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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특검과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에 대한 사제단의 입장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

 

지난 4월 17일 삼성특검이 발표한 수사결과와 어제 삼성그룹이 내놓은 경영 쇄신안에 대한 사제단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특검의 수사결과에 대한 법리적 평가는 경제개혁연대와 참여연대, 그리고 민주화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힌 바 있으므로 짧게 지적하겠습니다.

 

1. 삼성 특검에 대하여

 

삼성특검은 의혹의 핵심이 되는 비자금 조성과 로비에 대해서는 범법 당사자들의 일방적인 주장과 진술을 근거로 모조리 무혐의 처리하였습니다. 또 경영권 승계과정의 위법사항에 대해서도 경영권 방어 차원이라는 다른 동기를 인정하여 책임자 모두를 불구속 기소하였습니다. 이로써 삼성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갖가지 범죄사실로부터 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며, 수많은 불법행위의 근본 이유였던 경영권의 부자세습마저 법적 정당성을 얻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한 특검이었으며 누구를 위한 특검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미 자신이 가담했던 범죄사실을 고백하고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삼성특검은 그의 고백을 철저히 묵살하면서 범법자들을 편들어 결론을 꾸며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자기도 모르게 자본권력의 기울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강자 편향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몹시 슬픈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특검결과야 말로 자본에 의한 국가공권력의 매수와 타락상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싶어 슬픈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삼성특검의 수사결과를 양심과 진실의 이름으로 믿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삼성그룹과 우리 사회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너무나 소중했던 기회를 날려버린 조준웅 특검의 죄과를 엄중히 꾸짖고자 합니다.

 

2. 삼성그룹의 경영 쇄신안에 대하여

 

삼성그룹이 어제 경영쇄신안을 발표했습니다만 먼저 특검이 내린 수사결론과 상충 혹은 모순되는 바를 지적해야겠습니다. 특검이 주장하듯 비자금 조성 및 불법 로비 등 삼성을 향한 갖가지 의혹도 사실무근이며, 몇 가지 허물이 드러나긴 했어도 그것이 개인적 탐욕에서 비롯되는 배임이나 조세포탈과 달리 기업의 경영 및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범한 행위 정도라면, 삼성은 공연히 쇄신안을 마련할 게 아니라 기왕의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특검의 해명이 필요합니다.

 

어제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을 비롯한 인적쇄신, 그리고 전략기획실의 해체 등을 골자로 삼성그룹의 혁신안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무혐의를 확신하는 삼성특검은 차치하고, 삼성 최고경영진은 자신들의 과오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막연히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얼마나 진지한 참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범한 죄로 세상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고 오염시켰는지 깊이 성찰하고 이를 낱낱이 진솔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지 않는 한 인간의 연약함과 탐욕이 빚어내는 과오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게 신앙이 밝혀주는 인간실존의 특성입니다.

 

삼성그룹이 진정으로 새로운 출발을 원한다면 특검이 입증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의 불법, 편법, 탈법한 실상을 낱낱이 고백하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쇄신안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비자금 조성과 국가 권력 매수를 위한 조직적인 불법 로비는 굉장히 무서운 범죄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무서운 일을 무섭지 않게 여기고, 부끄러운 일을 부끄럽게 여길 줄도 모르게 된 것이야말로 더 없이 무섭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회장과 가신그룹의 퇴진, 전략기획실의 해체 등의 조치가 있으나 순환출자구조의 개선안을 밝히지 않은데다 모든 죄의 근원이었던 불법승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쇄신안도 오랜 세월동안 삼성이 관행의 이름으로 반복해온 여러 가지 병폐를 단절하는 개혁안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평가와 분석은 이미 경제개혁연대 등의 전문 기관에서 내린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3. 다시 출발점에서

 

1)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의 의미를 다시 새겨 봅니다.

 

군부통치 아래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사제들은 자본이 오늘의 독재 권력이 되어 검찰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을 매수하고, 그리하여 본시 공동선을 위해 복무하도록 마련된 각종 공권력이 어떻게 마비되고 오염되는지를 이번 일을 통하여 깊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은 물론이고 돈의 힘에 굴복해버린 각계의 유력자들과 돈으로 영혼을 매수하는 자들까지 결국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습니다.

 

이런 와중에 터져 나온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은 더 이상 낡은 질서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신음이며 새로운 질서를 목말라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김 변호사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삼성그룹의 깜짝 놀랄만한 비정상의 행태들에 대하여 들려주었습니다. 현금이 가득 든 돈다발을 삼성본관까지 실어 나르는 일이 일상 업무였다는 계열사 직원도 있었고, 노무관리에 종사하면서 노조설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박해하고 지역의 법원과 검찰, 경찰청과 기자 등을 일상적으로 관리했다는 전직 사원도 있었고, 말로만 정도경영이었지 실제로는 무노조 경영을 위하여 관계기관과 짜고 노조설립을 방해하고 노동자들을 마구 괴롭히는 등 양심과 도덕에 어긋나는 일에 종사했던 자신의 과오를 털어놓으며 괴로워 우는 전직 임원도 있었습니다. 차마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런 분들의 고백은 우리 사회가 과감하게 낡은 질서를 폐기하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때가 된 것을 알려 주는 표징이었습니다.

 

한편 일부 언론의 왜곡과 많은 지식인들의 침묵과 냉소는 용기 있는 증언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지연되고 있는 경제민주주의의 배후에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또한 경제라는 이름의 물신을 위해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오늘의 국민정서 또한 재벌의 범죄를 방관하거나 관대하게 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공범이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2) 호소와 다짐

 

가. 1987년이 절차 민주주의의 원년이었다면 삼성 비자금 사태가 발발한 작년 2007년을 경제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원년으로 삼고자 합니다.

 

나. 많은 시민 사회단체와 각계의 역량이 국가권력과 재벌 그리고 언론의 관계가 건강해지도록 파수꾼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제단은 그 동안의 증언들을 토대로 권력과 자본의 결탁사례를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일을 계속 해 나가겠습니다.

 

다. 저희 사제들은 물신풍조에 적극 대항하지 못하고 경제적 약자들의 희생을 돌보지 못한 게으름을 참회하는 뜻으로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단식기도를 할 것입니다. 뜻있는 시민들의 동참을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라. 기업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은 기업인 여러분과 노동자 농민 등 모든 국민들이 함께 일군 소중한 열매입니다. 서로 나누고 섬길 때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마. 우리들은 경제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가치를 위하여 중단 없이 싸워나갈 것입니다. 그 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저 마다의 자리에서 저희와 함께 해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2008년 4월 23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태그:#삼성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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