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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 광장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연설하고 있다(4월 8일).
 대전역 광장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연설하고 있다(4월 8일).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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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혁명'과 나의 어린 시절

한 인간의 생애에서 초등학교 시절은 꽃 피는 시절이다. 명랑·발랄·깜찍해야 마땅한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러나 내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지 못했다. 혁명의 열기와 더불어 시작됐던 것이다. 한 해 전, '혁명'에 성공한 혁명정부는 우리 같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혁명의 이념을 주입시키느라 혈안이 됐다.

일상의 인사조차 '재건'이라는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를 올려야 했다. 거의 오십여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슬로건도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우리는 이 슬로건을 시도 때도 없이 복창해야 했다. "재건 재건 만나면 인사/ 부지런한 웃음 속에 혁명과업 이루자!"라는 가사를 가진 노래도 떠오른다.

모든 혁명 세력들은 자신들이 가진 이념이 느리게 전파되는 것을 불만스러워 한다. 숭악한 산골 촌놈이었던 내가 라디오라는 걸 처음 본 것은 5·16이 일어난 이듬해였다. 동네 이장 일을 보던 큰집 조카가 면에서 마을 공용으로 '금성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타왔던 것이다. 이 라디오는 감나무에 매단 스피커를 통해 마을 전체에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의 성스러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이 라디오는 소리가 났다 안 났다 하면서 고장을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세게 내리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멀쩡하게 소리가 나곤 했다. 이 라디오는 노년에 온몸을 고무줄로 칭칭 감은 채 연명해야 했다. 비록 '긴급조치'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물건이긴 했지만, 20여 년이 넘도록 사용했으니, 자신의 과업은 다 이룬 셈이랄까.

혁명정부가 합법적 권력을 획득한 것은 1963년 10월에 치러진 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였다. 선거 벽보를 통해 박정희 장군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매우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던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약간 무섭게 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내가 독재정권의 폭력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최초의 사건이 일어났다. 1968년 12월 5일에 발표한 '국민교육헌장'이 그것이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사실을 '어린 백성'이 잘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었다.

담임선생은 우리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암기를 증명해 보인 친구에게만 하교를 허락했다. 헌장을 외우지 못한 채, 사방이 캄캄해지도록 초조하게 교실에 남아 있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어떤 내용의 것이든 폭력의 기억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10월 유신·긴급조치 9호 등으로 자신의 철권통치를 차근차근 강화해 나가던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부하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재임 시, 그는 '각하'라는 극존칭으로 불렸다. 각하(閣下)란 호칭은 너무나 높으신 분이라서 감히 같은 땅 높이에서 뵙지 못하고 '전각 아래에서 뵙는다'라는 뜻이다. '조국 근대화의 화신'이었던 박 대통령이 왜 그토록 전근대적인 자신에 대한 호칭만은 근대화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각하'라는 황송무지한 호칭을 근대화한 것은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근대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기권'이라는 현상뿐

며칠 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결과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서 내가 가장 놀랬던 것은 새로이 등장한 '여도야촌(與都野村)' 현상이다. 서울 시민은 권력에 대한 견제를 포기해 버렸고, 김근태를 비롯한 민주화 세력들은 '춘풍낙화' 신세가 돼 버렸다.

이것은 아마도 특별시민들께서 '가치' 대신 '실용'을 선택한 결과일 게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뉴타운 공약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구한 말 개화파로부터 근대화론자로 면면히 이어지던 '개발론자'들의 법맥이 생생하게 되살아난 셈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지지하는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연대'의 대거 당선이었다. 이번 총선의 최대 승리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라는 말이 전혀 허랑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다 알다시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각하'의 딸이다. 전혀 '근대화'되지 못한 이번 선거판에서 근대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기권'이라는 현상뿐이었다.

이번 국회의원 당선자의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각하'께서 돌아오신 게 아닌가 하는 환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각하가 돌아왔다
겨울에 떠났던 그가
겨울에 다시 돌아왔다 산속에서 초인이 된 그가
부처가 된 그가 꿈에도 그리던 지배했던 거리로 돌아왔다
기억이 나는지, 그가 우리 곁에 있었던 나날들
행복했었나 즐거웠었나 사람들 찬가 부르며 환영하는
이 거리에서 우리는 예전에 무엇 때문에 안 나오는 소리
고래고래 지르며
자유를 갈망했었나
짜라투스트라가 30세에 산으로 들어가 40세에 하산했듯이
예수가 40일 간 고행했듯이
그도 이제 산속에서 얻은 깨달음 우리에게 전하려 할텐데
그를 쫓아냈던 사람들 오히려 그를 따라다니며
가르침 받으려 하는데
그가 돌아오기까지 우리는 이 거리에서 어떤 일에 골몰하고 있었나
무얼 얻었다고 기뻐 날뛰었나
그를 그리워했던 사람들, 그의 얼굴 보고 싶어 산속까지
찾아갔던 사람들 원 풀게 될 날이 다시 올지도 모르리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던 한 사나이가
인생 공부를 좀더 하고 세상으로 돌아온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아니면, 부조리라든가 말세라든가
업보라는 말들로 체념할 수 있겠나 어쨌건 그가 돌아왔다
높고 험하지만 아름다운 산중에서
초인이 된 그가, 예수가 된 그가, 부처가 된 그가, 다시
군림하고 호령했던 도시로 돌아왔다 기억이나 나는지
그가 우리 곁에 있었던 지옥과 같던 나날들
행복했었나 즐거웠었나, 손 흔들며
노래로 환영하는 이 혼란한 속세에서
우리 형제들은 왜 피 흘렸었나
우리는 그 동안 뭘 하고 있었나

