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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 줄스 닷신 감독이 그리스 아테네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96세. 신문을 읽노라니, 그가 감독했던 영화 <페드라>(1962년 작)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스포츠카를 몰고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부르면서 가던 알렉시스(앤소니 퍼킨스 분)는 갑자기 전방에 나타난 트럭을 피하려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 '페드라! 페드라!'를 목청껏 외치면서.

 

<페드라>는 내게 영화보다 노래로 먼저 다가왔다. 1976년, 첫 번째 시낭송회를 열면서 시낭송을 받쳐줄 배경음악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다. 당시는 음향 시설이 아주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FM과 주파수를 맞춰 사용하는 무선 마이크라는 게 처음 등장했던 시기였다. 소리가 간간이 끊어지는 폐단이 있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려면 아무래도 레코드를 틀어놓고 시낭송을 하는 것보다 생음악과 호흡을 맞추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클래식 기타를 쳐 줄 사람을 물색했다.

 

친구의 소개로 전북대에 다니는 박성인(가명)을 만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등학교 1년 후배였다. 우린 처음부터 궁짝이 잘 맞았다. 첫 번째 시낭송회를 성공리에 마치고나자, 우리 사이엔 마음의 경계가 사라졌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군산 시내의 선술집들을 전전하면서 알코올과의 소통을 추구했다. 그러다가 월명산 산꼭대너 기에 있는 '산장'이란 간판을 단 그의 집까지 가는 게 풀코스였다.

 

술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는 기타를 꺼내든다. 그리고 마침내 금지된 장난(Romance)으로 시작하는 클래식 기타 명곡 순례에 들어간다. 기타는 일종의 다스름이다. 이윽고 성인이는 레코드 한 장을 집어든다.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영화음악 <페드라>였다. 우리에게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작곡가로 알려진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그리스 내전 중에 그는 좌파로 활동했다. 그 때문에 조국을 떠나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면서 음악 활동을 해야 했다. 61년에 조국 그리스로 다시 돌아왔지만 67년부터 70년까지는 다시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감옥 생활을 했던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12개의 트랙이 끝날 즈음, 마침내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알렉시스가 "페드라!"를 소리 높여외치는 마지막 장면에 도착한다. 1분에 33과 1/3의 속도로 회전하는 LP판이 만들어낸 절망의 파도가 우리의 가슴으로도 넘실거린다. 알렉시스와 더불어 우리도 함께 절규한다."죽어도 좋아!"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시낭송회를 열다 

 

성인이와 두 번째 시낭송회까지 같이 하고 나서 난 육군에 입대했다. 성인이 역시 두어 달 후 전경에 입대했다. 1978년 12월 8일,  입대한 지 10개월 만에 일병 계급장을 달고 첫 휴가를 나왔다. 집에 도착한 다음 날 시내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형!"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전투경찰 복장을 한 성인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성인이는 충남 서천 근방에서 벌어진 대간첩 작전을 나왔다가 2박 3일간 특박을 얻었다는 것이다.

 

"형, 우리 시낭송회 한번 할까?"

"네가 그럴 시간이 있겄냐?"

"내일 당장 해치워버리지 뭐."

 

우린 바로 다음날 시낭송회를 열기로 결정해 버렸다. 그 길로 술집을 나서 시내 한복판에 있던 동원예식장으로 가서 장소를 예약했다. 또 인쇄소에 들러 내일 오전 10시까지 팸플릿을 인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인쇄소 사장은 무리라고 펄쩍 뛰었다.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딨니? 더구나 군바리에게.

 

다음날 일찍, 낭독 연습할 장소를 찾아 아는 웅변학원으로 갔다. 거기서 첫 시낭송회에서 문학 강연을 해준 교수에게 전화로 휴가나온 인사를 했다. 교수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라고 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교수가 4·19때 부상당했다는 불편한 다리를 끌고 계단을 올라왔다.

 

"야, 안군. 군인이란 모름지기 단순해야 한다. 우리 술이나 먹으러 가자."

 

아마 오전 11시쯤이나 되었을 것이다. 색시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내 군 생활에 대해 물었고, 난 하품 나오도록 지겨운 나날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렇게 이어진 술자리가 시낭송 시작 시각인 6시 직전까지 이어질 줄이야. 부랴부랴 낭송회 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200여 석의 좌석이 꽉 차 있었다. 미처 연락할 틈도 없었건만 어떻게 이렇게 많이도 모였을까. 기껏해야 20~30여 명의 청중을 예상했을 뿐이었다.

 

성인이를 찾았다. 그러나 미리 와 있을 걸로 생각했던 성인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술이 달아오른 불콰한 얼굴을 한 성인이가 도착했다. 말없이 군복 뒷주머니를 열어보인다. 거기엔 소주 한 병이 원산폭격 자세로 처박혀 있다.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둘 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술에 취해 있으니. 그렇다고 백낙천의 시 <비파행>처럼 "난 취한 채 자고 싶어/그대들은 돌아가도 좋으리/오고 싶으면 내일 아침 거문고 안고 오시라" 어쩌고 하면서 돌려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이크를 잡고 최대한 염치없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 엊그제는 제가 있는 전방에 눈이 내렸습니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눈 쌓인 들길을 한없이 걷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침밥을 먹자마자 중대에서 집합 종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제설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눈은 눈이 아니라 그저 군바리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환멸이었지요. 여러분, 지금 제가 있는 곳은 바로 그렇게 삭막한 곳이랍니다. 그 삭막함을 달래려고 한 잔 마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저희가 술 마신 구차스러운 변명입니다. 이해하신다면 박수를 쳐주십시오."

