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누지앙에서 따리(大理)로 돌아오는 길, 창산이 하얗다. 앞으로는 얼하이(洱海), 뒤로는 창산(蒼山) 사이에 형성된 따리 고성은 언제나 푸근한 곳이다. 백족의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골목길을 걸어가고, 창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겨울에도 상쾌하다. 오래 된 집들이 처마를 마주 대고 늘어서 있고, 부겐베리아가 담 너머에서 기웃거리며 피어있다.

 

어둑어둑해지는 초저녁이면 양런지에(洋人街)에 늘어선 포장마차로 가 꼬치구이에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느긋함이 온 몸에 스멀스멀 돋아난다. 느릿느릿 성을 한 바퀴 돌아보거나, 골목을 따라 끝없이 걸어가다 눈부시게 새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것도, 아니면 성문 밖으로 나가 얼하이까지 걸어보는 것도 따리에서는 일상적 즐거움이 된다.

 

 

세 번째 찾은 따리는 그러나 나의 그런 옛 기억들을 다 헤집어버린다. 골목길은 넓어지고, 포장마차는 사라져버렸다. 성 밖을 한 바퀴 돌던 나귀 마차는 찾을 수도 없고, 곳곳이 공사 중이다.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옛 모습을 찾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같은 여행지를 두 번 찾는 것은 기억 때문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의 그리운 기억이 두 번째 발길을 불러오는 것이리라. 그러나 기억 속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기억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그리고 여행자는 그 기억이 사라져버린 아득함을 맛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계속 눈이 왔어요. 창산이 지금 가장 아름답습니다.”

 

샤관(下關)에서 탄 택시 기사는 내게 그런 말로 따리를 자랑한다. 그의 말대로 창산 위로 백설이 눈부시다. 아무리 뜯고 부수고 해도 자연은 여전히 어느 한 구석에 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인간을 맞아주는 법이다. 얼하이와 창산이 바로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창산에 눈 내리고 얼하이 물살 거센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따리 삼탑을 찾는다. 따리 고성에서 약 1.5km 떨어진 숭성사(崇聖寺)에 있는 삼탑은 따리 시내 어디에서든 보일 만큼 높고 웅장해서 따리의 상징이라고 부른다. 당나라 건축의 전형적 양식을 보여주는 탑이다.

 

모두 세 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어 삼탑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탑의 이름이 천심탑(千尋塔)이다. 높이 70m, 16층의 사각형 탑이다. 주변으로 두 개의 탑이 더 있는데, 주변 탑은 높이 40m에 10층이다. 중심 탑인 천심탑은 시안(西安)의 대안탑, 소안탑과 함께 당나라 최고의 탑으로 손꼽힌다.

 

 

창산을 배경으로 얼하이를 바라보며 서 있는 삼탑의 아름다움을 하도 들어, 세 번째 방문 만에 한 번 찾아가보기로 한다. 그러나 입구에서 그만 발길을 멈추고 만다. 입장료가 무려 121위안이다. 절과 삼탑, 삼탑도영공원(三塔倒影公園)을 보는 값이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마어마하다. 도저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겨우 탑 하나 보자고 거금을 내기가 아까워 발길을 돌리다 주차장 쪽으로 가니, 거기서 삼탑이 한 눈에 보인다.

 

배경으로 창산의 눈도 제대로다. 미명의 아침, 창산의 눈부신 백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삼탑은 신성하기까지 하다. 환상이란 이렇게 어느 한 순간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환상은 현실이 되는 법이이다. 나는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하며 눈 쌓인 창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삼탑을 바라보다 돌아선다.

 

얼하이에 있는 샤오푸토우샤(小普陀寺)를 찾기 위해서다. 샤관을 지나 얼하이를 왼쪽 허리께에 매달고 한참을 달린다. 길은 포장과 비포장이 반복된다. 구불구불한 호수 연안의 길은 군데군데 마을을 지나고, 언덕에서 물가로 이어진다. 길이 얼하이 가까이로 나 있는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차가 물 속으로 곤두박질칠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그날따라 물살이 거센 것이었을까? 얼하이의 물이 곳곳에서 길로 넘쳐난다. 파도가 치는 호수라니! 바다의 파도보다 호수의 파도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호수에 바다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들의 마음이 헤아려 질 정도로 아득하게 넓고 물살이 거세다.

