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J 엔터테인먼트

최근 극장가에서는 돌아온 '왕년의 스타'들이 등장하는 액션 어드벤쳐 영화들이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 19년 만에 돌아온 <인디아나 존스>의 네 번째 시리즈에서 해리슨 포드는 변함없는 중절모와 가죽점퍼 패션 그리고 여전히 건재한 채직 솜씨와 날렵한 '서커스 묘기를 과시한다. 물에 빠뜨려놔도 입만 동동 뜰 것 같은 시니컬한 유머 감각도 그대로다.

내일 모레면 칠순을 바라보는 '영원한 대부' 알 파치노는 <88분>에서 자신의 딸 혹은 조카뻘이나 될 법한 젊은 여배우들과 어울려 도시를 넘나드는 긴박한 추격전을 펼쳐보인다. 88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여인네들과의 스캔들 해명하랴, 전화기 들고 자신을 위협하는 범인의 정체 추격하랴, 총싸움에 뜀박질, 육탄전, 슬라이딩까지. 열정하나 만큼은 20대 못지 않다.

국내에서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안성기나 백윤식 정도를 제외하면 50대 이상의 노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는 한 해에 한 편 찾아보기도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 <더 게임>의 변희봉이나 <방울토마토>의 신구, <걸스카우트>의 나문희 <흑심모녀>의 김수미처럼 중견 배우들이 당당한 주연으로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어나가는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스릴러에서 어드벤처, 코미디, 휴먼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다양화를 통해 연륜있는 배우들의 영역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젊음에 대한 집착 vs 연륜에 대한 고찰

사실 외국에서는 우리 나라처럼 배우의 나이나 서열을 구분하여 '중견배우'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흔을 넘어도 로맨틱 코미디의 주연이 가능하고, 60~70대를 넘어서도 액션 히어로로 활약하는 스타들이 즐비한 해외에서는, 나이와 경력, 주연과 조연을 막론하고 다양한 작품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노장들에게는 그저 '배우'라는 타이틀로만 분류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익장이 언제나 좋은 평가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 본능>을 통해 90년대 섹시스타로 군림했던 샤론 스톤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원초적 본능2>,<캣우먼> 등에서 여전히 흘러간 섹시미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연민을 자아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액션영웅으로 기억되는 실베스터 스탤론이나 브루스 윌리스, 아놀드 슈워제네거 같은 노장들은 최근 몇 년간 자신의 과거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최신작을 들고 나란히 귀환했으나 대부분 악평과 함께 흥행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스탤론의 경우는, 지난해에도 자신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시리즈 중 하나인 <록키>시리즈의 완결편인 '록키 발보아'를 선보인 바 있다. 록키 발보아는 낡은 이야기라는 한계에도 그리 야박한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그것은 미국 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고전 시리즈에 대한 향수 그리고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아메리칸 드림과 '노력하는 영웅'이라는 긍정적인 가치관에 대한 예의 차원이었다.

하지만 <람보4>는 시대착오적인 냉전 시대 영웅의 귀환과, 옛 영광에 취해있는 한물간 옛 액션 스타의 탐욕으로 얼룩진 졸작일 뿐이었다. 은둔하던 전쟁영웅이 하필이면 세계 최대의 분쟁지역중 하나인 미얀마의 정글에 들어가 내전에 휩쓸린다거나, 기관포 하나로 일개 대대병력을 홀로 박살내는 과장된 액션은 스탤론의 비장미넘치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실소만 자아냈다.

브루스 윌리스의 대표 시리즈인 <다이하드>의 4편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등장한 1, 2편에서는 미국 액션영화계에 '서민형 액션영웅'의 등장과 한정된 시공간을 활용하는 '대 테러리즘 액션'의 한 획을 그었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4편에서는 이전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유머감각은 줄어든 대신, 늙어버린 노장 형사가 자동차로 헬기를 격추시키고 맨몸으로 전투기까지 때려잡는 과장된 원맨쇼로 고개를 젓게 만든다.

'영웅이 되어봐야 좋은 일 하나 없다'고 푸념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폼을 잡는 모습은, 불평하지만  결국 영웅놀이를 즐기는 구시대 히어로의 나르시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공통점은 변하는 세월과 신세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젊음'을 인위적으로 복제함으로써 스스로의 건재를 과시하려 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감독과 제작자로 더 유명하지만, <매드맥스>, <리쎌 웨폰>, <브레이브 하트> 등을 통하여 70~80년대를 대표하는 액션 히어로로 활약했던 멜 깁슨은, 자신을 스타덤에 올린 형사 버디액션 <리쎌 웨폰>의 마지막 편(98년)에서 흐르는 세월을 보여주며 시리즈를 현명하게 마감한다.

전편에서 '반미치광이'에 가까운 자학적 히어로로 그려졌던 마틴 릭스는 4편에서 가족과 동료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따뜻한 인간미에 눈을 뜨는 성숙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분노가 급상승할 때마다 제어불가능한 '리쎌 웨폰'이 되던 과거와 달리, 늙어버린 육체로 인하여 젊은 악당들에게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언제까지나 액션 히어로로 남을 수 없다는 냉정한 자기반성도 보여준다.

노장들이 일깨워주는 아날로그적 가치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러한 옛날 영웅들의 귀환은 디지털 시대에 맞서 아날로그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구세대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들은 구세대라는 것이 '낡은 것', '뒤처진 것'이라는 선입견에 맞서 경륜의 가치를 복원하는데 중점을 둔다.

젊은이들의 패기와 첨단기기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명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아날로그 영웅들은, 그간 축적된 세상의 경험과 연륜으로 척척 해결해나간다. 어느덧 고전이 되어버린 옛날 히어로들의 귀환은 어린 시절 이들을 보며 자라난 30~40대에게는 향수를 자극함에 동시에, 아날로그적 가치의 정당성을 입증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이든 배우들의 노익장에서 기대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않은 젊음'(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세월의 주름을 아름답게 표현할줄 아는 연륜이다.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는 젊은 시절, 모든 배우들의 우상이자 연기의 전설로 칭송받았지만, 최근 몇 년간 출연작들에서 보여준 연기는 예전만 못하다.

이미 명예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는 두 원로배우가 별볼일 없는 장르영화나 시시한 배역에서 말년의 커리어를 허비하고 있는 모습은, 젊은 시절 이들에 열광했던 팬들에게는 오히려 실망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타짜>, <범죄의 재구성> 등에서는 '아카데미 주연상급' 연기를 보여주다가 <성난 펭귄>,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졸작에서는 연이어 한숨만 안기고 있는 백윤식도 비슷한 경우다.

반면 지금은 은퇴했지만 69세까지 액션배우로 활약한 숀 코너리나, 해리슨 포드, 잭 니콜슨, 모건 프리먼 등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더 멋진 배우들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젊은 시절 폼생폼사로 대표되는 카우보이 영웅의 전형이었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숱한 걸작들을 양산해내며 거장 감독겸 배우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을 보면, 배우에게 있어서 나이라는 것은, 눈가의 주름이 아닌 세월을 담아내는 연륜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