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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대만 총통선거에서 마잉주 국민당 후보가 승리, 국민당이 마침내 8년만의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대만 공영 CTV방송의 자체집계 결과 유효득표의 87.7%가 개표된 오후 7시35분 현재(현지시간) 마 후보가 756만여표를 확보, 58.5%의 득표율로 셰창팅 민진당 후보를 17% 포인트 차이로 앞서나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마잉주 후보의 선거 유세시 모습.
 3.22 대만 총통선거에서 마잉주 국민당 후보가 승리, 국민당이 마침내 8년만의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대만 공영 CTV방송의 자체집계 결과 유효득표의 87.7%가 개표된 오후 7시35분 현재(현지시간) 마 후보가 756만여표를 확보, 58.5%의 득표율로 셰창팅 민진당 후보를 17% 포인트 차이로 앞서나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마잉주 후보의 선거 유세시 모습.
ⓒ 연합뉴스 정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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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상의 독립보다 빈 살림살이를 채워줄 경제회생의 적격자를 택했다.'

22일 실시된 대만 제12대 총통선거에서 마잉주 국민당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최종 집계 결과 마 후보는 765만8224표를 얻어 58.4%의 득표율로, 544만5239표(41.6%)를 얻은 셰창팅 민주진보당 후보를 221만 표차(16.8%)로 눌렀다.

마 당선인은 개표 초반부터 민진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남부의 일부 현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 큰 표차로 앞서갔다. 선거 막판 티베트 독립시위와 잇단 구설수에 오른 마 당선인의 발언에 한때 지지율 격차가 10%로 줄어든 것으로 관측됐지만, 결과는 마 당선인의 일방적인 압승이었다. 대선 투표율은 76.3%로 최종 집계됐다.

와신상담 국민당, 8년 만에 정권 되찾은 가닭

10만여 명의 마잉주 당선인 지지자들은 현재 국민당 선거본부로 몰려와 노래를 부르고 축포를 쏘며 승리를 자축했다. 국민당은 1949년부터 반세기 동안 대만을 통치해오다, 2000년 민진당 천수이볜 총통에게 패했다. 와신상담 끝에 8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것이다.

1980~90년대 민주화를 주도하며 대만 독립에 매진하던 민진당은 1월 7대 입법위원 선거에 이어 대패하면서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국민당에 내주었다. 민진당은 천 총통이 2000년 선거에서 39.3%의 득표로 제10대 총통에 당선, 국민당 독주시대를 마감하고 첫 정권교체에 성공했었다.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타이베이 시장을 지내면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던 천 총통은 갖은 역경을 이겨낸 입지전적 정치인. 천 총통은 2000년 국민당 출신의 두 후보가 난립한 상태에서 서민층과 남부 지역민의 지지를 얻어 총통에 당선되었다.

재임 초기 서민 출신 민주화 지도자로 큰 인기를 얻었던 천 총통은 2004년 제11대 선거에서는 단 3만여 표(0.228%)의 표차로 롄잔 국민당 후보를 물리쳤다. 연임에 성공한 뒤 한동안 승승장구하던 천 총통은 경제가 침체되고 끊임없는 정쟁을 일으키며 지지율이 하락했다. 재작년부터 불거진 천 총통 가족과 측근의 각종 비리의혹은 천 총통 뿐만 아니라 민진당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셩즈런 대만 둥우대학 교수는 "역대 선거와 달리 남부 타이난·가오슝까지 셰 후보의 득표가 마 후보보다 뒤졌다"면서 "대만의 정치지도를 완전히 바꾼 국민당의 압승"이라고 말했다. 셩 교수는 "천 총통 일가의 부패 추문 영향이 너무도 컸다”면서 이번 선거가 천 총통과 민진당 정권에 대한 응징이라고 규정했다.

유명 아나운서 출신 정치평론가 저우위커우는 "티베트 사태, 잇단 마 당선인의 말실수, 리덩후이 전 총통의 셰 후보 지지 등도 대만의 민심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저우는 "투표 막판 부동표가 늘어나는 듯 했지만 중년층 이상 유권자는 이미 투표 2일 전 지지 후보를 정한 상태였다"고 분석했다.

제12대 대만 총통에 당선된 마잉주 국민당 총통 후보(오른쪽)와 샤오완창(蕭萬長) 부총통 후보. 국민당은 8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제12대 대만 총통에 당선된 마잉주 국민당 총통 후보(오른쪽)와 샤오완창(蕭萬長) 부총통 후보. 국민당은 8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 대만신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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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총통선거 지지율 추이(단위: %).
 대만 총통선거 지지율 추이(단위: %).
ⓒ KO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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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총통과 현 총통 집권기 대만 경제성장률 추이.
 역대 총통과 현 총통 집권기 대만 경제성장률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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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경제 침체와 반 천수이볜 분위기로 손쉽게 정권 잡아

이번 대만 대선은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대 중국 양안정책에 대한 확연한 입장 차이로 국민당과 민진당 간의 접전이 예상됐다. 작년 양당 총통 후보가 확정된 뒤 마잉주와 셰창팅 간의 지지율 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마 당선인이 대승한 데에는 갈수록 침체되는 대만 경제에서 가장 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때 대만은 아시아 네 마리 용의 하나로, 경제규모가 한국과 어깨를 맞댈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1978~88년 장징궈 전 총통 집권기 대만의 연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8.7%로, 아시아 4용 중 1위였다(홍콩 8.3%, 한국 7.3%, 싱가포르 6.9%). 리덩후이 전 총통 집권기에도 싱가포르(8.1%)에 1위를 내주었지만 2위 성장률로 위세를 자랑했다.

