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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지막 일요일(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축구경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월드컵경기장 바로 옆에는 대형마트가 하나 있다. 원래 외국계업체 '까르푸'였다가 이랜드그룹에 인수되면서 '홈에버'가 된 곳. 그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 또한 그 속에 있었다. 이번 총선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2번으로 출사표를 낸 이남신 이랜드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김석준진보신당  공동대표 등 관계자들과 함께 '진보신당 비정규직 공약 발표 및 전국 이랜드화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을 하는 이남신 옆에는 그와 함께 싸워온 이랜드 노조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랜드의 비정규직 부당 대량해고에 맞서 오랜 싸움을 힘겹게 해 오고 있는 이랜드 노조는 작년 6월 말 바로 이 곳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며 싸움의 불씨를 지펴 올렸다. 그때로부터 9개월이 지나 10개월째인 지금, 이랜드 박성수 회장에게 새우깡을 먹이는 내용의 퍼포먼스가 포함된 기자회견이 끝난 후,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가 된 이남신은 당 관계자들과 둘러앉아 라면과 김밥을 먹으며 지난 한 주 동안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영호남 지역부터 제주도까지 누비며 지방순회를 했으며 주말의 수도권 유세를 마치고 나서 또 충청·대구 등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현장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어요. 제주도 가서는 4·3 항쟁 계승 노동자대회(3월 29일) 참가하고 정리해고된 여미지식물원 동지들 만나고, 재래시장 가서는 재래시장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니까 좋아하시고……. 전남 영암 삼호중공업 가니까 저 온다고 그전 날 밤늦게 바람개비를 만든 거예요. 그걸 출근길에 들고 서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함께 인사하고 금호타이어에도 들고 가고."
 
3월 말인데도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간간히 상암동 경기장으로부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골이라도 들어간 듯 함성이 절정에 달하자 누군가 탄식하듯 말했다.
 
"축구 보고 있는 저 사람들 중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들 많을 거야. 골 터지는 저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을 다 잊고 잠시나마 환호하겠지. 우리가 저렇게 해줄 수 없나?"
 
 
진보신당으로 간 이랜드노조 '파파 스머프'
 
간식을 겸한 회의를 마치고 고양 지원 유세길에 다시 나서는 이남신을 잠시 따로 만나 총선에 임한 소회를 들어 보았다.
 
- 아까 진보신당 비정규직 공약 발표 기자회견중에 노조 관계자께서 이남신 후보님을 '우리들의 파파 스머프'라고 칭하던데요.
"작년 여름에 입은 파란 티셔츠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겁니다. 노조에서 단체로 입은 거에요.”
 
- 지금 입고계신 진보신당 단체 점퍼도 파란 색이니까 여전히 '파파 스머프'로 불러도 좋겠습니다. 이번에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으셨지요?
"우리는 안해본 게 없습니다.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돌파구가 필요했고, 총선을 맞이하여 비례대표로 나서는 방식으로 우리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기로 결정했죠. 우리가 비례대표가 될 수 있는 당이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밖에 더 있겠습니까. 다른 당에서 우리를 비례대표로 해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우리를 택하지 않았고, 결국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 방침에 거스르면서까지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나섰습니다."
 
이랜드노조에서 이남신을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내세우기까지 깊은 곡절이 있었다. (이랜드노조의 홈페이지에 가면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고뇌와 논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서 제외된 후, 이랜드노조는 3월 4일 총회에서 이남신을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내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의는 민주노총의 방침에 배치되는 것이었고 이랜드 노조를 향해 노동계 안팎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노총에 소속되어 그 동안 오래 함께 투쟁해 왔으니만큼 이랜드노조 스스로도 매우 힘겨웠으리라. 그리하여 이랜드 노조는 다시 총회를 소집하여 민주노총·민주노동당·진보신당 대표자들의 의견을 듣고 조합원들의 뜻을 재확인한다.
 
닷새 후에 열린 3월 9일 총회는 조합원들의 눈물바다 그 자체였다고 한다. 이 날 진보신당을 대표하여 조합원 총회에 참석, 발언한 진보신당 마포을 지역구 후보 정경섭은 총회에 다녀온 직후 이렇게 썼다.
 
