌로 쌓아 얕은 담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냥 지나가기 아쉬워 가볍게 맨손운동을 하며 큰숨을 들이마십니다. 바람맛이 다릅니다.

 

 

 ‘숭의재개발4구역’인 골목을 빠져나오니 왼편으로 내리막. 그리고 ‘수봉수퍼’. 내리막을 씽 하고 내려오다가 수퍼 앞에서 멈추어 사진 한 장을 찍고 숭의4동 7번지 가팔막을 올라갑니다. 웬만큼 자전거 잘 타는 사람이 아니면 못 올라갈 만한 가팔막입니다.

 

여기는 자동차는 아예 올라가지 못할 듯합니다. 잘못 올라갔다가는 뒤집어지겠어요. 눈이 오고 길이 얼면, 이 동네 사람들은 퍽 멀리 에돌아가야겠구나 싶습니다. 가팔막 두 쪽 끝으로는 계단이 따로 놓여 있습니다.

 

 가팔막 끝으로 올라오니, 고 바로 위에서 초등학교 아이를 보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저를 죽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꿉벅 인사를 하고 지나갑니다. 오른쪽으로 잠깐 가 보았다가 자전거 머리를 돌려 왼쪽으로 돌아옵니다. 숭의4동 7번지 208호 구멍가게를 지나니 길이 끊어집니다.

 

아래로 넓게 보이는 시내를 구경할 수 있도록 걸상 하나 놓여 있습니다. 구멍가게 손님들, 또는 가게 일꾼이 여기 앉아서 담배를 태우며 시내 구경을 하는 듯합니다. 해질녘 모습이 퍽 싱그럽습니다. 길이 끊어진 안쪽을 조심조심 들어가니 은율탈춤전수관하고 이어집니다.

 

 멈추어 서서 머리속으로 이래저래 짜맞추기를 합니다. 요 길이 요렇게 이어지고, 고 길이 고렇게 이어졌구나. 아직까지 도화동에는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한 주제에, 새로운 골목길만 익히고 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며 내리막 골목을 구비구비 누빕니다. 그동안 안 누벼 보았지 싶은 골목을 하나하나 누빕니다. 숭의4동 사무소를 얼핏 스쳐 지나가다가 벽에 붙은 번지표를 바라보는데, 숭의동에서 도화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도화동 641번지.

 

 641번지면 조금 더 들어가면 624번지도 나오려나? 자전거 페달을 조금 늦추면서 오르락내리락 골목을 누빕니다. 어딘가 낯익다고도 느껴져서 자전거에서 내려 사진을 찍자니, 삼십 미터쯤 떨어진 골목 안쪽에서 어느 계집아이가 ‘저기 아저씨 무슨 사진 찍어요?’ 하고 누군가한테 묻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옆에서 ‘저쪽 골목을 찍나 보지’ 하고 대꾸해 줍니다. 634번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골목. 언제 왔는가 헤아려 보니, 지난해 여름에 이곳을 걸어서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볕이 참 좋아서 집에 있기 아까워 사진기 들고 이곳을 두루두루 누빈 일이 떠오릅니다. 동일아파트, 수봉아파트, 제물포성당.

 

여기구나. 여기가 624번지구나. 이 가운데 내가 태어난 집은 어디였을까. 어머니는 그 집이 어디인지 떠올릴 수 있으시려나. 이제는 허물리고 없을까. 624번지에는 새 빌라가 꽤 들어서기도 했지만, 남아 있는 골목집도 제법 있는데.

 

 

 시멘트로 바른 계단 한켠에 꽃밭을 일군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자전거는 벽에 기대고, 이 앞에 쭈그려앉습니다. 아스팔트로 된 길바닥은 얼마 안 된 길바닥일 테고, 시멘트로 된 길바닥은 내가 밟아 본 길바닥일까. 그때 길바닥은 시멘트가 아닌 흙이었을까. 벽은 어떠했을까. 지붕은. 골목길 계단은. 우리 형은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저 제물포성당에서 받았으려나. 형이 태어난 곳은 도화동 280번지이니, 세례를 받을 때에는 어쩌면 여기 제물포성당에 왔을지도.

 

 

 - 4 -

 

 옆지기한테 전화가 옵니다. 곧 주민대책위 모임이 있는데 안 오느냐고. 배가 꽤 고픕니다. 곧 간다고 이야기하고 자전거를 탑니다. 오던 길을 되짚지는 않고, 오던 길과는 다른 골목을 달리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음에 다시 와야지. 그리고 그때에는 형이 태어난 골목인 도화동 280번지에도 가 보아야지.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태그:#골목길, #골목, #도화동, #인천, #도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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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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