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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에 부은 옥수수모가 잘 자랐다. 가뭄에도 싹이 트고 몰라보게 키가 컸다. 키를 보니 지금 모를 내면 딱 좋을 듯싶다.

 

밭 가장자리에서 옥수수모를 내고 있는데 옆집아저씨가 나를 본 모양이다.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인사부터 건넨다.

 

"어이! 전 선생, 뭐하는 데 열심이야! 쉬는 날이면 아예 밭에서 사는구먼. 모종 옮기고, 김매고, 물주고. 작물이 달아 없어지겠는걸! 쉬엄쉬엄하라고!"

 

당신께서도 틈만 나면 일손을 놓지 않으면서도 내 일하는 것을 보면 늘 쉬자고 한다. 가끔 막걸리 생각이 날 때는 내 일을 훼방 놓으신다.

 

"와! 보리수 엄청 달리겠네!"

 

오늘은 우리 밭 시찰을 하러 나선다. 나무에 관심이 많으신 아저씨가 보리수나무를 보고선 말을 꺼내신다.

 

"와! 꽃이 엄청 피었네. 보리수열매가 여물면 볼만하겠어."

"저도 기대가 되기는 해요."

"이거 초여름에 익지? 뜰보리수이구먼."

"전 보리수인줄만 알았는데, 뜰보리수라고 하나요?"

"그럼. 산보리수는 지금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가 달리지. 우리 것은 산보리수야."

 

보리수나무도 여러 가지가 있는 모양이다. 뜰보리수, 산보리수. 그러니까 우리 집에 있는 것은 뜰보리수이고, 아저씨네는 산보리수인 것이다.

 

뜰보리수, 산보리수 모두 잎이나 꽃 모양은 비슷하나 열매 맺는 시기가 다르다. 뜰보리수는 꽃이 일찍 피고, 열매도 일찍 맺는다. 거기에 비해 산보리수는 꽃피는 시기가 늦고, 피어있는 기간도 좀 길다. 열매는 가을에 여무는데 뜰보리수에 비해 크기가 작다.

 

남의 것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아저씨도 그래서일까? 우리 보리수나무를 보고 부러워한다. 아마 우리 뜰보리수가 자기네 산보리수에 비해 씨알도 굵고, 일찍 따먹을 수 있어 그런 것 같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보리수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제 꽃이 떨어지고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그 많은 꽃을 피웠을까? 흰색 꽃은 죄다 떨어지고, 아직 누런빛을 띤 꽃이 남아있다. 보리수꽃은 처음 필 때는 흰색이다가 누런빛으로 변한다.

 

보리수꽃은 화려하지는 않다. 꽃 모양을 보면 별로이다. 그러나 꽃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는 코끝을 간질인다. 라일락꽃 향과 비슷한 향기로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오늘따라 벌 떼들이 푸짐한 잔칫상이라도 받은 듯 연신 들락거린다.

 

제법 통통해지는 보리수열매를 들여다보며 아저씨가 뜬금없는 말을 꺼내신다.

 

"보리수를 파리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네!"

"파리똥요?"

"보리수를 파리똥이라고 불렀잖아!"

"포리똥이라 하지 안했나요? 그 말이 그 말인가!"

"자세히 좀 보라고! 죄다 파리가 똥 싼 것처럼 점이 박혀 있잖아!"

 

파리똥이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다. 예전에 보리똥이라고도 부르고, 포리똥이라고 불렀다. 보리수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과 잎에 은색과 갈색의 반점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꽃이 진 자리에 길쭉한 모양을 한 열매에도 많은 점들이 있다.

 

파리똥 먹고 놀았던 옛 기억이 새롭다

 

파리똥이란 말을 들으니 참 정겨운 마음이 든다. 간식거리가 흔하지 않던 어린시절, 보리수열매를 따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시고 떨떠름한 맛이지만 달짝지근하여 먹을 만했다. 보리타작을 할 즈음, 여물기 시작한 보리수열매는 조무래기들한테는 귀한 먹을거리였다. 이제나 저제나 열매가 빨개지기를 얼마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가!

 

열매에 살이 붙고, 색깔이 노래지다가 결국 빨갛게 익어 가면 눈독을 들였다. 이때부터 조무래기들 등쌀에 보리수나무는 몸살을 앓았다. 처음에는 손에 닿는 것부터 점잖게 따다가 나중엔 가지를 휘어 훑고, 또 부러뜨리기도 했다. 조무래기들한테 열매를 다 빼앗기고서야 보리수나무는 제정신을 차리지 않았나 싶었다.

 

열매를 훑느라 가지가 부러져도 나무는 이듬해 어김없이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안겨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보리수나무였는가!

 

익기도 전에 설익은 것을 입에 털어 넣고 시디신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한참을 먹다 백태 낀 혀를 날름거리며 또 얼마나 즐거워했는가!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놀았던 어린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그립다.

 

파리똥을 실컷 따먹었던 날, 떨떠름한 입맛에 밥맛도 잃었다. 그땐 그리도 맛이 있었을까? 가끔 옛일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요즘 애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뭐라고 할까?

 

보리수열매로 효소를 내리면 훌륭한 음료

 

우리 집 보리수나무는 5년 전 어린 묘목을 사다 심었다. 이제 제법 나무 티가 난다. 재작년부터는 열매도 달리기 시작했다. 보리수꽃에서 풍기는 향기도 좋고, 다닥다닥 달리는 빨간 열매는 꽃만큼이나 예쁘다.

 

보리수꽃 향을 맡으며 아저씨가 내게 묻는다.

 

"전 선생네는 보리수열매 어떻게 활용하지?"

"술을 담갔는데 별로여서 작년에는 열매만 따먹었죠."

"훌륭하게 쓸 수 있는 것을 잘 모르구먼. 효소를 내려먹으면 그만인데…."

"보리수효소요? 그게 어디에 좋은데요?"

"음료로도 먹고, 천식에 좋고, 설사에도 좋고!"

"그래요? 올핸 꼭 담가봐야겠네요."

 

아저씨는 보리수로 효소를 내리면 훌륭한 음료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맛도 좋고 건강에 좋다며 효소를 꼭 내려보라고 권한다. 하찮은 것이라도 활용하기에 따라 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보리수로 효소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한다. 열매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하고 보리수와 설탕을 같은 비율로 재워 서늘한 곳에 두란다. 100여일 쯤 발효를 시킨 뒤 걸러내고, 시원한 물에 타서 먹으면 그 맛이 상큼하다는 것이다.

 

꽃이 피면 향기로 마음을 사로잡고, 열매는 꽃보다 아름다운 보리수. 열매로 효소를 내려먹으면 훌륭한 먹을거리가 된다니 빨간 보리수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름이야 파리똥이면 어떻고 포리똥이면 어떤가!

 

아저씨가 돌아서며 내게 한마디 던지신다.

 

"밭일할 때 시원한 보리수 효소 나눠먹을 수 있지? 막걸리 대신 말이야!"


태그:#보리수, #뜰보리수, #산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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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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