"슬픔과 한을 풍선에 담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했다가, 바늘로 툭 건드리면 아마 그렇게 터져 나올지도 모르겠다. 옆에 사람이 볼까 창피해, 흐르는 눈물을 참고 또 참다가 기어이 옆 사람 신경쓰지 않고 통곡했던 조합원들이 이제 좀 진정이 됐나 싶다. 누가 발언을 하든,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감정이 번개처럼 신속하게 전달되어 이내 눈물을 흘리곤 한다.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말해도 울고, 자신이 지지하는 발언을 들어도 눈물부터 쏟는다."
 
- 그날 다들 참 많이 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로서는 매우 절박한 결정이었으니까요.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기 시작한 것인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조합원들이 말로 다하기 어려운 많은 일을 겪었지요. 조합원들은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 역시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더 이상 말이 없다. 입을 꾹 다문다. 말 대신 이남신이 쓴 글을 읽는다. 이남신은 지난 3월 25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 앞에서 '눈물로 길을 만들어오신 사랑하는 이랜드 아줌마 동지들께'라는 제목의 편지글을 낭독했다. 
 
"이번 비례후보 출마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진통과 논란이 있었지요. 투쟁하면서 진보정당과 사회단체의 지지와 지원을 받는 것이야 익숙했지만 직접 우리가 정치 주체가 되는 것은 생소하고 난감한 경험이었으니까요. 특히 그 동안 저희 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한 동지들이 대부분 반대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참 곤혹스러운 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합원님들이 흘린 눈물과 절절한 호소는 제 가슴을 온통 흔들어놓았습니다. 그 결정보다 더 중요했던 건 그 결정이 있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었고 조합원님들의 절절한 바람이었으니까요.  
 
눈물바다가 됐던 두 번째 총회에서 제가 확인했던 건 9개월째 피눈물나는 투쟁을 이어온 주부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생계고 때문에 무너져내리는 마음 한 켠을 붙들고 박성수를 더욱 강력하게 압박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한 조합원 동지들의 냉정한 판단이었습니다. 점거농성, 매출타격투쟁, 집중집회,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불매운동·선전전·여론전·교회 앞 천막농성 등 안 해 본 투쟁이 없는 조합원들 입장에선 끝장을 내는 투쟁이 아니라면 총선 공간 비례후보 출마를 의미있는 전술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정치적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기에 알고 보면 단순한 결정이었지만 그 후폭풍이 워낙 만만찮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몇 달치 맘고생을 한꺼번에 했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가 된 시골 소년
 
그는 진보신당에 낸 자기소개서에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성향의 시골 소년이 시대의 격랑을 만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을 겪었고 사회인으로 진출한 첫 직장에서 노조에 가입하고 현재까지 이르게 됨"이라고 썼다.
 
"대학 다닐 때는 야학도 해보고 공장에 위장취업도 해 봤지만 운동의 중심은 아니었어요. 군대 다녀와서 1991년에 대학 졸업하고 이랜드에 입사했습니다. 이랜드 별명이 '일랜드'였어요. 입사 직후에 일 참 열심히 했어요. 일을 어찌나 많이 했는지 하루에 열다섯시간 이상 했어요. 박성수 회장도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었죠. 이랜드는 노조 안 될 거라고 다들 그랬어요. 그러다가 1993년에 노조가 생겨서 가입했어요.
 
가입은 했지만 적극적인 활동은 안 하고 있었는데, 1997년에 57일 파업투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조합원은 수백명이었지만 파업에 참여한 사람은 수십명에 불과했죠. 영업팀에 있으면서 재고 조사 준비하다가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게 제 삶을 바꾸었어요. 진짜 노동자로 거듭난 거죠. 그 파업 투쟁의 결과 우리 노조는 단체협약을 쟁취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노조는 결성되었어도 단체협약 하나 제대로 체결을 못 했거든요. 그 해에 노조 사무국장이 되었고, IMF 사태로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왔죠. 전체 사원 중 절반 가량 정리해고되었어요. 노조로서는 상황이 매우 어려워진 거죠. 그러다가 2000년에 265일 장기파업을 하면서 구속되었습니다."
 
