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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도 '광우병 소'에 대한 말바꾸기 행보에 동참하고 있다.

2007년 "'미 쇠고기 척추뼈 사태... 정부는 '검역중단'이 아니라 '수입 전면금지'"라고 요구하더니, 2008년에는 '광우병 촛불집회=막무가내 투쟁'이라며 ‘실증적 근거를 결여한 막연한 "광우병 불안 선동은 혹세무민"이라며 전혀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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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언론대구시민연대 홈페이지 www.chamm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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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렬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는 8일 참언론대구시민연대 홈페이지(http://www.chammal.org/)를 통해 발표한 칼럼 <누가 학생들을 거리로 불러내었는가?>를 통해 <매일신문>의 이중적 태도를 따끔하게 비판했다.

이 교수는 "30개월 미만의 살코기에 척추뼈가 묻어들어 온 것에 대해 정부가 너무 미온적인 대응을 한다고 비판하던 2007년 사설과 비교해 볼 때, 그보다 더 위험한 미국소를 수입하게 된 것에 대한 비판을 반미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2008년 5월의 사설을 어떻게 봐야 할까?"라며 "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이 사설은 학생 시위가 배후의 정치세력에 의해 선동된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대통령은 나쁜 의미의 정치적 언사를 쓸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런 정치적 언명의 '나쁨'을 밝혀내는 것이 언론의 정도(定道)라고 할 때 이번 <매일신문> 사설은 너무나 나쁜 길을 간 것이다"고 주장했다.

한편 "언로가 막히면 사람들이 직접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다"며 "이번 사설에서 <매일신문>은 '어린 학생들을 불러'낸 정치세력을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학생들을 거리로 내몬 것은 조중동 매일 같은 나쁜 신문들”이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누가 학생들을 거리로 불러내었는가?' 칼럼의 전문이다.

누가 학생들을 거리로 불러내었는가?- 이승렬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참언론 참소리> ‘광우병 촛불집회...막무가내 투쟁’ <매일신문> 사설 비판
"국민을 섬기겠다"는 정권이 들어선 이후 온 나라에 바람잘 날이 단 하루도 없다. 학교 자율화 조치에서부터 대운하, 미국 쇠고기 협상에 이르기까지 현 집권세력은 국민을 섬기기는 커녕 국민의 안위와 행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내놓은 정책들에는 어떤 일관성이 엿보인다. "엿보인다"는 표현은 옳지 않은지 모르겠다. 이런 경우에는 "노골적"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학교 자율화 조치는 어린 학생들에 대한 거의 변태적인 가학성을 드러낸 집권세력의 폭압이다. 우리 학생들이 북한의 노동자들도 아니건만 새벽 별보기 운동에 돌입하여 온종일 입시기계로 조이고 닦인 후 자정이 되어서야 간신히 풀려나 다시 다음날 새벽 별보기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짧은 잠을 청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중고생들의 처지다.

그러나 사교육 시장은 어린 학생들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한창 영역을 확장 중이다. 사교육이 학교로 진입하여 공교육 자체를 접수해버리는 격이다.

대운하는 어떤가? 이것은 한마디로 국토파괴 행위다. 강에 의지해서 식수와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수많은 민초들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춰버릴 숱한 생명체에 대한 무차별 공격행위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경제적 타당성도 없는 것으로 드러난 이런 무모한 사업을 도대체 무엇을 위해 벌이려 하는가?

이 전례 없는 파괴의 향연을 벌이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한줌도 안 되는 건설토목업자들과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땅투기꾼의 이익이 이 사업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다수 민중의 고통과 소수 지배세력의 이윤을 맞바꾸려는, 노골적으로 편향된 정책은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 와서는 극에 달한 모습이다. 이번에는 불특정 다수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요구하고 있다. 여러 가지 권위 있는 의학적 연구가 미국에서의 광우병 위험과 인간 광우병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오로지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만을 절대유일의 기준인 것처럼 떠받들면서 미국쇠고기 협상 결과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경향신문
▲ <경향신문>5월 8일 1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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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열린 국회청문회에서 목격했듯이, 현 정권은 이번 협상이 한미 FTA의 미의회 비준을 위해서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맞추어 이루어진 졸속협상이었음을 애써 감추고 있다. 한미동맹의 강화가 무조건적으로 우리 모두의 이익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광우병 위험이 있는 소를 거래하는 것을 연결고리로 하여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양국의 소수 지배세력이 동맹을 맺고 있는 형국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을 접하고 분노하는 국민들을 향해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먹게 되면 좋은 것”이라고 일갈했다. 물론 이 발언은 정치인의 레토릭 치고는 대단히 유치하고 서툰 것이었음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30개월이 넘는 미국산 쇠고기, 더구나 일부 광우병 위험물질까지 포함하는 쇠고기라면, 그것이 아무리 값이 싸도 결코 질이 좋을 수 없고, 따라서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쇠고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쯤은 초등학생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우병 발병 가능성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보면,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호명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시장 원리주의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이 발언이 그런 효과를 가질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그 발언이 왜 사람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는지 지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2MB라는 대통령의 별칭은 단순히 그의 지적인 한계를 지적할 뿐 아니라 그의 철학적 천박성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한미 FTA라는 무한개방 정책을 통해서든, 유전자 변형 식품을 통해서든, 아니면 보건의료정책을 통해서든,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오래오래 살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사회적 가치도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쾌락적인 장수(長壽)에 대한 욕구에 취해있을 때, 그 이면에서는 우리의 그 무모한 욕구를 부추기는 세력에 의해서 어떤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며 죽음으로 내몰리는 존재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 세상은 사람들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에 의해 지배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우리의 삶은 공학적으로 관리되는 가운데 즐겁고 재미있는 삶이 오랫동안 보장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삶을 보장해주는 사회공학적 시스템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버림받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 안전 시스템 안에 머물려고 발버둥쳐도 그 시스템은 우리를 매순간 그 밖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시스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문(愚問)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 바로 그런 경우인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은 수출과 더 많은 수입으로 인해서 더 강해진 대한민국의 교육 체제 속에서 시험 때마다 부모님 만족시키는 성적을 내기 위해 새벽 0 교시부터 자정 야자시간까지 열심히 공부한 죄밖에 없는 학생들이 학교가 제공한 “국제적으로 안전성이 보장된” 급식 때문에 속절없이 자신들의 목숨마저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지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정녕 주권국가인지, 그것을 그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존의 기반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그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청문회를 통해서 미국산 쇠고기 협상을 주도했던 관료들이 과학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세운 협상 기준을 정권의 요구에 맞춰 스스로 철회하고 어떻게 말을 바꾸었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산 쇠고기를 이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학생들은 얼마나 더 갑갑하겠는가.

