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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 간이이발소를 차리고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들 욕실에 간이이발소를 차리고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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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발 솜씨

시골집 마당가에서 젊은 아버지는 항상 내 머리를 손수 깎아 주셨다. 보자기를 뒤집어쓴 어린 아들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지금도 미용실 의자에 앉으면 여전히 졸리다), 아버지는 그 추억의 은색 바리깡 손잡이 끝으로 꾸벅거리는 내 뒤통수를 툭툭 쳐가며 머리를 깎으셨다.

요새는 꼬마들 머리도 꽤 길어졌고, 어른들 머리와 똑같이 ‘헤어스타일’이라는 게 있어서 아무나 머리를 깎겠다고 덤빌 수 없게 됐다. 하지만 30여 년 전 시골에선 바리깡 날에 캡을 하나 씌워 몇 밀리 정도의 여유를 남기고 그저 박박 밀기만 하면 끝나는 이발이었으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발 한 번 하려면 아이들을 데리고 읍내까지 나가야 하는 산골 마을이라 아버지가 바리깡을 잡는 날이면 옆집에서도 다들 싫다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붙잡아다 우리 아버지에게 이발을 부탁하곤 했기 때문에 인근 꼬마들 머리 길이와 스타일은 언제나 비슷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아버지 이발 솜씨는 별로 시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깟 애들 머리 좀 깎자고 읍내까지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그렇고, 게다가 돈까지 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어서 군대에서 깍두기 머리 몇 번 깎아본 솜씨를 믿고 바리깡을 사셨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깎는 게 아니라 반은 잡아 뜯고 뽑는 바람에 꼬마들은 눈물이 찔끔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머리를 좀 흔들기라도 하면 이번엔 또 바리깡으로 뒤통수를 쿡쿡 쥐어박았으니 그 이발 실력이라는 게 안 봐도 알만한 수준이 아닌가.

내 아들의 머리를 깎으며

지난 주 토요일 저녁에 나는 다섯 살짜리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먼저 식탁의자 팔걸이 위에다 도마를 걸쳐놓고, 그 위에 아이를 앉혀 욕실 거울과 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사두었던 이발기세트(모터 바리깡, 가위, 빗, 보자기가 들어있다)를 꺼냈다.

일단 심호흡부터 후! 나 역시 아버지처럼 군대에서 몇 번 해본 솜씨만 믿고 무작정 일을 벌여 놓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한담? 만약 잘못되어 꼴이 우습게 되면? 아들이야 뭐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애 엄마한테는 갖은 잔소리를 다 듣게 될 터인데.

기왕에 시작한 거, 일단 다림질 할 때 쓰는 물뿌리개로 머리를 좀 적셔놓고, 바리깡으로 한 바퀴, 다시 가위로 한 바퀴. 앞머리도 좀 자르고, 울퉁불퉁한 부분 좀 더 다듬고 또 다듬고 해놓으니 그럭저럭 봐줄 만 하다.

이발소 의자에 앉기만 하면 나도 여전히 졸리다.
▲ 잠들어버린 아들 이발소 의자에 앉기만 하면 나도 여전히 졸리다.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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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애비를 닮아 이발하는 동안 내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꾸벅꾸벅 졸았고, 나 역시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바리깡으로 뒤통수를 툭툭 쳐가면서 머리를 깎았다. 보자기 위로 머리만 내놓고 졸고 있는 아이가 어찌나 예쁜지 도저히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눈을 떠보려고 애를 쓰지만 점점 더 눈은 감기고, 머리가 꾸벅꾸벅 흔들리는 반경은 점점 더 커져 저러다 의자 밑으로 떨어질라 걱정이 됐다. 나는 잠시 기계를 내려놓고 아들이 편히 잘 수 있도록 머리를 붙잡아 주었다.

‘아하! 이런 거였구나. 30여 년 전의 내 아버지도 꼭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꼭 읍내 행차의 번거로움이나 돈을 아끼겠다는 생각보다 바로 이런 느낌 때문에, 오늘 내가 맛 본 이 맛 때문에 내 아버지도 손수 아들의 머리를 깎으려 하셨구나!’

아내는 몇 번이나 이발을 해야 그 기계 값 본전을 뽑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오늘 단 한번의 이발로 본전 이상, 아니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얻었노라고 대답했다. 머잖아 아버지 생신 때 시골에 내려갈 예정이니, 그때 내 손으로 아버지 이발 한 번 해드리고 싶지만 아직은 실력이 모자라 차마 자신이 없다.


태그:#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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