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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심지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우라카미 성당의 잔해.
 폭심지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우라카미 성당의 잔해.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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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4일, 부산 민주공원에서 한국 원폭2세 피해자였던 고 김형률 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참석자들 중 일부는 실제 원폭피해자들이었다. 이중에는 원폭1세도 있었고 2세도 있었다. 2세 중에는 온몸으로 원폭의 아픔을 겪어내고 있는 '2세 환우'들이 있었다. 이 '또 다른 김형률씨들'은 추모제를 마친 뒤, 부산에서 고속선을 타고 나가사키· 히로시마로 평화기행을 떠났다. 5박 6일의 일정으로 진행된 이번 평화기행에서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뿐 아니라, 한국인이 원폭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강제연행의 땅 치쿠호 등도 방문했다.... 기자 주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섬광이 번쩍이더니 일순간 도시는 지옥으로 변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거리마다 시체가 즐비했고 불타버린 몸으로 유령처럼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뜨거운 불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피난의 행렬이었다. 누군가가 어서 도와주기를, 마실 물과 먹을 것을 주고 고통에서 어서 구해주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산 사람의 몸에도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화상을 입지 않은 이들도 온몸에 유리 파편이 꽂힌 채 피 흘리며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가족이 옆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했고, 지상에서 지옥을 보았다.

절대로 인간을 향해 사용해서는 안 되었던 엄청난 죄악의 대량학살무기 원자폭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은 그렇게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장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이들도 고통 중에 서서히 죽어갔다. 이 지옥불 속에는 식민지배의 고통 속에 일본으로 떠밀려간 조선인 수만 명이 있었다.

그 지옥불 속에 조선인이 있었다

현재 우라카미 성당의 모습.
 현재 우라카미 성당의 모습.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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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선을 타고 3시간 만에 일본 하카타 항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나가사키로 이동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밝은 뒤에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숙소인 나가사키 가톨릭센터 부근에는 건축 당시 동양에서 제일 큰 성당이었던 우라카미 천주당(가톨릭 성당)이 있었다. 전날 비가 와서 도시는 아주 선명한 색채로 다가왔고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성당 근처에는 원폭을 맞아 무너진 폐허의 건물더미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천황의 나라 일본에는 지금도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19세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혹독한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던 가톨릭 신도들은 간신히 우라카미 성당을 짓고 신앙을 지켜냈다. 그러나 1945년 8월 9일 성당으로부터 500m 떨어진 상공에서 폭발한 원자폭탄에 의해 성당은 참혹하게 무너졌다.

성당 안에 있던 신부 2명과 신도 28명은 당연히 목숨을 잃었고 우라카미 교구에 속한 신도 1만 2천 명 중 8500명이 죽었을 정도로 이 부근의 피해는 극심했다. 녹슨 건물 잔해가 내 눈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었다. 내겐 너무 낯선 나가사키가 조금씩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나가사키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펼치던 에도시대에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미국 등과 무역을 했을 만큼 동서양의 이국적인 문화가 교차하던 곳이다. 이날도 전차가 도로를 오가는 이색적인 풍경의 나가사키 도심을 지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다카지마로 향하는 항구였다.

다카지마는 탄광으로 유명한 섬이었는데, 박노자 교수의 글에 따르면 '노동자들을 노예로 부리다 콜레라가 발병했을 때 살아 있는 환자들과 죽은 주검들을 함께 섞어 해변에서 불태워버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서 노예처럼 부려지다가 죽어간 섬이기도 하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끌려간 조선인, 죽음마저 방치돼

폐광 이후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섬 '군함도'. 이곳에는 강제징용되어 노예처럼 가혹한 삶을 살다 죽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많았다.
 폐광 이후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섬 '군함도'. 이곳에는 강제징용되어 노예처럼 가혹한 삶을 살다 죽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많았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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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 한가운데를 지나 깊은 수풀을 헤쳐 들어가니 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인적 드문 터에 위령탑이 하나 서 있었다. 다카지마 섬을 안내해준 시바타씨에 의하면 위령탑 아래로 일제시대 강제동원된 조선인 104구의 유골이 묻혀 있다고 했다. 이들은 미쯔비시에서 일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미쯔비시에서도 이들의 개인정보와 유족들의 주소를 알고 있다고 한다.

일본내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도 이들의 본적 자료를 가지고 있다. 미쯔비시 중공업은 일제의 침략전쟁 시절 탄광·광산·토목현장 등에서 조선인들을 학대하고 차별하면서 노예처럼 부렸던 것으로 악명 높은 대기업이다. 미쯔비시는 죽어간 이들의 유골을 본국으로 송환하면 자신들이 전쟁 때 조선인에게 했던 잔혹 행위들이 드러날까봐 일부러 숨겨두고 있다.

