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슬기. 충청도에선 올갱이라 부르지만 내 고향에선 대사리라 불렀다.
 다슬기. 충청도에선 올갱이라 부르지만 내 고향에선 대사리라 불렀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추억의 시렁에서 내려놓는 다슬기에 얽힌 이야기

어제, 대전 역전시장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간 김에 다슬기 한 그릇을 사왔다. 사람이 나이 들면 그에 따라 입맛도 변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그렇게 갈치를 좋아하던 사람도 어느 한 순간부터 비린내가 싫다고 도리질 하는 걸 봤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입맛이 골백번 변한다 쳐도 다슬기 된장국을 애호하는 내 소박한 식도락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슬기는 어린시절 고향에서의 추억과 결부된 잊을 수 없는 사물이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왔다. 그런 내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두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다슬기와 지게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무꾼 노릇은 아주 실컷 했다. 그 후에도 어쩌다 고향에 가면 지게를 져야 했다. "도시에 나가서 공부하더니 도도해졌다"라는 말을 들을까 봐서였다. 다슬기 잡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다슬기 잡이는 즐거웠다. 그것은 일종의 놀이기도 했다.

다슬기는 지방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전라도에선 대사리라고 부르지만, 충청도에선 올갱이, 강원도에선 꼴부리, 경상도에선 사고둥 등으로 부른다. 다슬기는 다 커야 길이 3~4cm를 넘지 않을 만큼 작은 연체동물이다. 그 바람에 잉어 등 민물고기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다슬기를 잡았지만, 주로 봄 · 여름에 많이 잡았다. 다슬기는 봄이 되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꼼짝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이끼류나 플랑크톤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이다.

다슬기를 잡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다슬기는 야행성이다. 낮에는 물 속의 크고 작은 돌 밑에 숨어서 은둔의 시간을 즐긴다. 아주 지독하게 고독을 즐기는 녀석들은 모래 속으로 깊숙이 박히기도 한다. 다슬기가 숨어 있을 만한 돌멩이를 주워 올려 뒤집어 주면 된다. 그러면 바위에 빨판을 붙인 채 다닥다닥 붙은 다슬기가 보인다. 그것을 그냥 주워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름밤엔 횃불을 켜들고 다슬기를 잡기도 했다. 낮에는 돌 밑에 숨어 꼼짝 않던 다슬기들이 밤이 되면 은둔을 끝내고 돌 위로 슬슬 기어올라오기 때문이다. 낮이라면 하루 종일 잡아야 할 양을 밤에 한 두 시간만 잡으면 됐다. 그 시절엔 다슬기를 잡으려 가려면 그저 빈 바구니 하나만 들고 나서면 되었다. 다슬기를 잘 잡으려면 물안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대전으로 이사오고 나서야 알았다.

충북 옥천에 가면 군청으로부터 다슬기 채취 허가권을 내고 다슬기를 잡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슬기 잡이가 생각보다 훨씬 진화(?)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분들은 해가 저문 뒤 강변에 매둔 소형보트를 몰고 나가 올갱이를 그물로 끌어 담는다고 한다.

무거운 납봉돌이 줄줄이 달린 그물은 아래로 가라앉아 밑바닥까지 사그리 훑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몇 말 정도는 거뜬히 잡는다는 것. 그래도 산란을 거듭하는 다슬기는 번식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자잘한 새끼는 도로 놓아준다고 하지만, 다슬기를 잡는 방법이 반생태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아무리 생업이라지만 너무 무자비한 어로작업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요즘엔 다슬기 잡이가 새로운 여행 방식으로 각광받기까지 한다. 다슬기의 수난은 이후로도 죽 계속될 전망이다.

다슬기는 쪽, 쪽 소리를 내며 까먹어야 제맛

잡아온 다슬기는 된장을 풀고나서 다글다글 끓인다. 우리 집에선 매운 고추와 대파만을 송송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이는 외에 별다른 것을 넣지 않았다. 그러나 충청도 쪽에선 아욱과 부추 등을 넣고 끓인다. 부추를 넣는 건 모르지만, 아욱을 넣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욱 줄기엔 끈적끈적한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다슬기 국물의 담백한 맛과 궁합이 맞을 것 같지 않다. 전라도에 가면 된장을 전혀 쓰지 않고 대사리국을 끓이는 곳도 있다. 다슬기에서 나온 파르스름한 물이 무척 보기 좋다.

내가 다슬기를 까먹던 방법은 이랬다. 먼저 다슬기국에서 다슬기만 건져 따로 놔둔다. 그리고 국물에다 밥을 말아 먹고 난 다음 본격적으로 다슬기 까먹기에 들어간다. 다슬기를 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바늘로 속살을 찔러 살짝 당겨 끌려나온 속살을 입 안으로 털어 넣는 방법도 있다. 바늘이 없을 땐 탱자나무 가시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귀족적이라 할 수 있다. 다슬기의 꽁무니를 이빨로 살짝 깨트리고 나서 앞쪽을 쪽, 쪽, 소리를 내면서 빨면 다슬기의 부드러운 수육이 입 안으로 쏙, 들어온다. 난 약간 쌉싸름하면서도 고소한 그 맛이 좋았다. 태어나서 맨 처음 느낀 매혹은 다른 무엇도 아닌 다슬기의 맛이었다.