- 265일 파업이라, 말만 들어도 정말 엄청납니다. 지금 하시는 투쟁도 그렇지만, 이랜드노조 참 대단하십니다. 265일 파업 때 임금도 못 받으셨지요?
"못 받아냈죠. 이랜드 사측도 그 파업 겪고 나서 단련이 되어 지금 버틴다고들 해요. 265일 파업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물류유통 쪽 계약직, 그러니까 비정규직들이랑 함께 싸웠어요."
 
2000년 6월에 시작하여 2001년 3월에 끝난 이랜드노조의 265일 파업은 지금처럼 비정규직이라는 용어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에, 정규직 노조였던 이랜드노조가 규약을 개정하여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조에 받아들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을 이루어낸 선구적인 투쟁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임금인상, 부당노동행위와 성희롱 근절, 부당전직에 대한 원직복직 등 광범위한 요구를 내건 이 투쟁은 회사의 끈질긴 노조탄압에 맞서는 민주노조 사수 투쟁이었고 수많은 다른 사업장 및 민주노총과의 연대투쟁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이랜드노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성과물을 안고 파업투쟁을 끝냈지만 노조 간부들이 구속되고 파업 기간 동안 미지급된 임금을 결국 지급받지 못 했으며 징계 철회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등 상처도 컸다.
 
비정규직 투쟁의 선봉에 선 정규직 노동자
 
2000년대 들어 이랜드그룹은 여러 건의 인수합병을 통해 사세를 확장한다. 이랜드그룹이 유통업체 까르푸와 뉴코아를 인수하자, 공동투쟁을 벌이기 위해 까르푸-뉴코아-이랜드 3사 공동투쟁본부가 출범하고, 2006년 12월 까르푸노조와 이랜드노조의 통합 결의에 따라 이랜드일반노조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남신은 이랜드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 직책을 맡아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이남신은 민주노총 서울본부 부본부장(2003), 서울지역 비정규연대회의 의장(2003), 비정규개악안 규탄 열린우리당의장실 점거농성단 부단장(2004), 비정규권리보장 입법쟁취 투쟁사업장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공투본 공동행동단장(2005) 등의 직책을 맡고 민주노총 부위원장직에 출마(2006)하는 등, 이랜드노조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정규직 투쟁과 연대투쟁의 장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게 된다.
 
작년 2007년 6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이랜드노조는 이랜드 사측의 비정규직 탄압에 맞서 파업투쟁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이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이남신은 7월 말 두 번째로 구속된 후 100일 만에 나왔으나, 올해 2008년 2월 해고된다.
 
해고된 이남신의 퇴직금과 역시 해고된 홍윤경 노조 사무국장의 퇴직금은 조합원들의 생계비 지급을 위해 쓰이고, 조합원들은 이런 돈을 받아야 하느냐고 또 울었다. 영업방해 등의 명목으로 현재 이남신을 포함하여 이랜드노조 조합원들은 회사 측의 고소고발로 인한 각종 민형사 재판에 계류되어 있다.
 
- 이제 해고노동자시네요.
"아유, 노조에 해고노동자 얼마나 많은데요."
 
-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출마하신 적 있군요.
"아이고, 말도 말아요. 그때 우리 마나님(이남신은 인터뷰 내내 부인을 '마나님'이라고 불렀다)이 얼마나 반대를 했는지…… 떨어졌지만."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의장과 건설산업노조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박대규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 시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실은 이남신 후보가 정규직이라고요. 그렇지만 비정규직 투쟁에 계속 참여해서 오래 열심히 해 왔기 때문에 비정규직 후보로 나가도 손색이 없다고 여겨서 저도 그렇고 비정규직 동지들이 후보로 추천했지요. 본인은 강하게 고사했어요. 왜 자기가 나가냐고, 비정규직 당사자들 중에서 찾아 보라고, 계속 못 하겠다고 했지요. 집에서도 강하게 반대했고. 내가 이남신 후보 집에 찾아가서 이남신이 꼭 나가야 된다고 설득하고, 나중에 부인이 그랬대요. 그게 무슨 설득이냐고, 그냥 무조건으로 밀어 붙이더라고. 전체 후보 중에서 비정규직을 대변해서 나간 사람은 이남신 하나였지만 떨어졌죠. 안 되더라고요."
 
