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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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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총기'가 있어 한번 간 길도 아주 잘 찾았다는데 어찌된 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길치'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간 길도 툭하면 방향감각을 잃어 한참 가다가 "오매, 이 길이 아닌가벼" 하면서 돌아 나오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발품을 더 파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번에는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함께 간 일행을 놓쳤다고 해야 맞겠네요. 사진을 찍으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일행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거든요. 덕분에 일행을 찾는다는 구실로 이쪽 길을 기웃거려 보고, 저쪽 길도 기웃거리면서 낯선 동네를 구경했답니다.

10일, 도심역에서 어룡저수지 옆을 지나 예봉산 새재고개를 넘어 진중리까지 걸었습니다. 걸은 거리는 얼추 14km쯤 됩니다. 이번 도보여행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어 낯선 길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도심역은 용산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전철역 중의 하나입니다. 덕소 다음역이지요. 중앙선 전철은 용산에서 출발해 팔당까지 운행됩니다.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고 동네구경을 하다

배추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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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역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면 덕소중학교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옵니다. 표지판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갑니다. 3분쯤 걸어가면 고려대학교 부속실습농장이 나옵니다. 농장 옆의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농장 안을 들여다보니 잘 자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길 한 쪽에 파밭이 보입니다. 파꽃이 피어 있네요. 조금 지나니 이번에는 배추밭이 나타납니다. 배추 잎에는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이 듬성듬성 남아 있습니다. 유기농으로 재배를 하나 봅니다.

고추밭도 지나고 가지밭도 지납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빈 밭도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냥 놀려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만간 무엇인가를 심겠지요. 저리 부지런하게 농사를 짓는 농부는 누구일까, 궁금해집니다.

땅의 힘은 정말 대단합니다. 땅은 아주 작은 씨를 받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수많은 생명을 키워 몇 배나 되는 수확을 거둬들이게 해줍니다. 누가 땅에게 그런 힘을 주었을까요.

꽥꽥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주위를 둘러보니 철조망 안에 거위 두 마리가 갇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지나가자 참견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어이, 거위 아저씨 안녕! 인사를 하면서 지나갑니다. 기왕이면 기념사진도 한 장 찰칵. 그런데 얘들, 거위 맞나요?

거위
 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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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길을 지나니 자동차도로가 나옵니다. 길을 건너니 신빈신씨 묘역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신빈신씨는 태종의 후궁이지요. 태종이 죽은 뒤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건강장수마을 도곡1리' 돌 표지판이 보입니다. 세운지 얼마 안 되는지 돌이 아주 깔끔하고 깨끗합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갑니다. 마을 안 쪽에 비료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멀리 축사가 보이고, 누렁소가 여러 마리 있습니다. 그 옆의 축사에는 얼룩소 여러 마리가 보입니다. 소들을 보니 '미친 소' 생각이 저절로 납니다. 이날, 광화문에는 '명박산성'이 세워졌고, 70만 명이 모여 촛불을 높이 들었지요.

동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또 커다란 축사가 보입니다. 건초더미가 잔뜩 쌓여 있고, 안쪽에 누렁소가 몇 십 마리가 있습니다. 저렇게 소를 많이 키우는데 '미친 소'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건 아닐까, 궁금합니다.

누렁소를 보면서 '미친소'를 생각하다

베짱이 아저씨 벽화
 베짱이 아저씨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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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걷다보니 벽화(?)가 보입니다. 양철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담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입니다. 행복한 표정으로 나뭇잎 바이올린을 켜는 베짱이와 무거운 짐을 진 개미 그림입니다. 개미의 표정도 아주 밝습니다.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그린 흔적이 역력합니다. 누가 그렸을까?

접시꽃이 피어 있는 집을 지나 조금 걷다보니 밭 한쪽에 호박넝쿨이 이어져 있습니다. 호박꽃 한 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호박잎을 보니 호박잎쌈이 먹고 싶어지네요. 제가 호박잎쌈을 무척이나 좋아하거든요. 아, 군침 넘어가네.

어,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가던 일행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인도행 회원들은 정말 잘 걷습니다. 그래서 같이 걷다보면 저는 늘 맨 끝으로 처져 버립니다. 이렇게 볼 거 안 볼 거 죄다 찾아 보면서 걸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길을 나서면 왜 그리 눈길을 잡아끄는 것들이 많은지, 원.

세 갈래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을 봐도 저 길을 봐도 사람의 흔적이 없습니다. 에구, 나만 놔두고 다들 어딜 가셨노. 결국 휴대폰으로 일행이 있는 곳을 알아봅니다. 휴대폰이 이럴 때 유용하네요.

일행을 잃어버린 와중에도 연탄재로 만든 담이 눈길을 잡아끕니다. 보고 가야지요. 연탄재 사이사이에 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검은 몸을 활활 태워 하얗게 변한 연탄재가 이런 용도로도 쓰이네요.

일행이 알려준 대로 곰탕집 가는 길을 따라 가니 예봉산·운길산 등산 안내 표지판 옆에서 일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탄재 담.
 연탄재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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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로 만든 담에서는 풀이 자라고...

예봉산 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넓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나비인지 나방인지 분간이 안 되는 곤충이 날개를 퍼덕이며 어지럽게 날아다닙니다. 몇 십 마리는 족히 되는 것 같습니다.

산길은 오르막이 나오긴 하지만 걷기 좋습니다. 숲이 제법 우거졌네요. 잘 자라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아름답게 피어난 들꽃들, 싱그러운 바람.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길옆에 팔각정 모양의 정자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산 속에서 도시락을 먹는 기분, 아주 삼삼합니다. 맛도 더 좋지요.

식사가 끝난 뒤 하모니카 연주회가 열립니다.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노래도 부릅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길을 나섭니다. 세정사 가는 길로 가는 것이지요.

내려가다 보니 산 한쪽에 금계국이 무리지어 피어 있습니다. 노란색 꽃이 햇빛 아래서 황금처럼 빛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산딸기가 지천입니다. 산에서 가끔 산딸기가 열려 있는 것을 봤어도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입니다. 산딸기를 따서 입안에 넣습니다. 붉은 색으로 잘 익어 달콤하려니 했더니 신 맛이 혀를 자극해 입안 가득 침이 고입니다.

산딸기만 먹은 것이 아니랍니다. 내려 오다보니 오디가 열려 있어 그것도 따먹었습니다. 도보여행이 아니라 산딸기·오디 찾아 나선 여행이 된 셈이지요.

산딸기
 산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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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한 쪽으로 계곡이 있어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계곡으로 내려가 맑은 물을 들여다보면서 잠시 쉽니다. 물에서는 시원한 기운이 솔솔 올라와 땀을 식혀줍니다. 아, 시원해라.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요.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이 나오고, 마을을 지나면 동국대 운길산 연습림이 나오지요. 그 길을 따라 주욱 걸어가면 진중1리 마을 표지판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곳이 이날 도보여행의 도착지입니다.

점심식사 하고, 쉰 시간을 빼면 네 시간정도 걸었습니다. 걸은 거리는 14km쯤 됩니다.

걷고 또 걷다보니 걷기에 중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걸어서 삼십 분 걸린다고 하면 차 탈 생각을 먼저 했는데 요즘은 삼십 분 걷는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야 가뿐하게 걸을 수 있지요.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이래서 마음가짐이 중요한가 봅니다. 걷기,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 마음도 넉넉해집니다.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한번, 걸어 보시죠.


태그:#도보여행, #예봉산, #금계국, #도심역, #진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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