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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터부룬넨(Lauterbrunnen)을 향해 출발한 기차는 푸른 초지가 넓게 깔린 평지를 달렸다. 푸른 초원에는 소와 양에게 먹일 건초더미들이 비닐백으로 포장되어 가득 쌓여 있었다. 초원 뒤로는 짙은 갈색 지붕의 민가들을 감싸 안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푸른 하늘에는 솜털 같은 구름이 떠 있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언덕 위의 마을, 윌더스윌(Wilderswil)에 잠시 멈췄다. 이곳의 표고는 584m. 스위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이 마을은 아침부터 기차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윌더스윌 역에 많이 보이는 노인들은 번잡한 관광지를 피해 윌더스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 여행자들이다.

 

기차가 드디어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딸의 눈앞으로 알프스의 회색 빛 암벽과 키 큰 나무들의 숲이 다가섰다. 한겨울에는 눈이 가득 쌓이는 천 m 급 암봉에도 짙푸른 나무와 회색빛 암벽이 드러나 있었다. 산기슭에는 가끔 잘려진 나무들의 밑둥이 보였다. 알프스에서도 일정한 크기로 자란 나무를 솎아내는 간벌(間伐)을 하고 있었다.

 

철길은 산의 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고 있었다. 철길 밖으로 지나가는 강의 물줄기에는 고산지대의 여러 물줄기가 합쳐진 강물이 가득했다. 산이 워낙 높으니 물도 깊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강물 중 일부는 먼 옛날의 빙하가 녹아서 흘러온 물들일 것이다. 석회질을 품은 강물은 온통 우유를 뿌려 놓은 듯한 색으로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의 가족은 소풍 나온 초등학교 어린이들 마냥 들떠 있었다.

 

승용차를 타고 알프스를 오르는 사람들을 위한 도로가 철길의 왼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차를 몰고 올라갈 수 있는 높이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기차 옆으로 움직이고 있는 승용차들은 라우터부룬넨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 눈앞에서는 물길과 철길, 도로가 함께 이어지는 흔치 않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차는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로 뻗어나간 산맥의 줄기를 따라 계속 움직였고, 드디어 수직 절벽으로 에워싸인 해발 796m의 라우터부룬넨에 도착했다. 라우터부룬넨의 U자형 깊은 협곡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일대 장관이었다. 나는 알프스의 빙하가 깎아버린 이 협곡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이 산악 마을은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를 올라가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들러서 절경을 감상하는 중간 기착지로 유명하지만, 이곳에서 며칠을 쉬며 알프스의 폭포와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 명성답게 라우터부룬넨 역에서 내린 많은 여행자들이 역 밖으로 움직였다.

 

역 앞에는 주민과 여행자들을 위한 꽤 큰 주자창이 있었다. 라운터부룬넨 위쪽으로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차량들은 운행할 수 없고 전기자동차만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지나 민가 쪽으로 조금 오르니 민가 사이의 수로가 보였다. 수로에는 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줄기가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전형적인 산악마을인 라우터부룬넨의 산기슭과 계곡 주변에는 스위스의 민가, 샬레(chalet)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알프스 산자락과 목조 샬레의 조화는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만약 스위스에 샬레가 없었다면 목가적인 풍경의 알프스도 그 아름다움이 반감될 것이다.

 

아! 민가들 사이의 평지에 십자가가 서 있는 묘지가 있었다. 묘지에는 사람들이 무덤을 가꾸기 위해 심은 빨간 꽃들이 묘비와 함께 알프스의 햇빛을 받고 있었다. 알프스에 심취한 나에게 꽃이 흐드러지게 어울린 묘지까지 아름다워 보였다. 마을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묘지는 마을 사람들이 언제라도 옆집 드나들 듯이 참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우터부룬넨의 묘지는 경건하면서 어둡지 않았고 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나의 가족과 이 라우터부룬넨에서 가벼운 하이킹을 했다. 높이가 300m 이상은 되어 보이는 절벽들 사이로 예상 외로 따가운 알프스의 햇살이 따라오고 있었다. 알프스 산촌의 길가에는 당연히 가로수가 심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햇살이 정면으로 얼굴과 어깨에 쏟아지고 있었다. 아내는 팸플릿을 머리 위로 들어 해를 가렸다. 깊은 협곡 때문에 하루 일조시간이 길지 않은 라우터부룬넨에서는 아주 귀한 햇살이지만, 여름 낮 시간의 태양은 피해줘야 했다.