천수이볜 총통 집권 후 연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4.1%로 급락하면서 한국·홍콩·싱가포르의 평균 성장률 5.7~5.2%에도 현저히 못 미쳤다. 2001년에는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2.2%)을 기록하기도 했다. 잘 나가던 대외무역도 1980년대는 세계 11대 수출대국으로 아시아 4용 중 1위를 차지했으나, 2006년 현재 세계 16위로 4용 중 꼴찌로 떨어졌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더욱 심각하다. 대만은 한국보다 2년 빠른 1993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했다. 대만은 한국과 달리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지만, 작년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돌파한 한국보다 뒤진 1만6790달러에 불과하다. 민진당 집권 8년 동안 경제성장률이 12%에 그쳐 한국에 크게 뒤지고 있다.

천수이볜 총통의 독선적인 정치력과 급진적인 독립노선도 대만 유권자의 염증을 불러일으켰다. 천 총통은 재임 기간 모두 6차례나 내각을 바꾸었고 국무총리 격인 행정원장도 5명을 갈아치웠다. 직설적인 천 총통의 발언은 때로 도를 넘어 거친 언사로 나타났고, 국민들에게 '통합은 이루지 못하고 정쟁만 일삼는 총통'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천 총통은 일관된 독립노선을 주창하며 현상 유지를 바라는 대만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대만은 작년 국시인 '국가통일강령'의 운영을 중단했고, 대만 명의의 유엔가입 국민투표를 추진하여 중국과 첨예한 갈등을 빚어왔다. 천 총통 집권 8년간 양안관계는 정체상태에 빠져있다.

연임 성공 후 잇달아 터진 천 총통 주변의 부정비리는 대만 국민으로 하여금 민진당에 등을 돌리게 했다. 타이베이-가오슝 고속철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천저난 당시 총통부 비서장이 뇌물 수뢰 혐의로 물러났고, 2006년에는 천 총통 사위인 자오젠밍이 대만 토지개발공사와의 주식 내부거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뒤이어 부인 우수전 여사가 뇌물수수와 불법 주식운용 혐의를 받으면서 천 총통은 대대적인 탄핵 위기까지 내몰렸다. '인권' '청렴' '민주화' 등으로 상징됐던 천 총통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고 민진당의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다. 천 총통 가족과 측근의 각종 비리의혹이 꼬리를 물면서, 민진당은 '천 총통 심판론'에 시달리다 정권을 다시 국민당에 내주게 됐다.

마잉주 당선자는 수려한 외모로 여성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번 선거에서도 유세장마다 구름과 같은 여성 지지들을 몰고 다녔다.
 마잉주 당선자는 수려한 외모로 여성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번 선거에서도 유세장마다 구름과 같은 여성 지지들을 몰고 다녔다.
ⓒ 대만신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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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공자풍의 준수한 외모를 지닌 정치 엘리트 마잉주

국민당이 과거 철권통치와 금권정치에 따른 부정부패의 이미지를 벗고 정권을 되찾은 데에는 마잉주 당선인의 공이 크다. 1950년 홍콩에서 태어난 마 당선인은 명문가 출신으로, 귀공자풍의 준수한 외모를 지닌 대만 정치계의 엘리트다.

마 당선인은 대만 최고 명문인 젠궈고교와 대만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하여 뉴욕대학에서 석사학위, 하버드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땄다. 영어를 모국어와 같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고 미국 정계에도 넒은 인맥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친미파로 꼽힌다.

1981년 대만으로 돌아온 뒤 맡은 직책도 총통부 제1국 부국장으로, 뛰어난 영어 실력 덕택에 장징궈 전 총통의 영어통역과 비서로 활동했다. 1984년 국민당 부비서장으로 정계에 입성한 마 당선인은 대륙위원회와 국가통일위원회 주요 요직을 거쳤고, 1993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법무부장으로 발탁됐다.

법무부장 재직시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고 소신있는 정책을 추진했던 마 당선인은 곧 여론의 큰 주목을 받았으나, 1년여 만에 사퇴하고 대만 정치대학 법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81㎝의 큰 키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그를 보기 위해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강의를 들어 장안의 화제가 됐다.

1998년 마 당선인은 타이베이 시장선거에 출마, 연임을 노리던 당시 천수이볜 시장을 5% 득표차로 누르며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2002년에는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64.1%의 표를 얻어 시장 연임에 성공했다.