- 이번에도 대학 졸업자이고 정규직 출신인 이남신 후보가 비정규직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지요?
"재작년 민주노총 선거에 제가 비정규직 대표해서 출마했을 때 이미 많은 부분 설득이 되고 설명이 되었다고 봐요. 이번에 비례대표로 나오기로 결정된 직후 일각에서 그런 주장이 나오긴 했지만 나서서 저를 옹호해 준 비정규직 동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견을 내놓은 동지가 최근에 저에게 전화로 개인적으로 미안하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직접 말을 전하기도 했어요. 이랜드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해 왔기 때문에 제가 정규직이지만 함께 싸우고 연대투쟁 가고 필요하면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지요."  
 
서울비정규연대회의 의장이자 애니메이션 노조위원장인 류재운은 전화로 비정규직법안 개악 저지를 위한 2004년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투쟁에 대해 들려준다.
 
"그 때 이남신 후보가 갑상선 암 수술하고 나서 얼마 안된 때라 그냥 빠져도 된다고 했는데 상황이 급박하니까 자신도 참가하겠다고 하더군요. 대신, 단식투쟁 동안에 이 후보는 약을 먹어야 하니까 밥은 먹는 걸로 결정했죠. 이남신 후보는 정규직이지만 서울비정규연대회의 사무국장을 한 사람이에요. 대졸이고 정규직인데 어떻게 비정규직을 대표할 수 있느냐고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저는 이남신이 기득권 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다면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사는 게 힘들어서, 지 코가 석 자라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로 사는 거 진짜 힘들어요. 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얼마나 다들 힘들게 사는데요.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엉켜 있어요. 어느 한 쪽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언제 정규직이 비정규직 될지 몰라요. 또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는 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정규직 된다 해서 마냥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비정규직 내부에도 이해관계가 다양하고 복잡해지고 있고요. 이주노동자들 비슷하게 되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장로들과 싸우는 집사
 
- 아까 진보신당 비정규직 공약 발표 기자회견 때 이명박 대통령도 이랜드 박성수 회장도 교회 장로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로 있는 소망교회 앞에 가서 1인 시위하셨잖아요. 그때 별 일은 없었습니까?
"네, 별 일은 없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의 중요성이 워낙 각인되어서 대놓고 뭐랄 순 없을 거에요. 왜 그러냐고 혀를 끌끌 차는 분들이 계시기는 했지만." 
 
- 교회 집사님이라면서요? 이랜드 다니다 신자 되신 겁니까(웃음)?
"아유, 회사랑은 상관 없고, 마나님이랑 장모님이 독실한 신자라서 도저히 등쌀에 교회에 같이 안 나갈 수가 없었어요. 가서는 꾸벅꾸벅 졸고(웃음). 다닌 지 오래 되니까 집사 하라고 하대요. 집사까지 되었어도 누가 '하나님 믿느냐' 물으면 자신 없어요. 교회는 다녀도 무신론자에 가까워요. "
 
- 마나님이랑 장모님이 이 인터뷰 보시면 일 나겠습니다(웃음).
"나는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 갈 데도 없어요(웃음). 구속되어 구치소 오래 있으면서 성경을 많이 읽었어요. 성경이든 불경이든 고전은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가장 힘들 때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정치적으로는 생각이 꽉 막힌 성직자라 해도 근본적으로 삶을 밑바닥부터 돌아보게 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땐 놀라워요."
 
- 자기소개서 보니까 마나님과는 이랜드 사내커플로 만나셨다고요.
"마나님이 이랜드 입사 선배예요. 비서실은 아니지만 박성수 회장과 지근거리에서 얼굴 보는 부서에서 일했었지요. 제가 계속 노조활동하니까 회사 계속 있기 그래서 이랜드 그만 뒀고 지금은 다른 데서 일해요. 동성동본인데 결혼할 때 처가는 괜찮은데 우리 집안 반대가 심했어요. 그 때 그 사람 베갯머리 적시면서 많이 울었지요. 지금은 안 계신 우리 아버지가 그 때 식도암 말기셨어요. 아버지는 계속 반대하다가 그래도 아들 장가 가는 꼴이라도 보고 가자 싶으셨는지 결국 포기하셨지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식사하시면서 초등학교 6학년 아들 이야기 하셨잖아요. "노조 사람들 맘 좋은 사람들"이라고 일기장에 적었더라고.
"하하. 그렇게 썼더라고요. 어린 지가 보기에 그래 보였나 보지 뭐. 지 엄마랑 싸움 현장에도 와 보고 했어요. 근데 애가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노래 따라 부르고 하니까 애 엄마가 질색을 하대요(웃음). 가사가 살벌하잖아요." 
 
