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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옛날 사진들이 가득한 앨범을 보고 계신 할머니. 할머니와  난 오래 된 사진들을 보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날 사진들이 가득한 앨범을 보고 계신 할머니. 할머니와 난 오래 된 사진들을 보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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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천석꾼이 뭐예요?"
"곳간에 곡식들을 쌓아뒀다 혀서 부자들을 그렇게 불렀지. 해방 이후 할아버지도 천석꾼이라 불렸지. 그 때 소련놈들이 내려와서 집도 땅도 다 빼앗아 갔어."

어릴 적부터 들어온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다가는 그 시절 이야기를 다시 꺼내곤 하셨다. 어릴 때는 잠에 골아 떨어지기까지 귀를 쫑긋 세워 듣던 이야기였다. 내 머리가 굵어졌다는 착각을 시작하고 나서는 할머니의 판박이말이 지루해 "할머니, 또 그 얘기야. 이젠 다 외우겠어요"라고 투덜대기도 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아이구! 우리 손자 왔구나. 이게 얼마만이냐. 자주자주 좀 와라. 밥은 먹었어? 빈대떡 부쳐줄까? 가만 있어 보자 녹두가 없구나. 사와야 하는데…. 자고 갈 거지?"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 있는 한 빌라에 사시는 할머니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 그래서인지 이젠 살아 온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다. 그런 할머니가 수선스레 날 반겨 주니 눈가가 시큰해진다. 할머니에게 "밥 먹었어요. 빈대떡은 나중에 부쳐주세요. 아쉽게도 오늘은 자고 가지 못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고선 할머니 방에 앉았다. 할머니의 인생사를 듣기 위해서다. 할머니 이원선씨는 1922년 음력 1월 24일 황해도 해남면에서 태어났다.

"할머니 살아 오신 이야기 다시 한 번 들려주세요"

유쾌하게 어깨춤 추시는 할머니. 제일 오른쪽이 할머니다. 할머니가  나주에 있을 때인 서른 후반, 동네 사람들과 같이 놀러가 찍은 사진이다.
 유쾌하게 어깨춤 추시는 할머니. 제일 오른쪽이 할머니다. 할머니가 나주에 있을 때인 서른 후반, 동네 사람들과 같이 놀러가 찍은 사진이다.
ⓒ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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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6·25 때 피난했던 이야기 다시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 얘긴 뭘 또 들을라 그래. 그럼 네 아버지 어떻게 낳는지부터 말해줄까? 6·25 때였는데 빨갱이들이 다시 내려온다고 해서 서둘러 피난할 때였지. 배가 이렇게 불러 있었는데 집 버리고 나온 이틀 만에 애비가 나오려는 거야. 그래서 넘의 방 빌려서 네 아버지 낳고, 낳자마자 겨우 포대기 빌려서 핏덩이 싸매고, 거서 하루 쉬고 다시 연평도로 떠났지. 네 애비 낳은 데가 황해도 두모동이지. 네 아버지 낳고도 난 멱(미역국)도 못 먹고 아무 것도 못 먹었어. 할아버지랑 동네 남자들이 다 들고 먼저 떠났거든."

- 할아버지는 왜 먼저 떠났어요?
"빨갱이든, 국군이든 상관없이 남자들을 죄 잡아갔거든. 여기 있음 잡힌다 해서 산에 숨어있다가 몇 달 전에 먼저 내려갔지. 아 근데 네 애비 낳고 누워있는데 거기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난 거야. 동네 남자들이랑 갯변장(갯벌) 지나서 몰래 배 타러 갔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땅땅땅땅' 총을 쏴대더니 누군가 픽픽 쓰러지고 난리가 났더라는 거여. 할아버지는 뻘 묻히고 숨어있다가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 걸어서 동네로 다시 온 게지. 그 다음날 네 고모랑 큰아버지랑 네 애비 싸매고 연평도로 갔지. 거기서 배 타고 목포로 갔어. 갈 곳이 전라도 나주였거든. 할아버지 동생네가 거기에 먼저 내려가 있었어."

1950년 10월 25일 중국군의 한국 전쟁 참전은 전세를 뒤집었다. 유엔군은 공세에 밀려 남하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어린 자식 셋을 매달고 그렇게 남쪽 전라도 나주로 내려왔다. 산후조리는 고사하고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한 그 때, 핏덩이를 안고 떠나던 그 때를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로 기억하고 계셨다.

