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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예전엔 유치환의 시 ‘그리움’을 비롯해 ‘행복’, ‘깃발’ 등, 시를 참 많이 암송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시를 읊어보려 하면 가만가만 읊어보다가도 중간쯤에 생각이 나지 않는 시들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행복’,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의 생가와 문학관을 찾았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의 기념관은 청마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출생지인 거제시에서 지난 8년간 28억50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착공에 들어가 지난해 12월 전시관과 사무실 등을 갖추고 지하 1층, 지상 1, 2층 기념관을 준공하게 된 것이다. 기념관 앞마당에는 청마의 청동상과 그의 시비 등이 있고 전시관 안에는 청마 유치환의 시와 친필원고, 당대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거제도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에서 1908년 7월 14일 태어난 청마 유치환은 3살까지 이곳 둔덕면 방하리에서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8남매 중 차남으로 장남은 극작가 유치진이다. 11세까지 한학을 배웠고 일본 도오쿄오 토요야마중학교에 입학, 1926년 동래중학교를 5년 편입 후 1927년 연희전문학교를 수료했던 그는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청마의 생가와 문학관은 통영 정량동 망월봉 기슭에도 있다.  통영시와 거제시가 한동안 청마의 출생지와 생가 등을 두고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한 사람의 시인이나 소설가 등 예술가가 난다는 것이 그 나라와 지역에서 특별한 것임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통영에서 청마의 생가가 통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3살 때까지 거제에서 자랐고, 3세 때 통영시 태평동 500번지로 이주 해, 그 이후 통영에서 그의 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지금도 통영 남망산 공원에는 유치환의 시 ‘깃발’이 적힌 바위가 있다.

 

‘깃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혜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고운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조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어쨌든 통영은 예술의 도시이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를 비롯해 음악가 윤이상, 시인 김춘수 등은 통영의 푸르른 바다가 만들어 낸 예술가들이다. 청마 유치환 생가와 기념관에는 이따금씩 이곳 조용한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인해 작은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예전에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인용하기도 했었던 유치환의 시 ‘행복’이 문득 떠오른다.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했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태그:#청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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