어깨 죽지에 빛나는 상처 지켜낸 파업 투쟁
막걸리 잔 치켜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가진 자들의 더러운 이빨 금빛으로 번쩍이며
온 세상을 휘휘 감아 피눈물을 달라 하네
아~ 동지여 적들은 무노동 무임금의 억지를 부려
아~ 동지여 적들은 파업의 나팔소리 멈추라 한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
무노동 무임금 노동자탄압 총파업으로 맞서리라
-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이랜드, 4월 9일 투표일에 회사 수련회 

 

- 아버지가 이번에 총선 출마한 건 알아요?
"비례대표라는 말도 정확히 몰라서 자기 친구한테 그러는 거예요. 우리 아빠 '국회의원 비유대표' 나간다고. 그 말 듣고 옆에 있던 친구가 물어요. 그거 되면 뭐가 좋으냐고. 그러니까 제 아들이 그래요. 잘은 모르지만 그거 되고 나면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파업 투쟁 하느라 제가 집에 제대로 못 들어왔으니까요. 구속된 것도 몰랐어요. 그냥 파업 땜에 안 들어왔나 보다 그리 알죠. 우리 어머니가 제일 열심이세요. 텔레비전으로 진보신당 뉴스 보시고 나서 태도가 확 달라지셨어요. 다들 우리 어머니처럼만 하면 당 지지율이 10%대로 올라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웃음)."
 
- 비례대표 후보 되고 나서 이랜드 사측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뭐 특별히 공식적인 반응은 없어요. 그런데 4월 9일 투표 당일에 회사 수련회를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투표를 방해하려는 의도인지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 수련회 일정을 잡아 놓았대요."
 
- 아니, 투표일에 수련회라니, 정말 이상하군요. 이런 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주변의 기대 무엇보다도 노조의 염원을 안고 출마하셨으니 어깨가 무거우시겠습니다.
"조합원들은 지도부를 믿고 결정한 거니까 결국 다 지도부 책임입니다. 믿지 않으면 이런 결정을 할 수 없는 거거든요. 저 역시 조합원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평등·생태·평화·연대라는 가치를 내걸고 있는 진보신당이 우리에게 비례대표 2번을 준 것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신당이 비정규직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진정으로 대변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는 당이 되어야 합니다. 남아서 말라죽을 것인가 나와서 얼어죽을 것인가, 창당대회 때 김석준 대표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지만 얼어죽을 마음으로 나온 겁니다."
 
진보신당에 낸 자기소개서에 이남신은 자신의 장점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다.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간다"라고, 단점은 "정에 약하고 모두를 만족시키려 한다"라고 썼다. 또한 자신의 꿈은 "어린 시절엔 선생님, 지금은 정년퇴직 노동자"라고 썼다. 이런 그에게 매우 부질 없고 어리석은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 노조 활동을 안 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런 생각은 안해 봤는데요. 노조 한 것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노조를 통해 만난 사람들만큼 인간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복직하면서도 눈물 흘리며 절대 노조 탈퇴 안 하겠다는 조합원, 남은 조합원과 지도부 걱정하는 조합원들 보면서 이렇게 싸워서 이기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이번 파업투쟁을 통해 제 삶과 노조활동을 다시 돌아 보았습니다. 노동자로서 사람으로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다시 배웠습니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 길이 되기 위해, 우리 다 같이 싸우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공숙영 기자는 인터뷰전문웹진 퍼슨웹(www.personweb.com)의 편집장을 지냈고 현재 대학원에서 '국제법과 인권'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남신, #진보신당, #이랜드노조,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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