 

 

남북의 길이 41.5km, 동서의 폭은 약 3-9km, 면적이 총 251km2나 된다니, 그 규모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호수다. 옛 문헌에는 “협유택(叶楡澤)”, “곤미천(昆彌川)”, “서이하(西洱河)” 등으로 기록되었다는 얼하이는 수면의 해발이 약 1972미터인 고산 호수다.

 

그 얼하이를 홍보하는 온갖 사진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샤오푸토우샤의 풍경이다. 호수 위에 달랑 절 한 채 떠 있는 모습은 신비하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 사진의 한 장면을 찾아 이렇게 어마어마한 호수를 끼고 물살을 헤치며 달려야 하다니! 햇살은 더없이 따스한데, 바람이 거세다. 창산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물살을 일으켜 나그네의 발길을 더디게 하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는 길을 헤치고, 군데군데 낙석도 피해가며 마침내 샤오푸토우샤에 도착한다. 호숫가 작은 마을이다. 몇 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포구 마을에 절이 있다. 그런데 절은 마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수 속에 있다. 바람은 거세게 불어 몸이 금방이라도 날려갈 것 같은데, 호수에 떠 있는 절에는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다. 배를 타고 건너야 할 것 같은데, 물살이 워낙 거세 배를 건네주는 사람도 없고, 묶어놓은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마구 흔들거린다.

 

그저 호숫가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절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다. 물 속에 손바닥만큼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달랑 절 한 채 올려놓았다. 그러니 절 한 채가 온전히 하나의 섬인 셈이다. 마치 절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나오는 주산지의 절과 흡사하다.

 

보려고 했던 샤오푸토우샤는 그냥 바라만보고, 마을 안쪽에 있는 도교 사원 구경을 한다. 향내가 절 전체에 진동하고, 분위기가 낯설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관리인인지 아니면 도교 승려인지 한 아주머니가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외부인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인 것 같아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만 하고 나온다. 사원의 벽에 물 위의 절 샤오푸토우샤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그 그림조차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다.

 

웨이산(蘶山)에서 남조의 흔적을 엿보다

 

웨이산은 차마고도의 옛 도시다. 윈난 남쪽에서 출발한 마방들 중 누지앙이 아닌 중띠엔 방향으로 길을 잡은 무리들은 웨이산을 거쳐 따리, 리지앙으로 향해야 했다. 따리에서 겨우 60여 km 떨어진 곳이지만, 외국인들은 잘 찾지 않는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편의 시설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곳을 굳이 찾은 이유는 덜 상업화되면 그만큼 옛 자취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짐작해서다.

 

 

샤관에서 빠오산 가는 고속도로를 발 아래로 내려다보며 숨차게 산을 오르는 길이 웨이산 가는 길이다. 겨우 차 두 대가 비켜 설 정도의 길이지만, 누지앙 험한 길에 대면 고속도로다. 그러나 차마고도의 번성했던 옛 도시 웨이산으로 가는 길 치고는 좁고 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도 산 하나를 넘어서면 공사 중이라 비포장이다.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덜컹거리며 힘겹게 차는 웨이산으로 향한다.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어 제법 미끄럽다. 차는 좀체 속도를 내지 못한다. 그러다 짐 가득 실은 트럭을 만나면 그 뒤를 졸졸 따라간다. 겨우 추월할 수 있을 만한 곳까지는 어떤 방법도 없다. 트럭은 따리에서 웨이산까지 몇 달이나 걸릴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러나 눈 쌓인 산을 넘어서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은 하늘이 펼쳐진다. 푸릇푸릇한 들판이 보이고, 군데군데 샛노란 유채꽃이 한창이다. 겨울 속에서 갑자기 봄으로 계절이 몸을 바꾼 것 같다. 눈 가는 한참 유채꽃 밭이 노랗게 펼쳐지고, 유채꽃 밭 너머는 큰 산이 팔을 벌리고 있다. 그 산 위에는 백설이 제 몸을 빛내고, 그리고 백설의 산 위로는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이다. 뭉게구름이 시린 눈을 달래는 듯 몇 점 떠 있다. 날씨는 더없이 따스하다. 햇살에 끄덕끄덕 졸음이 밀려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분지는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고, 그 들판에는 푸른 봄채소들이 지천이다. 논도 아득하게 넓다. 이 들판에서 생산되는 곡식으로 웨이산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다. 차마고도의 마방들이 먼 길을 걸어와 웨이산에서 한 숨 고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고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웨이산 고성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탈 것들을 타고 나와 장을 보러 간다. 말을 탄 사람, 말 수레를 탄 일가족, 거기에 오토바이 택시까지 한몫 한다. 주로 말 수레다. 수염을 허옇게 기른 할아버지가 말 수레를 몰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린다. 짐을 가득 실은 말을 끌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풍경이 오래 전 시간 속에서 흘러나온 것 같다.