다카시마에서 조금 떨어진 유령의 섬, 무인도 '군칸지마(군함도)'에서도 강제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인간 이하의 환경 속에서 외롭게 살다가 죽어갔다. 그런데 미쯔비시에서는 당시 이 유골을 다카시마로 옮겨 납골당에 모셔 두었다가 다카시마 탄광 폐광 후에는 그마저도 함부로 방치했다. 유골의 일부만 항아리에 담고 나머지는 땅 속에 매장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발굴을 해도 식별이 곤란할 것이라 한다. 많은 이들의 유해가 전부 뒤섞여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조선인 유해 104구가 묻혀 있는 슬픔의 현장, 다카지마 무연고 묘지.
 조선인 유해 104구가 묻혀 있는 슬픔의 현장, 다카지마 무연고 묘지.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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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칸지마와 다카지마는 직접적인 원폭피해 지역은 아니다. 그러나 일제가 전쟁을 위해서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용했던 땅이며, 원폭투하 직전 미국의 공습으로 섬이 불타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 또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가려던 조선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나가사키를 거쳐 가다가 방사능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도 많다. 군칸지마는 현재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통제하고 있어, 작은 배를 타고 바닷길을 통해 섬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군칸지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일제가 침략전쟁을 벌이던 당시 이 일대는 양질의 석탄을 추출해 내는 해저탄전이 있어 '검은 다이아몬드' 열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겉모습이 전함과 비슷해서 '군함도'라고 불렸던 이 섬도 그 중 하나였다. 탄광산업으로 도시가 번성하여 쇼와 30년대에는 5300여 명의 도민이 살았고 학교, 병원 등 공공시설을 비롯하여 영화관, 상점, 여관, 절, 신사 등 묘지를 제외하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구비된 최첨단 도시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풍요로운 생활 이면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피눈물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 섬의 길이는 500m인데 양쪽 끝에 조선인, 중국인을 따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일본정부가 강제노동 외국인들의 저항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들끼리 연대해서 저항하는 일을 방지하고자 이렇게 했다고 한다.

원폭피해자 2세, 3세 환우 문제는 대체 어디에?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 방사능의 영향을 설명하는 코너에 서 있는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 방사능의 영향을 설명하는 코너에 서 있는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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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지마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고, 다시 나가사키 시내로 이동했다. 우선 원자폭탄 낙하중심 공원과 원폭자료관을 찾았다. 이 공원은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정확한 위치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전시실은 피폭 전의 나가사키, 원폭투하까지의 경과, 피폭에 의한 다양한 피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원폭투하까지의 과정, 현대 핵무기 등의 순으로 전시를 하고 있었다. 폭심지에서 약 700m 떨어진 이와카와마치에서 죽은 쓰쓰미 사토코 양의 유품 중 숯덩이처럼 변해 있는 도시락과 원폭투하 당시 옥상에서 내려오다가 열선을 직접 받아서 나무벽에 그림자가 선명하게 찍힌 사다리, 감시병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원폭자료관은 '과거형'의 원자폭탄 피해는 무수히 전시하고 있으면서 '현재형'인 원자폭탄 피해자 2~3세의 문제는 거론하고 있지 않았다. 평화기행 참가자 중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인공관절수술을 받고 힘겹게 살아가는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은 전시물 중에서 유독 방사능의 영향을 설명한 코너에 오래 머물렀다.

이 코너에서는 피폭 후 각종 질병이 잠복기를 거쳐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발병함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 회장의 부모님은 두 분 다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다. 부친은 피폭 당시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 이후 협심증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신다.

한 회장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질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중학생 때부터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에 시달려 오다 몇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한 회장의 형제 자매들도 협심증, 피부병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아픔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첫째 아들마저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방사능의 유전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비극의 가족사였다.

자신의 병도, 아들에게 생긴 병도 원자폭탄 방사능이 유전자를 타고 대물림되었기 때문임을 확신하는 한 회장은 쉽게 이곳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시물 자체가 방사능이 2세, 3세로까지 이어진다는 식으로 유전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도 않았고, 통상적으로 방사능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인체에 어떤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뿐이었다.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도 유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밥알이 새까맣게 탄 채로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증언하는 여학생의 도시락. 도시락의 주인공은 피폭으로 죽었다.
 밥알이 새까맣게 탄 채로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증언하는 여학생의 도시락. 도시락의 주인공은 피폭으로 죽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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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빠져나오는 길 외곽에는 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아주 왜소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넓은 자료관과 공원을 다 돌아보아도 쉽사리 찾아볼 수 없었던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 그리고 조선인들의 고통에 대한 정직한 반성을 이 작은 기념비 하나가 대신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의 뒷걸음은 쓸쓸하기만 했다.