 

박수가 터졌나왔다. 성인이가 조용히 "깊어가는 가을 밤에/낯설은 타향에"로 시작되는 '여수'라는 노래의 멜로디를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음악에 맞추어 나도 군 생활 틈틈이 끄적거린 노트에 적힌 시나부랭이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문학을 나와는 상관없는 과외의 것으로 간주한다. 도대체 시 나부랭이에 매달려 어쩌자는 것인가. 아라비아 사막이나 고비 사막 쯤에 던져진다면 그때에도 시 따위에 목숨을 의탁하여 살 수 있단 말인가. 그 대신 난 시를 쓰지 않고도 시인처럼 사는 생애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여러분, 저는 아직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생을 꾸려 나갈 것인지 대한 아무런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삶이란 걸 생각하면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 저도 확실한 방향 감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언제겠습니까? 바로 술 먹었을 때랍니다. 제가 가야할 방향은 어디겠습니까? 바로 화장실이랍니다."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성인이의 기타 소리가 공백을 메워 주었다. 젊다는 것은 일종의 난해시인지도 모른다. 도무지 해석이 안되는 행동들을 억지로 이해해줘야 하는.

 

어쨌든 시낭송회는 무사히 끝났다. 밖으로 나오자, 눈발이 굽이치고 있었다. 갈기찢긴 내 마음으로도 바람이 휘날려왔다. 가눌 수 없는 몸에 가눌 수 없는 마음이 합쳐져 기우뚱거렸다. 다음날 정오. 우린 삼남집이라는 막걸리 집에서 만났다. 어제 시 낭송회를 무사히 끝낸 것을 자축하는 술자리를 벌였다. 문득 생각난 듯 성인이가 말했다.

 

"형, 우리 내장산이나 갈까."

 

겨울 해는 참새 혀보다 짧다. 내장산에 도착하니 이미 산은 땅거미가 길게 진주해 있었다. 서래봉 쪽으로 난 길을 택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달빛이 비추어주고 며칠 전에 내린 첫눈도 쌓여 있어 사위가 제법 환했다. 내장산은 오르기에 그다지 힘이 드는 산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농기구인 써레를 닮았다는 해발 622m의 서래봉 정상에 올랐다. 전투경찰이 먼저 전투적으로 소리쳤다. "선아야!" 선아는 그가 짝사랑했던 연세대 여학생이다. 육군도 뒤질세라 따라서 소리쳤다. 단지 이름 불러야 할 여자가 없었으므로 친구들의 이름을 부를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순간, 수억 광년 저편에서 흘러오던 별빛이 깜짝 놀라 정지하는 것을 보았다. 

 

부르고 싶은 이름들이 서서히 바닥날 무렵,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페드라!" "페드라!" 저 앞 장군봉 쯤에서 메아리가 되돌아왔다. 죽어도 좋았던 청춘의 한 때가 먼지가 되어 허공 속으로 흩어져 갔다.

 

실용주의가 판치는 시대의 시 쓰기와 시 읽기

 

답답한 사람들이 시를 쓴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시를 읽는다

 

무엇이 무엇인지 지저귀는 소리를

러시아와 한국이 시를 섞어 읽는다

그러나 모른다고 보채지는 말아라

흰 소리 검은 소리 따지지도 말아라

간절한 억양의 마지막 부탁

강신의 울음을

창세의 방언을

꿈인지 아득한 불벼랑인지

예언을 축복으로 내리는 소리

 

참새는 참새

도요새는 도요새

러시아 말은 몰라도

러시아 시는 알아라

세계의 여기저기 시를 읽는 소리

 

바보 같은 사람들이 시를 쓴다

답답한 사람들이 시를 읽는다 - 이향아 시 '시낭독회' 전문

 

시를 쓴 이향아 시인은 충남 장항에서 태어났지만, 전북 군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현대문학>에 <가을은>, <설경>, <찻> 등의 작품이 추천받으면서 1966년 문단에 나왔다. 이 시는 그가 상자한 여덟 번째 시집인 <어디서 누가 실로폰을 두드리는가>(오상출판사,1993)에 실려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면 아마도 러시아 시인들과 합동으로 시낭송회를 했던 모양이다.

 

시인은 " 바보 같은 사람들이 시를 쓴다/ 답답한 사람들이 시를 읽는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탄인가, 자부심인가. 얼핏보면 자탄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시인이라는 천직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래, 나는 아직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시를 쓰는 바보다. 실용주의가 판 치는 시대여. (실용밖에 다른 삶의 가치를 모르는 세상이) 답답한 사람들이 시를 쓰고 시를 읽는다.

 

시 낭송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불안하고 막막했던 내 청춘의 시간을 씻겨준 일종의 씻김굿이었다. 그리고 영화 <페드라>(한국명 '죽어도 좋아')에 삽입된 음악들은 내 절망을 대신 절규해준 노래였다.

 

이젠 시낭송회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데 있어 전혀 유효한 형식이 아니다. 또 지금은 시로써 깃발을 들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낡은 것이 너무 없는 시대, 진득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멸종돼 버린 시대. 그러나 시대의 한구석 어딘가에선 아직도 이따금 시낭송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린다. 나도 언제 그런 시절을 산 적이 있는가. 기억조차 까마득한 세월 너머로 사라진 젊음의 한때여.


태그:#줄스 닷신, #페드라 , #이향아 , #시낭독회, #한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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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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