갑갑하고 답답한 시민들의 언로(言路) 역할을 해주어야 할 공기(公器)가 언론이다. 그런데 신문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조·중·동 같은 주류 신문들의 행태를 보면, 이들은 그저 청와대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말 바꾸기와 사태의 본질 흐리기와 같은 행태는 책임있는 정론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이다.

<매일신문> 말바꾸기
07년..‘(정부는) 원칙대로 단호하게 대응하라’..08년.‘광우병 촛불집회...막무가내 투쟁’

'국민건강을 생각한다면 미 쇠고기 수입중단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매일신문>2007년 8월 3일 '국민건강을 생각한다면 미 쇠고기 수입중단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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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발행되는 <매일신문>은 종종 <리틀 조선일보>라는 닉 네임으로 불리기도 한다. 결코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다. <매일신문>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보수우익의 정파적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론지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바꾸기, 물타기 같은 행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노회한 정치가들의 정치 언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결코 <매일신문> 같이 정론지를 표방하는 신문의 몫은 아니다. 다음은 <매일신문> 사설에서 뽑은 구절들이다.

'위생조건을 반복해 위반해도 대충 눈치나 살피다가 솜방망이 처분으로 넘어가니까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유야무야 봐주기를 계속한다면 미국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뻔하지 않은가. 원칙대로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2007년 8월 3일자 <매일신문> 사설)

'그 쇠고기가 1997년 이래 단 한 차례도 광우병 사고를 낸 적이 없다. 172개국 정부가 참여한 국제수역사무국(OIE)는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미국을 ‘광우병 위험 통제국가’로 지정해 놓았다. 미국이 광우병 소를 생산하지 않을 수 있는 관리시스템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광우병 촛불집회’는 이런 실상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아무리 뭐라 해도 미제 쇠고기는 반대’라는 막무가내 투쟁이다.‘ (2008년 5월 7일자 같은 신문 사설)

광우병에 걸려 논리적 일관성을 잃은 신문이 아니라면 위의 두 개의 사설이 같은 신문사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광우병 촛불집회'를 '미제 쇠고기 반대'라는 막무가내 투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2007년 사설과 정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 <매일신문>2008년 5월 7일.. '광우병 촛불집회'를 '미제 쇠고기 반대'라는 막무가내 투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2007년 사설과 정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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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7일자 사설에서 미국은 국제수역사무국으로부터 ‘광우병 위험 통제국가’로 판정되었으므로 미국은 광우병에서 안전한 나라라고 세계가 인정한 셈인데 무슨 걱정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면 그것은 반미적인 ‘막무가내’ 투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국제수역사무국으로부터 ‘광우병 위험 통제국가’로 판정받으면 그 나라는 바로 광우병에서 안전한 나라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인지의 법리 해석은 전문가에 맡기기로 하자.

그러나 미국이 ‘광우병 위험 통제국가’로 지정된 것이 2007년 5월 22일이었으니 2007년 8월 3일자 사설은 ‘반미적 막무가내’ 투쟁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다. 그런데 미국 눈치 너무 보지 말고 국민의 건강을 우선해야 한다는 2007년 8월3일 사설을 ‘막무가내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30개월 미만의 살코기에 척추뼈가 묻어들어 온 것에 대해 정부가 너무 미온적인 대응을 한다고 비판하는 2007년의 사설과 비교해볼 때, 그보다 더 위험한 미국소를 수입하게 된 것에 대한 비판을 반미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2008년 5월의 사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이 사설은 학생들의 시위가 배후의 정치세력에 의해 선동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대통령은 나쁜 의미의 정치적 언사를 쓸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런 정치적 언명의 ‘나쁨’을 밝혀내는 것이 언론의 정도(正道)라고 할 때 이번 <매일신문>의 사설은 너무나 나쁜 길을 간 것이다.

언로가 막히면 사람들은 직접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번 사설에서 <매일신문>은 ‘어린 학생들을 불러’낸 정치세력들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학생들을 거리로 내몬 것은 조·중·동·매일 같은 나쁜 신문들이다.

무릇 적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쁜 신문들은 역설적으로 입시의 감옥에 갇혀 있던 학생들과 그들을 미숙하게만 보아왔던 시민들, 모두에게 생존권이 보장되는 좋은 삶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앞으로 연이어 우리 사회를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몰고 갈 것으로 보이는 운하와 학교 자율화 문제를 놓고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오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글쓴이는 참언론대구시민연대(www.chammal.org) 사무국장입니다.



태그:#광우병, #매일신문, #말바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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