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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들어오는 길목, '샤스터 데이지'가 반겨줍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 '샤스터 데이지'가 반겨줍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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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길목의 빈 산에는 노랑꽃이 핀다. 그 맘 때 피는 꽃은 대부분 노랑색을 띠고 있다. 그러다가 4월이 되면 분홍색 진달래가 온 산을 수놓는다. 5월에는 어떤 색의 꽃이 많이 필까. 5월에는 보라색 붓꽃도 피고 해당화도 붉게 피어오르지만, 그래도 5월의 꽃 색을 대라면 단연 하얀색이 최고다.

모내기를 하려고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하는 5월 초순이면 불두화가 몽글몽글 하얗게 피어난다. 밭둑 돌무더기 근처에선 찔레꽃이 나즉나즉 낮꿈처럼 피어나고 토끼풀꽃도 행복과 행운을 담아 하얀색으로 우리 곁에 온다. 논둑엔 애기똥풀이 노랗게 피어있지만 그래도 역시 5월의 꽃색은 하얀색이다.

5월엔 하얀색 꽃이 핀다

우리 집 역시 5월이면 하얀색 꽃으로 뒤덮인다. 불두화가 신호를 보냈는지 샤스터 데이지도 꽃망울을 달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월 한 달 내내 벙실거린다.

불두화와 샤스터 데이지가 5월의 우리 집을 보기좋게 치장해 주지만 그래도 그 둘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얀꽃 사이 사이에 환상처럼 보라색 붓꽃이 자리잡아 주어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있다. 불두화 나무 밑에 있는 머위, 머위가 있어야 불두화는 넘치지 않고 중용을 잡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불두화 나무 밑에 자리잡은 머위는 마치 이 모든 풍경 속의 화룡첨정 같다.

'불두화'는 부처님의 두상을 닮은 꽃입니다.
 '불두화'는 부처님의 두상을 닮은 꽃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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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보는 머위, 반찬 안 해 먹어요?

그 날 오후에 우리 부부는 야외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분주하게 지냈던 한 주일을 보내며 조용히 쉬고 있었다. 차소리도 안 들리고 사람의 기척도 없는, 우리 둘 밖에 없는 우리 집은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그 때 차 한 대가 우리 집 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하얀색 차가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큰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우리집, 이 때문에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별로 없는데 웬 차일까. 우리는 오후의 한적을 깨는 낯선 차의 출현에 약간 긴장하며 그 쪽을 쳐다봤다. 비포장 길이라서 조심스레 들어오던 그 차는 우리 앞에서 멈췄다. 차 창 유리가 스르르 내려가더니 까만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아는 체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저 옆의 밭을 산 사람입니다. 저기 왜 컨테이너 있는 밭 있죠?"

아, 지난 가을에 인천 사는 이에게 팔렸다는 그 밭을 산 사람이구나. 그렇지만 본 적이 없어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내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그 여인의 말을 받아준다.

"아, 그러세요? 밭 보러 오시나 보죠?"

차 안에는 그 여인 말고도 사람이 두엇 더 있다. 그들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우리를 건너다본다.

'머위'는 물기가 있는 땅을 좋아하나 봅니다.
 '머위'는 물기가 있는 땅을 좋아하나 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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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는 체를 해주자 그 여인이 그런다.

"저, 머위 왜 그냥 두세요? 반찬 안 해먹어요?"

방금 전까지 우리가 꽃인 양 바라보며 즐기던 머위를 눈으로 가리키며 반찬 안 해 먹느냐고 그런다. 그러자 남편이 인사치례인지 그런다.

"아, 그 머위요? 뜯어 가시려면 좀 뜯어 가세요."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연못 옆의 머위들은 내가 꽃으로 여기며 바라보는 건데…. 진짜로 그 여인들이 머위를 뜯어가기야 하겠느냐만 그래도 왠지 모를 적대감 같은 게 슬며시 생기는 거였다. 마치 아이들이 자기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탐을 낼 때 그러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반찬 해 먹어요. 조금씩 뜯어서 반찬해 먹어요."

나는 그렇게 주억거리듯 대답했다. 장난감을 등 뒤로 숨기며 도리질을 치는 아이처럼 나도 안 된다는 의미를 넌지시 담아 그리 말했다.

그 날 오후는 참 좋았다. 아무 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풍경  그 자체가 그림이었고 음악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풍경 속으로 섞여 들어가서 그 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들로 인해서 고즈넉한 그 분위기에 균열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집에서 나오는 거 별로 아까워하지 않고 뭐든 잘 나눠 먹었는데 그 날은 왜 그리 야박했을까. 머위 그게 뭐라고 안 된다고 그랬을까.

아는 사람에겐 친절한데 모르는 사람에겐 왜?

5월은 하얀색 꽃이 많이 핍니다. 하얀색 꽃 속에 피어있는 보라색 붓꽃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5월은 하얀색 꽃이 많이 핍니다. 하얀색 꽃 속에 피어있는 보라색 붓꽃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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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그 여인과 우리는 약간의 이해관계로 엮인 사이다. 그 여인이 산 땅은 우리 집 앞을 지나가야 되는 땅이다. 그러니 나중에 그 집이 집을 짓는다거나 그러면 알게 모르게 우리 집에게는 피해 아닌 피해를 입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은연중에 그 여인에게 적의를 품었나 보다.

아마도 알 수 없는 마음 속 그 반감은 그래서 생긴 거였을 거다.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그들이 내 꽃밭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반감이 그래서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지도 않은 미래의 그 때를 상상하면서 미리 반감을 가진 거였나보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머위는 지금도 잘 있다. 한낮의 땡볕 아래서는 약간 풀이 죽은 듯이 쳐져 있다가도 이슬이 내린 아침에 나가보면 생생하고 팔팔하다.

있는 그대로 그림이 되는 요즘, 모두 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저마다 있다. 머위도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못 옆 머위는 오늘도 그림 속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태그:#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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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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