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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이른바 '펜타곤 보고서'가 일부 소개된 적 있었다. 이 내용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일요판인 <옵저버>가 미 국방부 비밀보고서를 단독 입수해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밀 보고서는 미 국방부가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정리한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가까운 미래, 국가 간의 중요한 갈등요인은 생존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 기후변화와 이로 인한 자연재해를 꼽았다. 그 결과 식량·물·에너지 확보를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해질 것임을 예고했다. 이 보고서는 부시 행정부에 "기후변화 문제가 과학적 논란의 대상을 넘어 미국의 국가안보적 관심사항이 돼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 보고서 내용 가운데 2007년경 유럽 주요 도시들이 침수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그러나 식량과 원자재 대란이 일어난 지금, 이 보고서의 충고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특히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조차 이 문제를 '국가안보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문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안보에 관한 한, 한국만큼 민감한 나라가 많지 않을 것이다. 5천년 역사 동안 약 1천 회에 달한다는 외침과 일제 40년, 그리고 한국전을 겪으면서 아마도 우리 유전자에는 '생존' 자체의 간절함이 처절하게 새겨 있을지도 모른다.

 

광우병 파동 때문에 촛불집회에 나온 어린 학생들이 "우리는 살고 싶다"고 언뜻 생뚱맞게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의 문제는 단순히 통상교역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문제라는 확신과 함께.

 

국민 보호 위한 방어선 자진 해제한 정부

 

이 땅에 정부가 세워진 지 올해로 60년이나 지났지만, 돌이켜 보면 과연 대한민국에 '국가안보'라는 개념이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앞선다. 그동안 우리의 '국가안보'는 대부분 북한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억지력이었다. 그나마 그 국가안보도 미국에 전적으로 맡겨 둔 상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국가안보를 스스로 규정하거나, 정의하거나, 계획해 본 적이 없다.

 

2008년 현재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 물론 평시작전통제권은 우리에게 있지만 한국이 전쟁 상황인가 아닌가 하는 '국가안보의 상태를 정의하는 주체'는 여전히 미군사령관이다. 한국군이 유사시 어떤 군사작전을 펼칠 것인가 하는 작전계획을 미국이 대신 세워주는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50년도 더 된 습관이다.

 

혹자는 그 덕분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용미(用美)의 실용성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목숨을 남에게 저당잡힌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상태를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상태로 바꾸려는 의지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단지 미국이 싫어서 반미(反美)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은 결코 우리 자신일 수가 없다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군사적 안보상황이 이 정도라면 보이지 않는 국가안보는 보나마나다. 생존이 담보로 잡힌 상황에서 그 무엇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한, 그렇게 50년을 살아온 습관이 쉽게 바뀔 리도 만무하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 탓은 아닐까. 이번 협상 과정과 내용을 보면 그 무뇌적 참담함이 여실히 증명된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안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 보인다. 원자재와 식량 가격의 급상승은 이미 현실이다. 북한이나 주변국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만이 국가안보의 범주에 포함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며칠 전만 해도 서해안에서 발생한 원인 모를 해일로 많은 인명을 잃지 않았던가.

 

안정적인 식량의 공급과 자원의 확보, 예기치 못한 기상재해의 철저한 감시와 대비태세는 21세기 문명국가로 살아남기 위한 필수요소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은 단순히 자동차나 반도체를 사고파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민의 생명이 걸린 일이자 곧 국가안보의 문제다.

 

국가안보를 스스로 정의할 수 없다는 증거는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에서 수없이 드러났다. 얼마 전 강기갑 의원이 폭로했듯이 정부는 불과 몇 개월 전에 스스로 정했던 기본원칙마저도 헌 신짝처럼 내던졌다. 국가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을 자진 해제한 것이다.

 

그 극명한 예는 이번 협상의 핵심 사안 가운데 하나였던 강화사료금지조치와 관련된 것이다. 한국 협상단은 '우리가 정의'해야 할 그 조치들을 '미국이 정의'하도록 포기해버렸다. 이것은 마치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군사작전권을 미군 사령관에게 이양한 것과도 같다.

 

이로 인해 교차 감염에 노출된 미국소들이 수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뿐인가. 미국에서 광우병이 창궐해도 우리가 우리 대문 하나 닫지 못한다. 현 정부는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아니라 미국을 섬기는 머슴이었다. 자기 나라를 자기 손으로 지키지 못한 대가는 이처럼 비참하리만치 값비싼 것이다.

 

누가 국민더러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는가

 

이명박 정부도 자원외교를 얘기했고 한국군의 자부심도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국가안보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식량에 큰 구멍이 뚫린 자원외교란 그저 장사치의 얕은 계산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미국에서 얻어온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대통령에게 국가안보라는 개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니 국가안보는 고사하고 시장 상인들도 이런 식의 밑지는 장사는 안하지 않을까.

 

이명박 정부와 보수언론은 지금 시민들과 학생들이 비과학적인 주장에 현혹되어 비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비과학인가. 한 국가가 국가이기 위해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요소들을 정의조차 하지 못하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과학을 운운할 수 있는가?

 

과학은 올바른 개념정의에서 시작하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한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면 그것은 과학법칙으로써 큰 의미가 없다. 정부가 아무런 근거 없이 스스로 정한 원칙을 불과 몇 달 만에 자기 손으로 부정하는 마당에, 국가존립을 위한 보편원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판국에, 이를 지적하는 국민더러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무지한 국민이 잘못된 과학적 '지식의 단편'들에 현혹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소한 잘못이다. 합리적이고 광범위한 토론으로 올바른 지식이 유통되면 금방 해결될 문제다.

 

이에 비해, 정부가 스스로의 원칙을 무너뜨린 행태는 과학이나 문명과는 한참 거리가 먼 야만에 가깝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산다고 문명사회가 아니다. 역사의 시작은 기록과 함께 했다. 인류의 언행을 기록으로 남겨 스스로의 준거로 삼고 후대에 남겨 온 발자취가 곧 문명의 역사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그 행정부는 문명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반(反)문명적이다.

 

주무부서는 자신들이 작성한 협상의 기준과 광우병의 위험성을 모조리 부정했다. 더불어 보수언론들도 지금 하나같이 5년 전 자신들의 말들을 모조리 뒤집었다. 이들에게 미친 소는 이미 미친 소가 아니라 값싸고 질 좋은 고기일 뿐이다. 오히려 소 곱창을 즐겨 먹는 우리의 오랜 식습관이 문제라고 탓하는 분위기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양반들이 국민에게 과학을 요구하고 있다!

 

배후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이명박 대통령

 

이런 대통령과 정부에 국민의 생명과 나라의 안보를 맡겨야 한다니, 그 실체를 확실히 알아차린 국민치고 길거리로 뛰쳐나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바쁜 국민이 만사 제쳐놓고 촛불을 들 수밖에 없었던 그 절박한 마음을 그리도 헤아릴 수 없을까. 그 뒤에 배후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대체 국민이 청계천으로 달려나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문명에 대한 개념도 없어 보이는 대통령과 정부의 잘못된 쇠고기 협상 때문에 지금 한국은 심각한 '국가안보 위기상황'에 봉착해 있다. 식량은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국가안보요소다. 그 세세한 내용은 모르더라도 지금 어린 학생들은 그 생존의 위협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거리로 나섰다. 민심은 천심이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명박(MB)은 미친 소(Mad Bovine)'라고 연호했다. MB가 결국에는 '인간의 파괴자(Mankind Buster)'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태그:#이명박,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쇠고기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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