정통 엘리트 코스를 거친 마 당선인은 젊은층과 여성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더욱 승승장구했다. 2005년 7월 롄잔 명예주석을 이어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됐고, 2006년에 치러진 지방선거도 대승하면서 되면서 대만 정계의 정점에 섰다.

마 당선인에게도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천 총통 주변의 부정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거센 탄핵 정국이 이어졌지만, 마 당선인은 모호한 태도를 보여주면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타이베이 시장 재임기 판공비를 유용했다는 혐의로 기소되면서 부패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작년 2월 별다른 경쟁 없이 국민당 경선을 통과한 마 당선인은 한동안 지지율이 정체됐지만, 1·2심 법원 판결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 이미지를 회복했다.

지난 2월 대만 <연합보> 민의조사에 따르면, 마 당선인은 전체 유권자 중 55%로부터 호감을 얻었다.(비호감 15%, 의견 없음 26%) '성실하고 정직하다'(28%) '청렴하다'(15%)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10%)는 호평을 받았지만, '박력이 부족하다'(27%) '언행이 불일치하다'(23%) '일구이언을 한다'(10%)는 지적을 받았다.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 인적사항.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 인적사항.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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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이는 한 대만 자동차부품회사의 노동자들. 한때 한국보다 더 컸던 경제 및 무역 규모, 국민소득은 오늘날 한국에 역전 당했다.
 정리해고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이는 한 대만 자동차부품회사의 노동자들. 한때 한국보다 더 컸던 경제 및 무역 규모, 국민소득은 오늘날 한국에 역전 당했다.
ⓒ 대만신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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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관계 개선과 6·3·3 목표로 대만 경제를 재생시킨다"

가오슝 공무원인 린청둬(31)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악화일로를 걷는 경제 상황이 이번 대선에서 성난 민심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가오슝은 대륙 출신이 많은 타이베이와 달리 주민 대다수가 대만 출신이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시는 국민당 바람 속에서 민진당 출신이 당선됐다.

민진당 후보로 나선 셰창팅은 과거 8년간 가오슝 시장을 재임한 바 있다. 셰 후보는 아이허 복원 사업, 고속철도 건설 등을 성공시키고 수많은 정부 행사를 유치하여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난바톈(남쪽 하늘을 점령했다)'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린은 "역대 대만 선거는 북부가 국민당, 남부가 민진당이거나 이전 선거는 민진당, 다음 선거는 국민당이라는 식으로 지역 균형과 권력 견제의 룰이 반영됐다"면서 "서민의 대변자라고 여겼던 천 총통이 부패 스캔들에 휩싸인 데다 경제까지 망쳐 가오슝(51.6-48.4)·타이난(50.7~49.3)까지 마잉주에게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저우위커우는 "이번 선거는 마잉주의 승리라기보다는 천수이볜과 민진당의 패배"라고 지적했다. 저우는 "셰창팅은 우수한 행정능력을 보여줬고 마잉주보다 민첩한 국정대처능력을 지녔다"면서 "각종 비리의혹에 시달린 천 총통의 반면교사 효과는 셰 후보가 아무리 노력해도 떠나간 민심을 돌이키긴 힘들었다"고 말했다.

마잉주의 당선은 대만 정국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민진당의 실정에 지적하는 네거티브 공세 뿐만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층의 호감을 사는 경제회생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마 당선인이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을 본떠 내세운 6·3·3 경제재생목표(경제성장률 6%, 국민소득 3만 달러, 실업률 3% 이하 달성)는 대만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데 성공했다. 유세 기간에는 '양안 공동시장' 공약을 내걸어 중국과의 전면적인 경제협력의 실현방안을 제시했다.

작년 대만과 중국의 무역교역 규모는 1245억 달러, 2006년 교류인원은 462만 명에 달한다. 중국에 거주하는 대만인은 100만 명을 웃돌고 있지만, 아직 양안 간에는 상시 직항로조차 개설돼 있지 않다. 독립노선을 추구한 천 총통과 민진당이 중국의 영향력 증가를 우려해 반대해 왔던 것. 민진당이 발의한 대만 명의의 유엔가입 국민투표는 35.8%의 투표율로 과반에 못 미쳐 자동부결됐다.

중국과 더욱 밀접한 협력확대를 원하는 중국 거주 대만인 중 25만 명이 이번 대선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전체 재중 대만인의 25%에 이르는 숫자다. 홍치창(洪奇昌) 대만 해협교류기금회 회장은 "정권이 바뀌었지만 대만 국민의 8할은 현상 유지를 원하다"면서 "차기 국민당 정부도 점진적이고 현실적인 양안 경제협력정책으로 대 중국 관계를 개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 주요 공약 내용.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 주요 공약 내용.
ⓒ 마잉주 후보 사무실, KOTRA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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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만, #마잉주, #국민당, #민진당, #대만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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