-작은 할아버지네랑 왜 같이 내려오지 않으신 거예요?
"그 때가 지금 같은 줄 아니? 핸드폰도 없고 전화도 없었어. 따로 살았으니 연락이 닿지 못혔지. 해방 후 난리통에 나주로 내려 갔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

-피난 오실 때 정말 힘드셨겠어요? 전 상상도 잘 안 가는데요?
"말도 못하지. 먹을 것이 어디가 있어. 배 고파서 풀만 뜯어 먹고 총소리 때문에 낮에는 돌아다니지도 못해. 죽을 고비도 여럿 있었지. 배 타고 내려올 때는 거의 먹지도 못했어. 거기다가 얼마나 추웠는지. 그 핏덩이가 안 죽고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지. 근데 이건 왜 적어?"

- 아, 제가 지금 할머니 인터뷰하고 있는 중이에요. 기사로 만들어서 <오마이뉴스>란 곳에 응모하려고요. 할머니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기도 하고요.
"마침 잘됐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쓰면 책으로 열 권은 넘을 거야."

- 그 때 왜 피난하신 거예요?
"북에 살 때 땅 몇 뙈기 가지고 있었어. 해방 이후에 소련놈들이 들어오더니 천석꾼은 '친일파'에 '악덕지주'라 해서 다 죽였지. 우리도 다 뺏기고 죽을 뻔 했어. 아, 근데 할아버지 친구인 거 누구냐, 그 '김찬순'이가 빨갱이 '오야'(일본어로 우두머리라는 뜻)가 되어서 돌아 온 거야. 독립운동했는데 3·1운동 때 잡혀서 7년을 징역 살고 나왔던 사람이지. 그 사람이 우릴 빼내줬어."

인터뷰 후 독립운동가 '김찬순'에 대해 찾아봤다. 조선공산당원으로 독립운동을 한 '김찬순'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도 없고 정보도 부족해 동일인물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좌우 사상을 넘어 이름 없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 해방 이후에 바로 안 내려오시고 왜 6·25 때 내려오신 거예요?
"아, 친일파로 몰릴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 그 후 (황해도)신원면에서 이일 저일 하면서 근근이 살았어. 근데 천석꾼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우리 목을 죄어 오더라고. 그 때 인민재판에 서면 '죽여야 옳으냐? 살려야 옳으냐?'하고 사람들한테 묻고는 '죽여, 죽여'라고 외치면 바로 죽여 버렸어. 근데 빨갱이들이 다시 내려오면 이제 다 죽는다 싶어 월남한 거야."

무수히 떨어지는 폭탄 속에서 두 아들을 잃다

-6·25 때는 어땠어요? 할머니가 살던 곳은 별일 없었나요?
"별일 없긴, 전장의 한복판이었지. 정신 없이 총소리가 들릴 때는 이불을 전부 펴서 그 속에 들어가 있었지. 총알이 이불은 못 뚫는다고 했거든. 연합군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은 폭격을 안 한다 해서 폭격 소리가 날 때는 흰 옷 입고 사람들이랑 벌판에 나가 있었지. 내가 네 큰 아버지 밑으로 두 명을 더 낳았어. 6·25 때 갸들이 4살, 6개월이었지. 아, 근디 벌판에 나가 있는데 옆에 폭탄이 떨어진 거야. 흙과 돌이 우리 쪽으로 확 덮쳐서 그 때 갸 둘이 죽었어."

-끔찍해요. 많이 슬프셨겠어요.
"그 땐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그런 광경에 익숙하다 보면 슬픈 것도 잠시지. 어디 그럴(계속 슬퍼하기만 할) 겨를이나 있간디."