 

 

 

사람들도 모두 깨끗하다, 옷차림도 생김새도 수수하면서 품위 있어 보인다. 웨이산은 이족(彛族)과 후이족(回族)의 자치주다. 긴 수염에 큰 키, 깔끔한 사람들이 바로 후이족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웨이산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온 사람처럼 꼿꼿하다. 그러나 그 꼿꼿함은 건방짐이 아니라 자부심처럼 보인다.

 

실제 웨이산의 주인은 이족이었다. 이곳이 바로 남조국(南詔國)의 발상지였으니 말이다. 수(隋)나라 때 지금의 운남 지역에는 여러 소수 민족들이 각각의 작은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그 무렵 가장 강대한 세력이 백만(白蠻)과 오만(烏蠻)이었다. 백만은 지금의 백족, 오만은 지금의 이족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오만은 목축 생활을 하는 부족이었는데, 생활이 백만에 비해 낙후된 처지였다. 7세기 초에서 중엽, 오만이 백만을 정벌하여 6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오만에서는 왕을 조(詔)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여섯 나라를 6조국(六詔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조는 그 여섯 나라 중에서 가장 남쪽인 웨이산에 자리를 잡고 있어 남조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남조국의 왕은 몽사조(蒙舍詔)였다.

 

7세기 경 토번(吐蕃:티베트)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금의 얼하이 부근까지 공격을 해 왔는데, 이때 남조국은 가장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당시 당나라 조정은 티베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비교적 온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남조국에 온갖 지원을 해 주게 된다.

 

738년 남조국의 왕인 피라각(皮邏閣)이 다른 다섯 나라를 정복하고 강대한 통일 국가를 세운다. 이 나라가 바로 사천, 귀주, 운남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일부까지 지배했던 통일 남조국이다. 이후 남조는 수도를 웨이산에서 따리로 옮기고 지금의 운남의 약 2.5배에 달하는 방대한 지역의 지배자로 자리 잡는다. 티베트와 당나라 사이에서 때로는 당의 편에, 때로는 티베트의 편에 서면서 지배력을 유지해가던 남조국은 902년 정매사(鄭買嗣)의 반란으로 멸망하고, 그 뒤 백족의 대리국(大理國)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대리국 역시 1253년 원나라 쿠빌라이칸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만다.

 

일설에 의하면 쿠빌라이칸의 군대는 따리의 북쪽 리지앙(麗江)에서 내려오다 진사강(金沙江)의 거센 물살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시족의 한 사람이 양 가죽에 바람을 불어넣어 강을 건너면 된다고 가르쳐주어 강을 건너 대리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백족과 나시족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한때는 방대한 지역의 지배자였던 남조국, 그 나라의 발상지인 웨이산은 그러나 옛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봄 햇살에 나와 조는 노인네처럼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다. 옛 도시마다 물밀듯 밀려오는 상업화의 바람도 웨이산까지는 아직 밀어닥치지 않은 것 같다.

 

웨이산 고성은 남조국의 발상지였기 때문에 몽사성(蒙舍城)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웨이산 고성은 명(明)나라 홍무제 때(1389년) 건립된 것이다. 고성의 전체는 네모난 도장 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장 중심에 있는 문모루(文芼樓)가 도장의 자루에 해당된다. 비록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원래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명나라 때라고 해도 지금부터 600여 년 전이니, 그 세월의 흔적 역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웨이산 고성은 상업적 치장이 하나도 없는 곳이다. 외국인 관광객도 찾아보기 힘들고, 타지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업적 시설도 없다. 그저 웨이산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의 필요에 의해 가게를 열고 물건을 사러 오가는 곳이다. 그러니 관광지라기보다는 생활의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웨이산 고성을 둘러보는 일은 시간을 거슬러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이끼 낀 처마에는 잡풀이 자라고, 국수 가락이 바람에 제 몸을 말리는 풍경도 그곳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주머니가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재봉틀을 돌린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끓고 있는 솥에서 국물을 퍼 담는다. 엄마 따라 장에 나온 소녀는 국수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입가에 함박웃음을 베어 문다.

