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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입대를 앞두고 1987년 1월~2월 두 달간 부산에 있는 한 가내수공업(가방 하청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때 같이 일을 하던 사람들 중에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선택한 여학생들이 있었다.

 

정말 비참했다. 온갖 욕설과 험담,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들어면서 묵묵히 일하던 여학생들을 잊을 수 없다. 그 때부터 사회악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공' 그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여동생 나이와 같았기에 더 큰 아픔이었다.

 

2004년 김민기씨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 4반세기 만에 복권되어 나왔다. 물론 <공장의 불빛>은 정확하게 재녹음은 아니다. 음반으로 녹음되거나 공연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1978년이면 어떤 시대인가? 한 마디로 '빛'이 없는 '암흑' 세상이었다.

 

암흑 세상에서 입에서 입으로 불리워지고 녹음되고 불리워지는 과정을 지나 이제 재녹음 되어 복권된 것에 대해 암흑시대를 살아왔던, <공장의 불빛>참여했던 이들은 감격할 수밖에 없다.

 

"저 암흑과도 같았던 유신체제 말기 지하에서 은밀히 녹음되고 불법으로 유통되며 어느덧 하나의 신화로만 남아있던 이 작품이 지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이다. 문화사적으로 그것은 한 시대의 산물이 4반세기 만에 정당하게 '복권'되는 것이며 내 개인사적으로는 젊은 날의 충격적 체험하고 4반세기 만에 새롭게 '재회'하는 일이다."(<공장의 불빛> '재발매에 부처 ' 김창남(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교수)

 

내가 경험했던 1987년 1월과 1978년은 분명 다르다. 1987년은 그래도 암흑을 지나 빛을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었던 시기다. 하지만 1978년 그 때 얼음장 같은, 차가운 삭풍이 몰아치는 시대였고, 빛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시대였다.

 

암흑 시대에 <공장의 불빛>은 노동 현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감상 젖은 사람들의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게 하였고, 삶의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은 관념과 이론으로 무장되어 어쩌면 낭만주의 정치투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김민기는 당시 만해도 획기적인 카세트 테이프(나는 아직도 카세트 테이프가 친숙하다)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카세트 테이프를 통하여 80년대는 젊은이들을 음악에 빠져들게 했다. 숱한 민중가요 역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하여 급격히 확산되었다. <공장의 불빛>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그럼 <공장의 불빛>은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했을까?

 

"<공장의 불빛>은 흔히 70년대 노동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동일방직 사건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작품에서 묘사된 노동 현장의 모습이나 노동 운동의 양상은 단지 동일방직 사건의 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동일방직 사건으로 대표되는 70년대 민주노조 투쟁의 가장 일반적인 과정을 일견 스테레오타입으로 비쳐질 만큼 정형화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공장의 불빛> '재발매에 부처 ' 김창남(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교수

 

나는 동일방직 사건이 정확하게 우리나라 노동 운동 역시에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공장의 불빛>은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에 문외한 사람들에게도 노동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그 중 동일방직 사건이 어떤 자리매김을 하였는지 알게 한다.

 

<공장의 불빛>은 '편지-교대-사고-작업장-야근-음모-선거-싸움과 패배-해고와 새로운 결의'로 극이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극이지만 등장 인물들의 대사와 심리묘사를 모두 노래와 음악의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 작품의 탁월성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음악과 노래는 비주류가 아니라 주류라고 할까?

 

<공장의 불빛>에 나오는 음악은 구전가요, 트위스트, 흑인영가, 남도 소리, 풍물, 포크와 상악곡까지 포함되어 있다.

 

"<공장의 불빛>은 70년대를 걸쳐 작곡자 자신이 단련해 온 음악적 역량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 이후 김민기의 관심이 더 이상 단형의 노래에 머물지 않고 뮤키컬 쪽으로 선회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 <공장의 불빛.은 작곡자의 노래 시대를 총결산하면서 이후의 새로운 작업을 예비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공장의 불빛> '재발매에 부처 ' 김창남(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교수"

 

과연 1978년과 2004년, 2008년은 노동자들에게 다른 시대인가?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에는 '기륭전자'와 '이랜드' 노동자들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길게는 1000일 투쟁이다. 정치와 사회 전반이 음혹한 시대였던 박정희 시대가 끝난지 30년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이 땅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빛'은 멀기만 하다.

 

[서곡 (Overture)]

 

#1. 편지]

합숙소(벌집), 늦은 밤.

창틈으로 몰아치는 찬바람에 곱은 손을 불어가며 언니가 방바닥에 엎드려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옆에는 나이 어린 동료들이 곤한 잠에 빠져 있다.

 

언니: 미…영…이…가…방…학…을…했…겠…군…요

        공…연…히…딴…마…음…먹…지…말…고…

        꼭…고…등…학…교…에…갈…생…각…하…라…고…

        그…러…세…요…

        뒤…는…내…가…책…임…지…고…
        책…임…지…고…


우리 언니들은 이렇게 살았다. 1987년 1월 그 여공들도 같았다. 뒤는 자신들이 책임지면서 동생만은 여동생만은 언니가 되지 않기를 원했다. 왜 언니는 동생 미영이에게 꼭 고등학교에 가라고 간곡히 편지에 담았을까?

 

[#2. 교대]

 

언니가 야간 교대를 위해 어린 동료들을 깨워서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공장으로 향한다.