한여름 밤,  램프를 켜고서 툇마루에 앉아 달려드는 모기와 나방을 연방 쫓아가면서 다슬기를 까먹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즐기는 식도락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술 취한 다음 날, 쓰린 속을 달래고자 다슬기 해장국을 찾는 술꾼들에겐 그런 식도락이 있을 리 없다.

충북 옥천이나 영동에 가면 올갱이 전문 식당이 많다. 수제비·올갱이칼국수·올갱이덮밥·올갱이전골·올갱이무침·올갱이전·올갱이술 등 올갱이를 재료로 한 다양한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올갱이 수육 무침은 술 안주로도 좋다. 다슬기는 국물 맛도 일품이지만, 신경통에 좋고 시력을 강화시키며 철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빈혈에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성질은 서늘하고 맛은 달며 독은 없다. 간장과 신장에 작용하며 갈증을 그치게 하고 뱃속의 창을 치료하며 간의 열과 염증, 눈의 충혈과 통증을 다스리고 대소변을 잘 나가게 한다. 반위와 위 냉증 및 위통과 소화불량을 치료한다"라고 다슬기의 약리작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슬기에서 나오는 푸른 색소가 간 해독에 좋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병원에서 위 CT를 찍은 적이 있다. 술로 곯은 것치고는 의외로 아주 깨끗하게 나왔다. 아마도 내 위장 세포 중 8할가량은 다슬기가 조성한 것일 것이다.

눈이 짓물러도 내장만은 오들오들 푸른 삶

그렇게 나와 평생 고락을 함께한 다슬기건만, 정작 다슬기를 노래하는 시편은 매우 드물다. 내 뇌 속에 저장된 다슬기에 관한 시라곤 이하석 시인의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라는 시와 안효희 시 '올갱이는 내장이 푸르다'가 전부다. 게다가 이하석 시인의 시는 바다다슬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한국문연

관련사진보기


푸른 이끼를 먹고
푸른 물소리를 들은 탓일까 

온통 푸른 몸 푸른 소리를 내며
푸르다 푸르다 멍이든 슬픔을 헹군다
살아갈수록 뱅뱅 어지러운 몸 야위어가고
가슴속 불씨 사그라진다 

그래도 세상은 빛이어야 한다고
냇물 반짝이는 여름이 올 때마다
올갱이를 키우고 올갱이를 씻는다 

푸른 바람소리
몸속까지 스며들 수 있도록
머리카락 젖혀 귀를 연다
수없이 보이고, 수없이 들리는
숨쉬는 것과 숨지는 것들의 절규 

푸른 것과 푸르지 못한 것과의
잡히지 않는 간극을 소쿠리에 걸러낸다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눈이 짓물러도
올갱이는 오돌오돌 내장이 푸르다

- 안효희 시 '올갱이는 내장이 푸르다' 전문

2005년에 나온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 한국문연 )라는 안효희 시인의 처녀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1999년 계간<시와 사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이 시집 속에서 인간 존재의 원초적 문제를 화두로 페미니즘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올갱이를 씻어 소쿠리에 담는 중이다. 시인은 올갱이가 왜 푸른지 생각한다. "푸른 이끼를 먹고/ 푸른 물소리를 들"으면서 산 까닭이다. 올갱이는 "살아갈수록 뱅뱅 어지러운 몸 야위어가"고 "가슴속 불씨 사그라"지는 슬픔을 말간 물에 헹구면서 살아간다. 감정이입을 넘어서 숫제 시인 자신과 올갱이를 동일시 한다.

올갱이는 "숨쉬는 것과 숨지는 것들의 절규"와 "푸른 것과 푸르지 못한 것과의/  잡히지 않는 간극"을 적당히 걸러내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언뜻 보면 올갱이가 살아가는 방법을 서술한 듯하지만, 사실은 시인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때문에 흘린 숱한 눈물로) 눈이 짓물러도/  올갱이는 오돌오돌 내장이 푸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올갱이의 삶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경멸일까.

대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뻔뻔스러운 삶의 내용에 대한 경멸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시인은 "그래도 세상은 빛이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그 당위성이 강박으로까지 작용하게 되면 자신을 하나의 틀 안에 가두게 될 수 있다.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내 내장도 다슬기처럼 오돌오돌 푸를 것이다. 삶은 분노할 것도 많고 슬퍼할 것도 지천이다. 그러나 우린 그런 것들에 두 눈 질끈 감고 밥숟갈을 떠넣으며 살고 있다. 떠 넣는 게 아니라 울음을 참고 우겨넣을 때도 있다. 뱃속에서 소화작용을 담당할 오돌오돌 푸른 위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나 역시 그런 뻔뻔스러운 삶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삶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어쩔 것인가. 그런 게 바로 삶이 가진, 고칠 수 없는 치명적 결점인 것을….


태그:#다슬기 , #올갱이 , #안효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