6·25 이후 전라도 나주에서 찍은 사진. 동생을 안고 있는 사람은 할머니의 첫째 딸(고모)이다. 그 다음부터는 키 순서대로 둘째(큰 아버지), 다섯째(아버지), 여섯째 아들이다. 셋째와 넷째 아들은 6·25 당시 폭탄의 잔해에 맞아 죽었다.
 6·25 이후 전라도 나주에서 찍은 사진. 동생을 안고 있는 사람은 할머니의 첫째 딸(고모)이다. 그 다음부터는 키 순서대로 둘째(큰 아버지), 다섯째(아버지), 여섯째 아들이다. 셋째와 넷째 아들은 6·25 당시 폭탄의 잔해에 맞아 죽었다.
ⓒ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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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도착해서는 어떻게 사셨어요?
"처음엔 미군 배급이나 받아 먹으면서 살았지. 할아버진 나주에서 곧 돌아가셨어. 별 수 있나. 내가 옷 장사 시작해서 번 푼돈으로 자식들 입히고 먹이고 했지. 온갖 고생을 다했어. 고모도 동생들 돌보는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한테 5촌인 아무개가 나주에서 군정 경찰을 하고 있었지. 그래서 살림에 여유가 있었는데 쌀 한 톨 안 보태주더라고. 그 색시가 고약했거든."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꼭 이 부분이다. 현대사의 굴곡을 넘어 오시면서도 차분한 어조를 지키신 할머니지만 인척의 외면 앞에서는 서운한 감정을 숨기실 수 없나 보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괴롭히진 않았나요?
"어려웠지. 일본 사람들이 와서 쌀이니 뭐니 죄 가져 갔어. 가끔 일본 관리들이 와서 밥 먹고 가곤 했는데 그래서 해방 후에 친일파로 몰렸나봐."

-억울하진 않으셨어요?
"억울하지, 억울해. 할아버지도 화병으로 돌아가셨던 거야. 이도 저도 다 뺏기고 그 고생을 했으니. 나주에서 할아버지는 일도 안 하고 맨 술만 먹다 돌아가셨어."

-할머니 일본말은 잘 하셨겠네요?
"못했어. 내가 학교를 안 댕겼거든. 아버지가 여자들은 학교 보내면 연애 편지나 쓴다고 안 보냈어."

"꿈? 뭐 해보겠다는 생각조차 못 해봤어"

-젊었을 때 할머니는 꿈이 뭐였어요?
"꿈? 뭘 생각할 여가도 없었지. 뭐 해보겠다는 생각조차 못 해봤어.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모르고 시집 와서 애 낳고 해방 이후에는 별의별 일을 다 겪었잖여. 꿈이고 뭐시고 그저 조금만 더 먹고 조금만 더 편하길 바랄 뿐이었지. 내가 뒤를 돌아봐도 어떻게 살아났는가 싶어."

-교육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했지. 옷 장사 하면서 내가 좀 배웠다면 더 벌고 더 잘 키웠을 텐데 말이야. 교육을 받았으면 뭔가 달라져서 지금 같지 않을 텐데."

- 왜요, 할머니는 지금도 정말 훌륭하세요. 말도 안 되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오셨잖아요. 저로선 상상도 안 되는데요. 자식들을 잘 키웠다는 증거도 할머니 눈 앞에 있잖아요. 하하. 근데 할머니 옛날 사진 있는 앨범 어디 있어요?

내 말에 할머니도 껄껄 웃으셨다. 오랜 된 앨범을 들여다 보며 할머니와 난 한참이나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 얘기를 다 담으려면 정말이지 '책 열 권'은 써야 할 것 같다. 고향인 황해도 해주를 거쳐 전라도 나주에서 지내시다 서울로 올라 오신 할머니의 사투리는 국적이 불분명하다. 뒤섞인 할머니의 사투리 속에 혼란했던 우리네 현대사가 들린다.

할머니가 살아 온 역사에 대한 어쭙잖은 평가는 접어둔다. 할머니의 삶 자체에 절절이 묻어 있는 역사를 이 글에서 평가한다면 그건 오만이 아닐까. 다만 할머니가 어째서 꿈 한 조각 상상해 보지도 못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생각하며 이내 속상한 마음이 든다.

"할머니 취업 준비 한답시고 자주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앞으로는 자주자주 올게요."

할머니가 나주에 있을때 산을 오르며 찍은 사진이다. 이 중 제일 뒤가 할머니 같다고 하셨다. "할머니, 어딜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셨나요."
 할머니가 나주에 있을때 산을 오르며 찍은 사진이다. 이 중 제일 뒤가 할머니 같다고 하셨다. "할머니, 어딜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셨나요."
ⓒ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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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가족 인터뷰> 응모글입니다.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newphase/에도 올렸습니다.



태그:#할머니,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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