 

언니:  모두들 자니?

         일 나갈 시간

         얼른 얼른

         교대할 시간

 

순이:  달도 없고

         파리한 별빛

영자:  밤바람 차네

언니:  옷들 껴입고

 

남공들: 시커먼 굴뚝

           버티고 섰고

여공들: 앙상한 가지

순이:    무서워!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조용히 눈감고 신에게 고하는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순이와 영자, 언니, 남공들과 여공들이 새벽녘에 일어나 공장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는 장면을 경험하지 못했다.

 

새벽 바람은 원래 차다. 혼자 걷는 새벽길은 깊은 묵상을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공장에 매인 몸은 어쩔 수 없는 질곡이다. 생명없이 뿜어내는 시커먼 연기가 무슨 생명을 줄 것인가? 언니, 누나들은 그렇게 생명 없는 삶에 자신을 던졌다. 그런 그들에게 자본은 갈수록 포학해졌고, 존엄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6. 공장의 불빛]

 

모두들 작업할 생각을 잊고 있을 때,

갓 입사한 제일 어린 '순이'가 지친 몸에 고향집을 그리워한다.

 

순이: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모두 다:  이대론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울먹이는 '순이'를 언니와 다른 동료들이 위로한다.

 

그리워도 가지 못하는 고향집.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고향집. 1970년 대한민국 현실이다. 38선이 가로막혀 가진 못한 것도 아니요, 현해탄 높은 파도 때문도 아니다. 자본에 사로잡혀 사람이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억압이 막았기에 더 한스럽고 그리움이다.

 

[#8 구사대-돈만 벌어라]

 

아범이 포함된 깡패들(구사대)이 돈을 나누며 받고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을 하고, 더러는 바케쓰에 인분을 퍼담는 등 노조설립 대회장을 유린할 준비를 한다.

 

깡패들: 개같이 벌으랬다 돈만 벌어라

           더러운 돈 좋아하네 돈만 벌어라

           새 돈 헌 돈 따로 있나 돈만 벌어라

           아무거나 시키세요 돈만 벌어라

           인정 찾고 양심 찾고 개소를 허덜 마라

           정승처럼 쓰면 됐지 돈 벌어 돈만 벌어

 

구사대는 1970~1980년대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자본은 노동자를 폭력으로 대한다. 자본이 폭력을 휘둘려도 공권력은 자본에게 '불법' 딱지를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노조를 설립하는, 생명권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불법 딱지를 붙인다.

 

노조 설립을 유린한 것이 어제만인가? 오늘도 그대로다. 대한민국 일등 기업도 아직 노조 설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 돈 많이 줄테니 아무 말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한다. 돈만 벌면 된다. 존엄성, 인권 따질 때가 아닌 것이다.

 

[#13. 두어라 가자]

 

폭력현장에서 아범을 발견한 언니가 유린당하고 널브러진 동료들 틈에서 처연하게 노래 부른다.

 

언니:  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 설운 거리여

         두어라 가자

         언 땅에 움터 모질게 돋아

         봄은 아직도 아련하게 멀은데

         객지에 나와 하 세월도 길어

         몸은 병들고 갈갈이 찢겼네

         고향집 사립문 늙은 오매

         이제 내가 가도 받아줄랑가…

         줄랑가…

 

젊음을 유린 당했지만 늙은 오매가 받아 줄지도 모르는 언니다. 오매 마저 몰라준다면 언니는 어디 갈 것인가? 땅을 얼고 봄은 멀었는데 몹쓸 세상인데 언니는 어디 갈 것인가? 오매 마저 받아줄지 모르는 아픔.

 

우리 언니 누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19. 에필로그- 이 세상 어디엔가2]

 

서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어요 있어요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언니:  이 세상 아무 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리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모두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하지만 이젠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그렇다. 절망이 아니다. 패배가 아니다. 꿈이 있으며, 희망을 가졌다. 자본과 권력이 억압할지라도 우리는 갈 수 있다. 꿈을 버리면 희망이 없다. 파도와 맞서 싸워야 한다. 아직 자본은 노동에게 고통을 요구한다. 자본을 중시한 권력은 대한민국에게 생명보다는 자본에 더 충실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978년 <공장의 불빛>이 박정희 군사독재의 암흑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은밀히 알려졌지만 2004년 <공장의 불빛> 아니 2008년 <공장의 불빛>은 음반과 영상으로는 빛을 보았지만 노동 현장과 인민의 삶에는 빛이 약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장의 불빛>을 통하여 이 엄혹한 시간을 이겨나갈 다짐을 해야 한다.

 

<공장의 불빛>은 작품의 구성은 1978년 오리지널 음원을 리마스터 한 음악에 70년대 이후 민중미술, 사진작품, 현장기록 사진들을 영상으로 편집하여 만든 DVD, 그리고 2004년 천재 뮤지션 정재일이 편곡, 프로듀스하고 이지영, 이소은, 이적, 이승열, 전인권 등이 참여한 리메이크 CD로 이루어져있다. 한글/영어/일어/중국어 대본이 포함되어있다.

덧붙이는 글 |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Various | 로엔엔터테인먼트/로엔엔터테인먼트(기획사) | 2004년 10월 ㅣ 29,000원


태그:#김민기, #노동자, #공장의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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