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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햇살이 유난히 따뜻한 주말이었습니다. 그 날이 되기 며칠 전, 어머니께서 언니와 제게 특별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친할아버지와 함께 인천대공원에 소풍을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친할아버지는 몇 년 간 투병중인 친할머니를 간병하셨습니다. 그런데 5월 초에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홀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 전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던 저는, 그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인천대공원의 주말은 매우 평화로웠습니다. 커다란 가로수길이 시원스럽게 뻗어있었고, 그 양 옆에는 풀밭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웃음 소리를 흘려보내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제 마음 속에도 오래간만에 여유가 찾아왔습니다. 3년 전 인천에 이사 왔으면서, 왜 한 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즐겁게 걷다가, 저희는 매점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과 차가운 음료수를 사서 파라솔 아래에 앉았습니다. 앞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보였고, 바람은 선선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다보니, 문득 할아버지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대로 할아버지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신 적 있잖아요. 그 얘기 좀 해주세요." 

 

제가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쯤 부터는 거의 매 주마다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곤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할아버지께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어릴 적 재밌게 읽었던 '아라비안 나이트'의 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가족에게 무심할 수가 있었는지…. 스스로도 인터뷰를 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 질문을 여쭤보면서도, 지나도 한참 지난 이야기를 이제 서야 끄집어내는 제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부끄러워하는 손녀를 전혀 어색해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이야기보따리를 천천히 풀어주셨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는 '천일야화'보다 생생한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친할아버지의 사우디아라비아 현장 근무 경험담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시기 전, 할아버지는 미국 회사에서 설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70~80년대에 중동에서 건설 붐이 일었습니다. 한국 건설 회사들은 약 15만명의 건설 인력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보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할아버지를 사우디아라비아에 보내려는 ㅎ회사에 스카우트되셨고, 할머니를 한국에 남겨두신 채 1978년에 사우디아라비아라는 타지 중의 타지로 떠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맡으셨던 업무는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축한 건물들의 설비를 최종 점검하고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귀국하신 1995년까지 17년간을 그렇게 당신의 사무실에서 외로이 일하셨습니다.

 

저는 직접 설비를 설치하는 것보다 점검 및 확인이 훨씬 편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업무에 상당한 긴장감과 부담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할아버지께서 왕의 별궁을 짓는 일에 관여하시게 됐습니다. 완성될 날짜로부터 2달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 필요한 물품이 도착하지 않아 걱정이 되셨지만, 주변 사람들은 별궁을 2달 안에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미국에서 수술을 받고 별궁에 온다는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그러자 사우디 정부에서는 회사에 비행기 삯을 줄 테니 물품을 빨리 들여와서 완공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회사에서는 큰 힘을 들여 3개월 안에 별궁을 완공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왕이 별궁에 도착하기 전 날, 에어컨 작동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에어컨은 작동이 되다가도 자꾸 꺼졌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에어컨을 고치느라 그 더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진땀을 뺐습니다.

 

다행히도 왕이 도착하는 날이 일주일 연기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왕이 도착하기 전 날 에어컨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의 경험을 떠올리시며 "그 이후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비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업무에서 인간관계도 매우 중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군사 단지 건설에 관여하고 계실 때, 할아버지는 파키스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 사람들이 아직 사용하도록 허가받지 않은 전화를 자꾸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용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그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군사 단지 건설 중 또 일이 터졌습니다. 갑자기 정전이 터진 것이었습니다. 결국 정전은 1~2시간 내에 고쳤지만, 정전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우 난처해졌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했다가는 회사의 신용도가 낮아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한 파키스탄 사람이 '우리가 정전을 일으켰다고 말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정전에 대한 책임을 돌리게 되었고, 그 일이 있은 후 무사히 군사 단지를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일에는 어느 정도 운도 따르고, 인간관계도 따르지." 할아버지 말씀에는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과 함께한 할아버지의 17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17년간 타지 생활을 하시면서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셨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한국 사람들과 2주에 한 번씩 불고기파티를 하면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할아버지는 "미국인 다음으로 쳐 준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인보다 대접을 못 받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군사 문제, 건설 문제로 미국에게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근면성실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을 많이 도와줘서 좋아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과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과 닮은 점에 대해서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한국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할까. 남자들이 엄청 가부장적이었지. 아들이 아버지처럼 어머니한테 차도르(얼굴을 가리는 천)를 쓰라고 잔소리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심지어 여자들은 서 있지도 못했어. 그래서 바깥에 앉아 있었지."

 

할아버지는 주로 햇볕이 뜨거운 2시~4시 사이가 되면 사람들이 가게 문을 닫고, 저녁이 되면 온 가족이 천막을 쳐둔 마당으로 나와 서늘한 바람을 쐬며 천막 속에서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람들이 저희 가족처럼 바람을 쐬고 있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후 4시쯤 해가 진 뒤, 근무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마당에 쳐놓은 천막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밤하늘에는 달과 별이 초롱초롱하게 떠 있었는데, 사람들은 천막 아래 양탄자를 깔고 밤하늘을 구경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답니다. 할아버지도 숙소로 돌아가시는 길에는 맑은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자주 구경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사우디 사람들이 아파트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우면 저녁에 바깥으로 나와서 천막 아래 누워있는 걸 좋아했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곳 사람들 중에는 유목민이 많았습니다. 유목민들은 임시로 천막을 치고 양떼를 몰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한국 건설업체들이 상당한 곤혹을 치렀다고 하셨습니다.

 

'아라비아 드림'을 꿈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께서는 1995년에 할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한국 경제의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제게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습니다.   

 

할아버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저희 가족은 나란히 가로수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멀게만 느껴지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쐬며 풀밭 위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니, 천막 아래 누워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됐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달과 별은 여전히 밝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달과 별이 아무리 밝아도 70~80년대에 외로운 타지에서 '아라비아 드림'을 꿈꿨을 한국 사람들의 희망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열심히 일하셨을 할아버지와 그분들에게, 이제서라도 한국 경제에 큰 보탬이 되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가족 인터뷰> 응모글


태그:#가족, #할아버지, #인천대공원,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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