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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입은 가디건 밑으로 도드라진 뼈를 보면, 그때 동생이 얼마나 말랐었는지 짐작이 간다.
▲ 2005년 9월 일본 후쿠오카 동생이 입은 가디건 밑으로 도드라진 뼈를 보면, 그때 동생이 얼마나 말랐었는지 짐작이 간다.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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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한국 들어가는 길에 일본에서 '스톱오버'를 하기로 했다. 스톱오버 때문에 미리 돈을 더 내기도 했거니와, 일년을 계획하고 왔던 호주 생활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도 솔직히 안타까웠는데, 일본까지 들르지 않고 바로 들어간다면 나중에 후회를 많이 할 것만 같았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동생을 만나 같이 여행하기로 했다. 나는 아침 일찍 브리즈번에서 출발하고 동생은 오후에 인천에서 출발하면 대충 오후 늦게 공항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짐을 찾고 나오면 바로 앞에 있는 공항 안내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동생을 7개월 만에 만난다. 항상 인터넷 속에, 메신저 안에서만 존재했던 동생을 다시 현실에서 만난다. 7개월 만에 만나는 동생, 거기다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져 가발을 쓰고 나타날 동생이다. 작년 9월, 건강했고 일하러 다니면서 돈도 벌던 그때의 동생보다 얼마나 말라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동생을 알아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까지 생겼다. 괜히 같이 일본 여행을 하자고 한 건 아닐까, 아픈 애한테 괜히 여행 가자고 해서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그냥 스톱오버하지 말고 바로 한국 들어갈 것을, 서로 괜한 고생 하는 건 아닐까, 스톱오버한다고 고작 5만원 더 냈는데, 그거 아깝다고 괜히 여행하자고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나리타공항에서 동생을 만났다. 두건을 쓰고 나타난 동생, 예전보다는 조금 살이 빠진 듯했다. 동생은 항암치료하고 고작 이틀 쉰 후 일본에 온 것이다. 내가 정말 여행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 동생은 일본에 가고 싶다고, 일본이니까 갈 수 있다고 했었다. 무엇이 동생으로 하여금 비행기를 타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동생을 일본으로 끌어들이는지, 조금은 낯선 동생이, 씩씩하게 표를 끊고 가방을 끌고 지하철을 탄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2005년, 동생은 4월 25일에 수술을 받은 후 1차 항암치료를 받고 자그마치 40kg도 안 되는 몸으로 퇴원했다. 힘이 전혀 없어 화장실 가기가 힘들어 동네 내과에 가서 관장을 받기도 했다. 빵이 먹고 싶다고 울기도 했고, 콩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서 동네 분식점에 가기도 했으며, 어느 날은 호박죽이 먹고 싶다고도 했다.

몸에 살이라곤 전혀 없어 옷을 다시 사야만 했다. 그러나 그 몸으로 동생은 자기가 좋아하는 모 배우의 팬클럽 모임에도 나가고 좋아하는 배우의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그런 마음이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6월에 2차 항암, 7월에 3차 항암, 8월에 4차 항암. 머리를 감다 빠지는 머리카락에 식겁을 하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어버린 건 벌써 오래전이었다. 8월, 항암을 네 번이나 한 그 힘든 몸으로 동생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일본에 가고 싶다고 했다.

동생은 이미 두 번인가 일본을 다녀온 후였는데도 말이다. 그때 동생은 몰랐지만, 의사선생님이 일 년 시한부를 말했던 터라 언니와 나는 어쩌면 동생과 갈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가자…. 네가 가고 싶으면 가자….

부모님이 아시면 걱정을 많이 하실 거 같아, 우리 세 자매는 몰래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일주일 동안 후쿠오카를 여행했다.

"나 태국 갔다 오면 뭔가 정리가 될 거 같아"

2주 동안 유일하게 동생과 같이 찍은 사진
▲ 2006년 3월 태국 아유타야 2주 동안 유일하게 동생과 같이 찍은 사진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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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동생은 결국 항암치료를 그만두기로 했다. 힘들다고 받기 싫다고 했다. 의사선생님은 많이 힘들면 항암치료는 중지하고 씨티촬영만 석 달에 한 번씩 해보자고 하셨다. 항암치료를 그만두자, 동생의 입맛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살이 붙었고, 동생이 그렇게도 원했던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자라기 시작하자 동생은 미용실에 가서 그 짧은 머리를 볶아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 해가 지나고 2006년이 되었다.

항암치료를 받지 않았지만, 씨티에는 그다지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동생도 자기가 더 이상 집에서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지 조금 두렵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 상황을 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나 태국 갔다 오면 뭔가 정리가 될 거 같아. 그러면 사회로 다시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면서 비행기 표를 예약하더니 정말 혼자 훌쩍 태국으로 가 버렸다. 2006년 3월이었다. 걱정이 많이 된 나는 매일 전화를 하라고 했다. 나는 동생의 전화가 와야만 그날 하루를 안심할 수 있었고, 전화가 없는 날은 걱정이 되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걱정하느니, 같이 여행을 하자 생각했다. 나도 태국행 비행기를 타고 말았다.

다음 여행도 계속될 수 있기를

여행 온 어느 모녀의 사진을 찍어줬더니, 그 딸이 우리보고도 사진 찍어준다고 나란히 서라고 했다.
▲ 2008년 3월 일본 아사쿠사 여행 온 어느 모녀의 사진을 찍어줬더니, 그 딸이 우리보고도 사진 찍어준다고 나란히 서라고 했다.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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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항암치료를 중단한 지 2년 만에 씨티 촬영에서 암세포가 다시 발견되었다. 동생은 항암치료를 다시 받아야 했다. 동생의 머리카락은 다시 빠졌고, 나는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 옆에 있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동생과 나는 참 잘 맞는 여행친구다. 물론 여행 중에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든든하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 도쿄도청 1층에 진열되어 있던 여행정보 안내서를 한아름 들고 왔다. 다음 여행을 꿈꾸면서 말이다. 우리의 여행이 계속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태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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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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