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 전직 경찰이자 보도방 사장인 엄중호(김윤석)의 추격을 피해 도망가고 있다.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 전직 경찰이자 보도방 사장인 엄중호(김윤석)의 추격을 피해 도망가고 있다. ⓒ 영화사비단길



영화 <추격자>가 관객 500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개봉 31일 만에 400만을 돌파했고, 1일(개봉 47일째)까지 470만3910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영화를 본 것으로 집계됐다.

글을 보는 지금도 전국 332개 상영관에서 '절찬리 상영중'이다. 얼마 전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인 워너브라더스와 리메이크 판권 계약도 맺었다고 한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국내 관객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힘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스포일러(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 등을 미리 알려 영화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람)' 부담도 거의 없으니, 조곤조곤 따져보자.

독하지만 매력적인 두 남자

<추격자>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뚜렷한 이유도, 동기도 없이 '그냥' 사람의 목숨을 쉽게 앗아가는 연쇄살인범 얘기다. 스토리만 놓고 보면 금세 하품이 나올 법도 한데, 123분 동안 팽팽한 긴장감은 계속된다. 한 누리꾼은 이를 "패를 미리 다 보여주고도, 판을 갖고 노는 영화"라고 했다.

그 중심엔 단연 두 남자가 있다. 엄중호(김윤석)와 지영민(하정우)이 그들이다.

 영화 <추격자>에서 전직 경찰이자 보도방 업주인 엄중호(김윤석)가 곡괭이를 들고 길을 막는 경찰을 위협하고 있다.

영화 <추격자>에서 전직 경찰이자 보도방 업주인 엄중호(김윤석)가 곡괭이를 들고 길을 막는 경찰을 위협하고 있다. ⓒ 영화사비단길



전직 형사이자, 출장안마소(일명 '보도방') 사장을 연기한 배우 김윤석이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욕지거리는 귀에 착착 감긴다. 저급하지만, 연륜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대사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어색함이란 눈곱만큼도 없이, 본래부터 '중호'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미진(서영희)의 딸 은지(김유정)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안쓰러운 마음에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인간적일 수가 없다.

영화 속 하정우는 늘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걸으며, 눈에 힘을 뺀 채 어색한 '썩소'를 날린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항상 대통령 딸의 곁을 지키던 귀여운 훈남 보디가드 모습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손에 뾰족한 정(丁)과 망치를 쥐여주면, 별안간 섬뜩한 살인마로 돌변한다. 공포에 질려 손을 바들바들 떠는 '미진'에게 "가만히 있어, 잘못 맞으면 아파"라고 할 때는 치가 떨릴 정도다.

반대로 초등학생이 반성문을 쓰는 듯한 자세로 웅크려 앉아 진술서를 쓰고, 비닐째 초콜릿을 까먹을 때는 한없이 천진해 보인다. 두 남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정반대의 극과 극을 너무나 자연스레, 수시로 오간다.

사실적 소재, 기막힌 타이밍

<추격자>는 지난 2003년부터 1년여 간 연쇄적으로 21명을 살해한 '희대의 연쇄 살인마' 유영철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납치한 여성들을 망치 등으로 잔혹하게 살해한 방법도 닮아있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특히 영화가 개봉할 시점에 맞춰 '이호성 사건', '안양 초등생 살해사건'(혜진, 예슬) 등 강력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영화 홍보사 입장에서 보면,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하정우는 언론과의 접촉을 자제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심스럽게 말 못했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영화 <추격자>의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의자에 앉아 있다.

영화 <추격자>의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의자에 앉아 있다. ⓒ 영화사비단길



"솔직히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사건이 터진 거야?'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인터뷰 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서 촬영했다'고 하면, 팬들로부터 메일이 쏟아집니다. '유영철 사건의 유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 역할을 즐기다니'라고요. '정말 힘들었어요'라고 답해도 성의 없다는 반응이 나오죠."

분명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베일에 가려진 듯한 그의 행보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알리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하는 음산한 코드

영민이 사는 곳이자, 주된 범행 장소인 동네 이름은 '망원동(望遠洞)'. 한자어 '망'은 '망자'(亡者, 망할 '망'), '망인'(亡人) 등을 떠올리게 해 제법 스산한 느낌이 든다. 나홍진 감독은 "망원이라는 한자 이름에서 잊힌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 골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한자는 바랄 '망'자에 멀 '원'자를 쓴다. 실제 촬영도 서울 마포구 망원동이 아닌 성북동·북아현동·약수동에서 이뤄졌다.

영민의 휴대전화 전화번호 뒷자리인 '4885'에서도 음지(陰地)의 느낌이 강하다. 관객들은 중호의 "야, 4885 너지?"하는 대사를 최고의 명대사로 꼽았다. 그만큼 '4885'라는 숫자가 풍기는 이미지는 강렬하다. 여담이지만, 놀랍게도 이 번호는 나홍진 감독의 옛날 집 전화번호다.

미진이 잔인하게 살해된 곳인 '개미슈퍼'도 한몫 거든다. 이름도 친숙할 뿐더러, 오르막길 귀퉁이에 있는 거, 동네 사람들과 너나들이 하는 아줌마 등 작은 것들이 교묘하게 잘 맞아떨어지며 사실감을 더했다. 보는 이들에게 연출된 장소가 아닌 실제 우리가 사는 동네를 떠올리게 한다.

나 감독의 연출력도 빼놓을 수 없다. 미진을 죽일 때 망치로 피를 튀기는 장면. 음향효과. 고개를 절로 돌리게 만든다. "최고의 신인감독이다"라는 평을 들을 만하다.

다만 '사라진 여자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걸며 찾아나서는 이가 과연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매몰찬 현실이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 <추격자> 제작보고회에서 출연 배우들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김윤석, 하정우, 서영희.

영화 <추격자> 제작보고회에서 출연 배우들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김윤석, 하정우, 서영희. ⓒ 영화사비단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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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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