 

협곡 양 절벽의 수풀 사이로 햇살이 퍼지고 마치 골프장과 같은 초지 위에는 그림 같은 민가가 박혀 있었다. 협곡의 절벽에서는 마치 절벽에 구멍이 난 듯 폭포 줄기가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고, 그 사이의 산언덕을 따라 노란 산악열차가 벵겐(Wengen)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곳은 서양의 알프스에 자리 잡은 도원경(桃源境)이었다.

 

한가하게 주변 가게를 구경하며 산책하던 나의 가족은 산책로 옆의 한 샬레 가옥 앞에 멈춰 섰다. 쉿첸 호텔(schÜtzen Hotel)이었다. 베른 주의 주기가 걸려있는 창문마다 보라색, 주황색의 꽃들이 걸려 있는 포근한 모습의 샬레였다. 우리가 발걸음을 멈춘 것은 라우터부룬넨 절벽 아래의 이 아름다운 호텔에 전망이 근사한 야외카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위 속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 생수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우리의 식탁에 나온 광천수는 바로 알프스 빙하 녹은 물로 만든다는 '발서(Valser)'였다. 마치 우리나라 소주병을 크게 튀겨 놓은 것 같이 생긴 컵과 함께 나온 생수는 냉장고에서 바로 나와서 유리병에 서리가 서려 있었다. 유리병의 푸른 색 브랜드는 더욱 청량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알프스 물맛의 미세한 차이를 혀끝에서 느껴보려고 천천히 물을 음미하며 마셨다.

 

딸기가 얹혀 나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세계적인 낙농국가의 아이스크림답게 신선하고 우유의 농도가 진했다. 어쩐지 어릴 적 먹었던 우유병 우유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이 아이스크림 위에 얹힌 작은 장식용 우산이었다. 그 작은 우산 속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이 있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의 일본양식 우산이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 식당의 주인은 이국적인 이 우산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여행 전에 읽었던 괴테(Goethe)의 기행문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라우터부룬넨에서 시의 영감을 얻었다는 200년 전의 대문학자 괴테는 이 절벽 사이의 마을까지 걸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걸어서 이 알프스의 언덕 위까지 올랐던 그는 거대한 알프스의 협곡을 보면서 주체할 수 없는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흥은 편하게 등산열차를 타고 올라온 내가 지금 느끼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나는 괴테를 생각하면서 라우터부룬넨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쳐다보았다.

 

 

나는 야외카페의 의자에 앉아 대 알프스의 협곡에 쏟아지는 햇살을 보고 있었다. 그 햇살은 내가 과거 겨울의 라우터부룬넨에서 만났던 반가운 햇살과 모습이 많이 달랐다. 겨울의 라우터부룬넨에서는 낮에도 3시간 정도 밖에 햇살을 만나지 못했었다. 협곡에 햇살이 사라진 후, 추위에 발이 시렸던 기억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발 밑으로 푸른빛 저녁 속의 계곡에 맑고 투명한 계곡수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카페 앞 산책로를 눈을 뽀드득 밟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알프스의 더 높은 곳을 올라야 한다는 다음 일정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알프스 노천 카페의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하면서, 나는 밝은 햇살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햇살은 강렬했지만 그늘에서 보는 알프스의 햇살은 너무나 싱그러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라우터부룬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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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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