일본 NBC방송국 촬영팀이 따라 다니며, 한국 원폭2세 환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한정순 회장은 원폭2세 환우의 문제가 공론화되지 못한 일본 사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실망하고 있던 와중이었으므로, "1분짜리 인터뷰일망정 일본시청자들에게 한국원폭2세 환우로서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가해' 책임을 전시한 오카마사하루 자료관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의 모습.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의 모습.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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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사키 원폭자료관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진실되게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의 희생에 대해 알리고 있는 자료관이 근처에 있어 그곳까지 내친 김에 방문했다. 바로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다. 이곳은 일본의 가해 책임에 주목하여 조선인 피폭자의 실태조사와 지원에 헌신했던 평화운동가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유지를 계승하고자 1995년에 세워진 자료관이다.

자료관 1층 데스크에는 두 명의 자원봉사자가 안내를 맡고 있었고, 평화 관련 서적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곳의 이사장인 다카자네 선생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자료관에서는 난징대학살로 고통당한 중국인과 강제동원되어 와서 온갖 차별과 억압, 학살을 당해온 조선인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었다.

오전에 우리가 거쳐온 군함도에서 희생된 탄광 노동자의 명단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관 규모는 작았으나 일본의 다른 박물관에 비해 소외당해온 또 다른 진실을 성실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는 일제의 침략과 황민화정책, 강제연행, 난징대학살, 조선인 피폭자와 '위안부' 피해자 코너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마음과 노력이 전해졌다.

탄광 등지에서 가혹하게 일하고 학대받았던 조선인 노동자의 사진.
 탄광 등지에서 가혹하게 일하고 학대받았던 조선인 노동자의 사진.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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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자네 이사장은 "떨어진 폭탄을 맞은 것은 같으나 조선인의 피해는 일본인과는 질적으로 달랐다"며 당시 일본에서 발표한 조선인 피해자 통계를 납득할 수 없어 오카 목사 등이 자체적으로 나가사키 전역에 걸쳐 실태조사를 벌였다고 말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이 700억 예산을 들여서 화려하게 지어진 공간이고 한 해 90만 명이 관람하고 가는 것에 비하면,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은 연중 5~6천 명만이 거쳐 가는 곳이다. 그러나 이중 80~90%가 중고등학생으로, 다카자네 이사장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서 감상문을 보내주는 학생들이 우리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라며 "그들이 나중에 엄마, 아빠가 되어 여기서 배운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자식들에게도 역사의 진실을 잘 전해주리라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자료관은 역사의 힘, 진실의 힘을 믿으며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취지로 운영한다"고 덧붙였다.

가끔은 우익들로부터 협박전화도 받기에, 늘 자료관에는 둘 이상이 근무를 한다고 한다. 13년 동안 국가나 기업체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자원봉사자들과 유지회원, 찬조회원의 도움만으로 자료관을 운영·유지해 왔다.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은 나가사키에 핀 작은 평화의 꽃이었다.

일본 학생들 가운데는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진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이런 학생들을 길러내는 일본 사회에서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의 활동은 너무나 작고 여리지만, 오카마사하루 자료관마저 없었다면 우리들의 나가사키 평화기행은 몹시 우울하고 절망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평화를 외치지만, 원폭피해의 아픔을 직접 겪은 나가사키에서도 원폭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저 1세대와 자국민에게만 머물고, 2~3세나 나라밖 피해자에게는 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63년 동안 외면 당해온 아픔,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다

군함도에서 죽었던 조선인 희생자의 명단을 전시한 코너. 오카마사하루 자료관 내.
 군함도에서 죽었던 조선인 희생자의 명단을 전시한 코너. 오카마사하루 자료관 내.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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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었던 직접 피폭자에 대해서는 누구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2세, 3세에 대해서도 원폭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보상' 문제 때문에 어떻게든 원폭의 '유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한국 정부는 일본도 인정하지 않는 문제를 왜 우리가 먼저 나서냐는 식으로 원폭 2세, 3세의 인권을 무시한 채 자국 국민을 방치하고 있다. 원폭문제는 지난 63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듯, 아직도 갈 길이 너무나 멀기만 한 것 같다.

그러나 절망은 이르다. 원폭피해자의 존재는 알아도 2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무지하던 한국사회에, '김형률'이 자신의 몸을 던져 숨겨진 역사의 상처를 온전히 드러냈듯, 또 다른 '김형률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번 나가사키 평화기행은 그런 걸음의 시작일 뿐이다. 어쩌면 이 평화기행에 참가했던 사람들 가슴 속에 저마다 눈물 어린 평화의 꽃씨가 들어 있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원폭의 기억에서 평화의 길을 찾다-원폭피해자와 함께 떠나는 나가사키· 히로시마 평화기행'
기간 : 2008년 5월 24일~5월 29일
장소 : 군함도·다카지마→ 나가사키→치쿠호→히로시마
주최 : (사)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협력 :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태그:#한국원폭피해자,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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