- 이응준 시 '각하가 돌아왔다' 전문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응준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뒤 1993년에는 계간 <상상>에 단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소설가를 겸하고 있다. 1995년에 처음 펴낸 시집 <나무들이 그 숲을 거부했다>에 수록된 시 '각하가 돌아왔다'는 지금의 내겐 예언자적 목소리로 들린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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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는 10년 동안 산속에 머물다 하산한 짜라투스트라처럼, 광야에서 40일간 고행을 마친 예수처럼, 설산에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부처처럼 예전에 그가 "군림하고 호령했던 도시"로 돌아온다.

"그를 쫓아냈던 사람들 오히려 그를 따라다니며/  가르침 받으려" 한다. 그리고 혼란한 속세는 기억이 나는지 안 나는지 "그가 우리 곁에 있었던 지옥과 같던 나날들/  행복했었나 즐거웠었나, 손 흔들며/  노래로 환영"한다.

각하의 귀환을 환영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시 속 화자는 "우리 형제들은 왜 피 흘렸었나/  우리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품는다. 반성과 의아심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리다. 나 또한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과연 저들이 20년 전, 6월 항쟁을 일으켰던 그 대중이란 말인가""라는 의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흘러가지 않은 지겨운 과거

<군중과 권력>이라는 책에서 엘리아스 카네티는 우리에게 군중 혹은 대중이 지닌 양면성을 잘 설명해준다. 그에 따르면 군중이란 황홀한 존재인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기도 한 이중적 존재다.

군중이란 하늘에 뜬 구름보다 더 무상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조변석개(朝變夕改)할 만큼 변덕스러운데다 조삼모사(朝三暮四) 해도 모를 만큼 어리석다. 나는 정치가들이 툭, 하면 내뱉는 "국민의 위대한 선택"이니 "현명한" 혹은 "절묘한"이라는 수사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2차대전 후, 많은 역사가들은 파시즘을 역사의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전체주의적 강제동원 체제로 파악했다. 2차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는 자발적으로 참여할 줄 아는 유순한 대중을 다루는 법을 잘 아는 천재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무수한 대중을 국민으로 만드는 일은 소위 객관적 관점을 나약하게 강조하는 어정쩡한 방식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면서 "목표를 향해 무자비하고 광적이며 일방적으로 나아가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라고 자신의 '대중관'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조지 모스는 파시즘이란 "루소 이래 서구 사회에 팽배했던 인민주권 사상의 구현이며, 강제적 동원이 아닌 자발적 참여와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쓴 <대중의 국민화>란 책 속에는 나치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던 때 독일 국민들이 외웠다는 '히틀러를 위한 기도문’이 나온다.

당신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시니, 당신의 이름은 적들을 떨게 하나이다. 당신의 왕국에 임하옵시고, 당신의 뜻만이 이 땅 위에서 법칙이 되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옵시며, 또한 우리의 삶을 투신하여 복종하길 원하옵는 당신 지도자의 지위를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소서. 구세주여, 이를 언약하나이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을 연상시키는 듯한 내용이다. 히틀러의 가학에 기꺼이 응할 준비가 돼 있는 대중의 피학적 태도가 가히 놀라울 뿐이다.

시간상으로는 과거에 속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현재적이다. 현재 사는 사람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총선 결과는 우리 안에 내재해 있던 파시즘의 부활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응준의 시에 등장하는 '각하'는 우리에게 냉동 보관된 '쥐라기시대 공룡의 DNA 같은 것인지 모른다. 아니다. '각하'의 DNA는 우리 모두에게 내장된 것이라고 해야 옳겠다. 개발독재의 망령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 현상을 보면서 흘러간 날의 내 애창곡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잃어버린 그 님을 찾을 수 있다면/ 까맣게 멀어져 간 과거로 돌아가서/ 못 다한 사연들을 전해 보련만/  아쉬워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여운 노래 ''과거는 흘러갔다' 2절). 지난 십 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독재의 추억뿐이다. 보라, 한갓 유행가마저 과거는 흘러갔다지 않는가 말이다.


태그:#이응준 , #역사,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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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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