 

색색의 실 방석이 눈길을 끄는데, 우리네 수수부꾸미를 부쳐내듯 고운 얼굴의 아주머니가 맨 손으로 뜨거운 불판에 밀가루를 꾹꾹 눌러댄다. 벽이 다 떨어진 허름한 가게 안에서는 웨이산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서로 맞닿은 지붕 너머로 파란 하늘이 눈부시고, 성 밖 아득하게 설산이 파란 하늘 위에 모자처럼 얹혀 있다.

 

그저 골목골목을 바람처럼 스치듯 돌아다니면 마음이 저절로 푸근해 지는 웨이산 고성은 역사의 땅이라기보다 우리가 스치듯 지나왔던 과거의 땅이다.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도랑물보다도 작은 물길이 흐르는 수로가 있고, 꽃나무 몇 그루 심어놓은 마당에 햇살이 자락자락 내려앉는다. 거기에는 햇살에 제 몸 바래가는 세월이 시간 속에서 느릿느릿 부서지고 있다.

 

 

어디 세월이 부서지는 곳이 골목 속 마당뿐이랴. 길 가에 나와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겨우 옷 몇 벌 걸어놓고 ‘무지개 치마, 깃털 저고리(霓裳羽衣)’라는 멋진 간판을 단 옷가게에도, 아무 일 없이 옛 집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어깨에도 세월은 낡은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다.

 

웨이산현의 보호 문화재인 ‘유가택원(劉家宅院)’도 세월에 하얗게 바래 가기는 마찬가지다. 한때는 지역 유지의 번듯한 집이었고, 차마고도를 지나던 마방들이 고단한 걸음을 쉬어가던 안식처였다는 ‘유가택원’이지만, 그곳의 첫 느낌은 ‘낡음’이다. 청(淸)나라 말기에 지었다는 이 집에도 나른한 봄 햇살은 어김없이 내려앉아 있다. 먼지 쌓인 창틀에도, 마당가에 놓아둔, 오래 전 누군가가 타고 시집왔을 가마에도, 한때는 협상의 술잔이 오가고 언성이 높았을 응접실의 탁자와 의자에도 세월은 칭칭 감겨 있다.

 

 

그래서 웨이산 고성은 어디나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잊혀진 과거의 어느 시간의 갈피로 들어가 추억의 책장을 야금야금 넘기는 것 같은 아련한 즐거움이 그곳에는 있다.

 

작지만 깔끔한 식당에 들어가 웨이산 특미인 얼쓰(饵絲) 국수를 먹는다. 삶은 국수와 쇠고기 볶은 것이 고명으로 나온다.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이 요리에도 아득한 세월의 냄새가 배어 있다. 오랜 시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햇살과 비와 바람에 온 몸을 씻긴 마방들이 풍요의 땅 웨이산에 이르러 이 국수 한 그릇으로 피로를 풀었으리라. 곁들여 한 잔의 술로 시름도 달랬으리라. 

 

 

웨이산 고성을 나서며 나는 다시 한 번 성 안을 돌아본다. 거기 숱한 세월을 햇살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시공을 초월한 영화속의 인물들처럼 오고가고 있다. 그들은 어디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같다.

 

그리고 도장의 자루 형상에 해당된다는 문모루에는 “괴웅육조(魁雄六詔)”, “만리첨천(万里瞻天)”이라는 현판 글씨가 우뚝하다. ‘육조의 우두머리’, ‘만리 하늘을 바라보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육조를 통합해 방대한 땅을 다스린 남조의 자부심을 말한 것이었을까? 그러내 내게는 그 현판들의 지나친 자부심이 오히려 웨이산 고성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웨이산 사람들과는 왠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웨이산이 마음을 끄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 때문이고, 고성에 내려앉는 마음씨 고운 햇살 때문이고, 그리고 산과 들과 하늘이 어울려 빚어내는 느긋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성 안 곳곳에 차마고도라는 깃발을 꽂아놓고, 리지앙이나 따리의 관광 정책을 따라가려는 웨이산현의 상업화 정책이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웨이산이 바로 시간 속의 보물 같은 존재여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웨이산, #중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